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부작용 (5)
고여가 쓰러진 직후, 카엘이 엘릭서를 꺼내 먹여서 살렸다.
아조트가 소멸되는 걸 피하고자 스스로를 공격에 노출한 것도 엘릭서로 부활할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고여가 나서서 나 대신 공격을 받았지.’
마석으로 강해진 고여는 카엘이 감수했던 피해보다 훨씬 적은 피해를 받았다.
그래도 아홉 개의 꼬리가 동시에 소멸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거였다.
카엘은 황급히 자기가 쓰려고 했던 엘릭서를 대신 먹였다.
그 덕분에 고여는 소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처도 깨끗하게 나았다.
하지만 충격이 컸는지 바로 깨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따로 돌보는 사이, 바다에 안전하게 있던 아파기 공주를 데려왔다.
아파기 공주는 서귀성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진 언니를 보며 울었다.
국왕도 옆에서 같이 오열하며 고여를 불렀다.
그렇게 종일 울면서 부르던 게 효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고여가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카엘도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 지켜봤다.
그런데 처음 눈을 떴을 때는 멀쩡해 보이던 고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닌가?
카엘은 당황했다.
‘설마 요괴라 엘릭서를 먹고 부작용이라도 생긴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일단 마석을 부착해서 생긴 부작용은 분명 아니었다.
아무리 마석의 부작용이 강하다고 해도.
엘릭서에는 마석뿐만 아니라 드래곤 하트, 현자의 돌, 세계수의 씨앗의 정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주 오래 마석을 달고 지낸 것도 아니니까, 괜찮을 텐데.’
다행히 걱정은 기우였는지 고여의 상태는 금방 나아졌다.
문제는 그날 이후로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거였다.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데.’
꼭 고여가 안 막아 줘도 어떻게든 살 수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막아 준 거였다.
죽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안 겪게 된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지금은 고여를 찾아다닐 시간이 없었다.
솔국 요괴들의 총공격을 막아 냈다고 해도 아직 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이어서였다.
당장 국왕이 있는 서귀성만 해도 대악환의 총공세에 벽이 무너지고 다치고 죽은 이도 잔뜩 있었다.
심지어 불의 비에 소나기까지 겹치자 창고가 불타고 그나마 건진 식량도 물에 젖어 먹을 것도 부족했다.
‘이거,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군.’
괴물들을 물리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현재 상황을 진단해 보니 괴물에 잡아먹히는 게 아니라, 식량 부족과 전염병에 잡아먹힐 판이었다.
카엘은 어인족에게 부탁해서 식량과 약품 등 각종 물자를 빠르게 들여와 급한 대로 구호에 쓰이도록 했다
구호 물품을 전달하는 것과 동시에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청결하게 지낼 수 있도록 안내토록 하고, 카엘도 스스로 부상자와 병자들의 치료에 나섰다.
나머지 일행도 카엘을 돕거나, 인근을 수색하며 숨어 있는 괴물과 귀인을 퇴치했다.
특히 라 키레아스는 브로칸을 데리고 마족의 흔적을 찾으러 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여기까지 오지 않았거나, 솔국으로 돌아간 거 같네요. 솔국으로 가서 찾아야겠네요.”
카엘의 말에 라 키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솔국으로 가서 뒤져 봐야 할 거 같다.”
“여기도 급한 불은 껐으니 조만간에 가죠.”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무관이 와서 국왕이 찾는다고 했다.
카엘은 곧바로 국왕에게 달려갔다.
‘아무래도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겠지.’
카엘의 짐작은 일부만 맞았다.
그 앞으로의 일은 맞지만, 예상 못 한 일을 거론한 거였다.
바로 혼인 이야기였다.
“공주에게 듣자 하니, 원래 부마를 찾으러 가서 그대를 데려왔다던데.”
“그렇긴 합니다만…….”
카엘은 난처한 얼굴로 아파기를 쳐다봤다. 고여는 지금도 어디로 갔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부마 이야기는 이미 없던 거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것도 들었네.”
카엘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으니 아파기나 고여가 다르게 이야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여러 공주더러 당분간 교류하면서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했다지. 결국, 완곡한 거절을 한 게 아닌가?”
“어. 정말인가요?”
