166화 함정 (2)
솔국에 도착한 카엘 일행은 수호병과 작별하고 방주에서 내렸다.
바다에 있을 때 덤비던 요괴들도 도망친 탓에 별 방해 없이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타마모는 어느새 솔국의 전통 복식으로 갈아입은 채로 물었다.
“그럼, 어디로 안내해 줄까?”
“주탄동자나 활주박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카엘이 타모라 국왕에게 받은 솔국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래? 어디 보자.”
타마모가 손가락으로 해변을 짚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으로 선을 그었다.
“우리 위치가 이쯤이고, 여기가 주탄동자의 본거지인 대기산이거든. 여기로 가면 되겠다.”
“활주박의 본거지는?”
“딱히 없어. 워낙 신출귀몰하고 여기저기 쏘다니거든.”
“그렇군.”
그렇다면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대기산으로 가자.”
“이쪽이니까 따라와.”
타마모는 신난 듯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마모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다. 저기 마을이 있는데 뭐 좀 먹고 가는 게 어때? 타모라국에도 맛있는 게 많지만, 여기도 나름 별미가 여럿 있거든.”
‘비상식도 있는데 굳이 마을에 들러야 하나?’
카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슬쩍 일행을 보는데, 다들 기대하는 눈초리가 아닌가?
‘하긴 계속 바빴으니 조금만 숨 돌려도 되겠지.’
타모라국에 오자마자 전투의 연속이었다.
전투 후에도 쉬지도 못하고 잔당을 해치우랴, 사람들 구호하랴 쉴 틈 없이 뛰어다녔다.
‘게다가 바다에서부터 습격당한 거로 봐서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상대가 대비하고 있는 건 기정사실로 여기고 무리하지 않고 여유 있게 움직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좋아. 가서 먹을 거 먹고 잠깐 쉬었다 가지.”
“야호!”
카엘의 말에 브로칸이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했다.
말을 안 했지만, 내심 먹고 갔으면 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일행도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니 잘했다 싶었다.
그런데 마을 근처로 가니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 게 아닌가?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기괴한 거였다.
눈 코 입이 비뚤어져 있는가 하면, 아예 없는 이도 있었고.
팔다리가 유난히 긴 사람이라든지.
밥솥을 넣어 둔 것처럼 뚱뚱한 사람.
심지어 고양이나 여우의 꼬리가 달리거나.
귀인처럼 뿔이 난 이도 있었다.
앞장서던 브로칸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생겼나요? 요력 냄새도 조금 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럴 리가. 다 요괴가 된 거야.”
타마모는 드물게 심각한 얼굴로 마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엘이 물었다.
“원래 요괴 마을일 가능성은?”
“없어. 사실 여긴 문어 구이가 맛있어서 종종 왔던 곳이거든. 저 옷을 봐서는 문어 구이 파시던 할머니가 요괴가 된 거 같네.”
그렇게 말한 타마모가 다시 발을 뗐다.
“저기에 다른 마을이 있으니까 가 보자.”
그 말을 따라 다음 마을로 이동했지만,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모두 요괴로 변해 있었다.
그다음 마을도 마찬가지.
제법 큰 도시도 주민들이 모두 요괴가 되어 있었다.
소피아가 충격을 받은 듯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전부 요괴가 되다니…….”
“어떻게 된 거죠? 왜 솔국의 국왕은 백성들이 저 지경이 되도록 놔둔 건가요?”
“그, 글쎄 나도 몰라.”
고여가 잔뜩 흥분해서 물었지만, 타마모도 별다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카엘도 충격을 받았지만, 별개로 타모라국을 침략한 이유를 알게 된 듯했다.
‘더 해칠 사람이 없어서 타모라국을 침략해 왔나 보군.’
사람을 해쳐서 요력을 얻는 솔국의 요괴들이, 더 요력을 얻으려면 타국을 침략할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카엘이 타모라국을 구한 것과 달리, 솔국은 이미 늦은 셈이었다.
“카엘 님, 이제 어떻게 하죠?”
“아예 해치워서 안식이라도 주는 게…….”