고여는 아마 간파한 듯했지만, 아파기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놀라서 물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대가 사양한 건 알겠네. 하나, 일련의 사건 동안 그대를 지켜보다 내가 욕심이 나서 말을 꺼낸 거네.”
그렇게 운을 띄운 국왕이 말을 이어 갔다.
“그대는 단순히 외적과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아는 거 같더군. 이 땅의 백성들이 평온하게 살려면 그대가 통치하면 좋다는 게 내 판단이야!”
“그렇게 말씀하셔도…….”
카엘이 뭐라고 거절하기 전에 국왕이 다급하게 말했다.
“부마가 싫다면 내 당장이라도 왕위를 물려주겠네.”
“저,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부마로 삼는 게 아니라 왕위를 물려준다니.
너무나도 파격적인 제안에 옆에 있던 대신들마저 놀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건 카엘이 거절했다는 거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타국의 우환을 기회 삼아 나라를 차지하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 내가 생각이 짧았네.”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던 국왕이 말했다.
“하긴 지금 이 난리가 난 나라를 맡아 달라는 건, 격무를 떠넘기는 뻔뻔한 짓이겠지. 내 전력을 다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다시 요청하겠네. 그대가 탐날 만한 나라를 만들어서 말이야.”
‘…그게 아닌데.’
카엘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무슨 연유가 됐든 앞으로 나라를 위해 힘쓴다는 데 초를 칠 필요는 없다고 여겨서였다.
막상 국가의 반석을 닦아 놓을 정도가 되면, 지금 했던 말을 철회하고 싶을지도 몰랐다.
카엘이 지금 제안을 받지 않은 이유도 그거였다.
당장 눈앞의 일이 고마워서 뭐든 주고 싶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봐서였다.
후회만 하면 다행이지, 제안을 받아들인 상대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그럼, 그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도채비들은 어디 있는가? 내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하는데 도통 보이지 않는군.”
국왕의 물음에 카엘이 미리 도채비와 요괴들에게 들은 대답을 전했다.
“안 그래도 국왕께서 한낱 이매망량(魑魅魍魎)에게 그러시면 안 된다고 얼씬도 하지 않는 겁니다.”
아무리 도채비와 온갖 요괴, 괴물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왕이 직접 감사를 표했다가는 국기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 말에 국왕이 감탄했다.
“그렇게 깊은 뜻이!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이로다.”
게다가 도채비들도 괜히 신격화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러며 앞으로도 놀라게 하고 장난치려면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좋다나?
최근만 해도 장난치러 나타나면 고맙다고 엎드려 절하니 하나도 재미없다고 도채비들이 난리라고 했다.
그래 봐야 몇백 년, 아니 몇십 년만 지나면 죄다 잊을 테니 상관없다고 했지만.
당장은 남은 괴물과 귀인들을 잡아 해치우는 놀이를 하느라 바빴다.
카엘은 마침 국왕 앞에 선 김에 말했다.
“저희는 조만간 솔국으로 향할까 합니다.”
“솔국에?”
“네, 이 일을 벌인 원흉을 찾을 계획입니다.”
“그것도 필요한 일이다만, 너무 이르지 않은가?”
국왕이 우려를 표했다.
겨우 괴물과 귀인을 막아 냈지만, 그 과정에서 무관과 병졸도 많이 죽고 다쳤다.
게다가 백성들이 먹을 식량도 부족해 카엘의 지원을 받는 상황.
도저히 바다 건너 타국을 침공할 여력이 없었다.
그 우려를 감지한 카엘이 덧붙였다.
“아 저희끼리만 솔국을 탐색할 예정입니다.”
“그렇군. 우리나라에서 가진 솔국의 지도를 내어주지. 만들어진 지 오래되어 정확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그 정도로 도움이 되겠어? 내가 안내해 줄게.”
허공에서 타마모가 나타난 거였다. 평소와 달리 팔다리가 짧은 아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카엘은 말했다.
“소형화에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걸 보니 환영인가 보네.”
아무래도 괜히 나섰다가 공격을 받고 소멸하면 끝이라서.
“와! 역시 대단해! 이거 쉽게 속여 넘기기 힘들겠는데?”
“그런데 안내해 준다고? 방금 말만 들어도 언제든 속일 생각인 거 같은데, 널 뭘 믿고 데려가?”
“넌 쉽게 안 속잖아!”
“그래도 안 돼. 내가 항상 감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감시? 그럼 얘가 날 감시하면 되지 않아?”
타마모는 그러면서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고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국왕도 있는 걸 몰랐는지 깜짝 놀랐다.
“고여, 네가 왜 거기 있느냐?”
“죄, 죄송합니다. 아바마마.”
고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든 말든 타마모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구미호끼리는 숨어 있어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거든.”
“정말인가? 그럼 고여 님이 진작에 널 발견했을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지형지물에 몸을 숨기거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보이긴 해. 그 때문에 일부로 직접 안 나선 거였거든.”
그렇게 말한 타마모가 재촉했다.
“그래서 어쩔 거야? 내 안내 안 받을 거야?”
“흠. 또 고여 님께 도움받기는 그렇지만, 고여 님이 도와주시면 고려해보지.”
초행길이니만큼 아무래도 안내역이 있는 게 편하긴 했다.
“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고여가 그녀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자기가 생각해도 어색했다고 생각했는지 눈알을 굴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그대로 저 멀리 떨어졌다.
‘저렇게 호들갑 떠는 성격 같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솔국에 함께 가니 더 알아 갈 시간은 있었다.
그렇게 솔국행이 결정됐다.
카엘 일행에 고여까지 더해도 단출한 인원이라 출발 준비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카엘이 출발한다는 소식에 함께 싸웠던 도채비와 요괴들이 찾아왔다.
“그래, 솔국으로 간다고? 우리는 못 가서 아쉽네. 가서 한바탕 혼쭐을 내야 다시는 쳐들어올 생각을 못 할 텐데.”
“맞는 말이다! 이 땅을 어지럽힌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빈승도 동의하오. 그래야 재발을 방지할 수 있지 않겠소?”
두억시니, 금갑장군, 백포건호의 말에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이 땅에 남아 있는 귀인과 괴물들을 해치워야죠. 저희도 토벌하러 가는 게 아니라 마석을 뿌리는 마족을 찾아내는 게 목적입니다.”
“확실히 마석만 없었어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거 같다.”
카엘의 말에 두억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품에서 검은 타모라국의 전통 모자를 꺼내 주는 게 아닌가?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은 특이한 모양의 모자였다.
“이거 받아.”
“이미 만년설삼을 받았습니다만.”
“그거랑 별개로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야. 도채비 감투라는 건데, 이걸 쓰면 투명해져서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이게 되지.”
그 설명을 들은 카엘은 두억시니가 전투 중 갑자기 나타났던 걸 떠올렸다.
“전에 단피몽두와 싸울 때도 이걸 썼었군요.”
“맞아! 누구를 때리거나 만지면 투명화가 풀리니까 주의하라고.”
“감사합니다. 유용하겠네요.”
특이한 마법 도구인 데다가 탐색하러 가는 만큼 아무래도 몇 번은 쓸 일이 있어 보였다.
카엘이 공손하게 도채비 감투를 받자, 이번에는 금갑장군이 나섰다.
“나는 이걸 드리겠네.”
그러면서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주머니 두 개를 건네줬다.
“그 안에는 하얀 콩과 검은 콩이 들어 있는데, 내가 요력을 넣어 뒀으니 바닥에 내던지면 각각 백갑신병과 흑갑신병으로 변할 걸세.”
소수로 가는 만큼 한 번은 쓸데가 있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카엘은 인사를 하고 정중하게 받았다.
마지막으로 백포건호가 준 것은 고운 면포에 싼 약재였다.
“이건 만년설삼아닙니까?”
만년설삼을 본 카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전에 두억시니로부터 받기로 한 만년설삼은 싸우는 도중에 받아먹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강한 힘을 가지게 되긴 했지만,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회귀한 약재를 차분히 연구해 보고 싶었던 카엘은 여러모로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약재를 좋아한다 들었소만, 정말이로군. 참으로 다행이구려.”
그 말에 카엘이 멋쩍게 웃었다.
그 길로 심해왕의 방주에 탄 카엘 일행은 솔국으로 향했다.
그 시각 솔국은 타모라국 정벌이 실패했고 대악환이 대패하다 못해 그대로 소멸했다는 소식에 술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