브로칸의 물음에 카엘이 대답하기 전에 고여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일국의 공주로서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카엘은 반대했다.
“딱히 공격성이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괜히 힘 빼지 말고 일단 주탄동자부터 해치우죠.”
그 말대로 요괴로 변한 주민들은 모습이 기괴해지긴 했어도 평상시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심지어 카엘 일행이 가까이 가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 맞다!”
고여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타마모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주탄동자의 약점이 떠올랐어!”
“원래부터 알고 있던 건 아니고?”
“…….”
카엘의 추궁에 타마모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알고 있다가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아마 그런 정보가 한둘이 아니겠지.’
하지만 붙잡아 고문이라도 하기 어려운 이상, 달래 가면서 정보를 얻는 수밖에 없었다.
“더 추궁 안 할게. 그래서 주탄동자의 약점이 뭔데?”
“…주탄동자가 술을 아주 좋아하거든.”
이름만 봐도 좋아할 거 같긴 했다.
“그렇다고 아주 술이 센 건 아니거든? 요괴들은 술을 못 만드니 인간들이 공양하는 술을 마시는데, 한 번은 인간들이 일부러 아주 독한 술을 주고 주탄동자가 곯아떨어진 틈에 공격해서 죽을 뻔한 적 있어.”
“그래?”
“그럼, 아주 소문이 파다해.”
타마모가 확신해 차서 말하자 소피아와 브로칸이 기뻐했다.
“오! 잘됐네요.”
“맞아요. 카엘 님이 만드신 술에 아예 독을 타서 주면 되겠네요.”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과연 우리가 주는 술을 먹을지…….”
카엘은 회의적이었는데, 타마모가 확실히 정리해 줬다.
“독은 안 돼! 그 정도는 경계하는지 꼭 부하에게 먹여 보거든. 원래 요괴에게는 어지간한 독도 통하지 않지만.”
“그렇군요. 어?”
아쉬워하던 브로칸이 갑자기 귀를 쫑긋했다.
“왜 그래?”
“술 냄새가 나는데요? 잠시만요!”
그러면서 저 앞으로 뛰어가더니 황급히 돌아왔다.
“저기 마을이 있어요. 그것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요.”
“어서 가 보자!”
카엘의 말에 모두 발걸음을 빨리해서 뛰어갔다.
브로칸의 말대로 마을이 나왔는데, 정말 여기 주민들은 모두 멀쩡했다.
“이 와중에도 무사한 마을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고여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지만, 타마모는 되레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이제 주탄동자의 영역 안인데.”
카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요괴는 술을 못 만든다며? 여기서 술을 빚어 올리나 보지.”
“아! 그렇겠네.”
타마모는 그제야 깨달은 듯 감탄했다.
“일단 가서 살펴보자.”
그렇게 말한 카엘은 서방에서 온 상인으로 위장해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특이한 차림새에 경계했지만, 사람인 걸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특히 여기까지 오는 길에 들른 마을이 모두 요괴화돼서 난감했다는 말에 더욱 믿는 눈치였다.
카엘이 촌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찌 무사한 겁니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 산에 사는 주탄동자라는 요괴에게 술을 진상하는 거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마을에 아주 맛있는 술을 만드는 장인이 계시거든요.”
카엘의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촌장은 뜻밖에도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모두 요괴로 변한 세상이 됐는데 저희만 무사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번에 술을 올리면서 주탄동자를 암살할 생각입니다.”
‘직접 요괴를 쓰러트릴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궐기였다.
“근데 가능하겠습니까?”
“주탄동자가 대단한 요괴라고 해도 독한 술에 약하니. 자고 있을 때 무사가 뛰쳐나가 목을 베어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런 말을 저희에게 하시는 건…….”
그런 회심의 작전을 외부인에게 말한다는 건, 이 일에 끌어들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네, 무사님이 여러분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리로 오시죠.”
촌장은 누가 볼 게 걱정되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집으로 안내했다.
집 안에는 솔국에서 유행하는 갑옷을 입고 검을 여러 자루 찬 사내 다섯이 앉아 있었다.
중앙에 앉은 사내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전 라이코우라고 하고, 이쪽은 제 부하들입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품고 계신 분들이 오시는 거 같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정중한 인사에 카엘도 솔직히 말했다.
“카엘이라고 합니다. 타모라 공주의 요청으로 타모라국의 요괴를 물리치고, 무슨 이유로 침공했는지 그 원흉을 찾으러 왔습니다.”
“헉! 정말입니까?”
카엘의 말에 라이코우는 물론, 그 부하들까지 술렁였다.
그들도 요괴들이 솔국에 만족 못 하고 타모라국까지 침략하러 간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타모라국도 요괴의 손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막아 내다니.
그때 고여가 나서서 말했다.
“타모라국이 멀쩡한 건 다 카엘 님 덕분입니다. 카엘 님이 나서 주지 않았다면, 저희 백성들도 모조리 요괴에게 당했을 거예요.”
“오!”
고여의 극찬에 라이코우는 놀란 눈으로 카엘을 쳐다봤다.
“제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다들 힘을 합쳐 싸우신 덕분이죠.”
겸손하게 말한 카엘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귀국의 왕은 혹시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요괴 퇴치를 명받고 나오자마자 세상이 이렇게 돼서.”
아무래도 라이코우도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어쨌든 서로 협력해서 주탄동자를 퇴치하도록 하죠.”
카엘의 말에 라이코우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합니다.”
“음?”
카엘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여러분을 여기에 부른 건, 함께 싸우자는 게 아니라 저희를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저희가 왜 방해하겠습니까?”
“실은 오늘 밤이 주탄동자에게 술을 진상하기로 한 날입니다. 그때 숨어 들어가서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목을 벨 생각입니다.”
그 말에 왜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괜히 저희가 가서 들쑤셔 놓을까 우려되신 거였군요.”
“네. 제가 여러분의 기운을 느끼는 만큼 그 요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음,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카엘은 여러모로 걱정스러웠다.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 대책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라이코우라는 무사도 제법 강한 듯하지만, 소드 엑스퍼트보다 조금 강한 정도고 부하들은 그보다 더 떨어져 보였다.
만약 작전에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몰살당할 게 분명했다.
두 번째로 지금 이 상황이 아무래도 비정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약점이 그렇게 공공연하게 소문나 있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단 말이지.’
“괜찮습니다. 만약 저희가 실패하면 뒷일을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라이코우가 죽음을 불사하는 의지를 보이자 카엘은 더는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작전이 성공하길 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엘은 나름대로 도울 수 있는 건 돕기로 마음먹었다.
* * *
그날 밤.
마을의 장정들이 사람 키만 한 거대한 술 항아리를 짊어지고 대기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무려 열 개.
주탄동자가 체격도 크다 보니 이 정도로도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 거대한 술 항아리 중 절반에는 라이코우와 그 부하 넷이 들어가 있었다.
카엘은 두억시니에게 받은 도채비 감투를 쓰고 몰래 따라갔다.
낮에도 시험해 봤는데 완전히 기운을 지워 주는지 라이코우도 눈치 못 챘다.
다만 여럿이 함께 갈 수 없어 혼자 움직여야 했다.
대기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네 개의 관문이 있고, 그 관문을 주탄동자의 심복 넷이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를 무사히 통과하니 산에 세워져 있는 게 이질적일 정도로 거대한 저택이 나왔다.
그 안에는 붉은 얼굴에 키가 6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거인이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고, 여러 여자가 붙어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저게 주탄동자로군.’
주탄동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 차례로 내려놓는 술 항아리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더니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부하들이 달려들어 뒤에 있는 술 항아리 다섯 개에 창을 찔러 넣는 게 아닌가?
쨍그랑.
푸욱! 푹! 푹!
술 항아리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라이코우와 그 부하들은 아무것도 못 하고 그대로 당했다.
카엘이 도망치도록 손쓸 겨를도 없었다.
-멍청한 녀석들.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아느냐?
주탄동자는 그런 인간들을 비웃었다.
‘역시 함정이었나.’
카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탄동자를 쳐다봤다.
라이코우의 작전은 실패했지만, 카엘이 준비한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