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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154화 (154/234)

154화 도채비 전설 (3)

도채비와 씨름은 일종의 함정이었다.

도채비의 힘만 해도 보통 장정보다 월등히 세지만, 요력으로 다리를 꼼짝하지 않게 만들어 두기도 했다.

그런데 카엘은 도채비를 번쩍 들어서 냅다 바닥에 꽂은 거였다.

“내가 졌네. 무슨 수를 쓴 건가?”

김 서방이 벌떡 일어나더니 카엘에게 물었다.

“힘으로 한 겁니다만.”

“정말? 어디 한번 이번에는 팔씨름을 한번 해 보세.”

김 서방의 제안에 라 키레아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 되게 귀찮게 구네.”

“아뇨, 괜찮습니다. 한번 해 보죠.”

“좋아. 여기 위에서 하자고!”

카엘이 승낙하자 김 서방은 신났는지 근처에 있던 바위를 번쩍 들고 와서 내려놨다.

그리고 팔씨름을 했지만, 카엘이 곧바로 이겼다.

“아이코! 내가 졌네! 힘이 정말 세긴 세구먼. 거기다가 요력도 통하지 않는 거 같고. 같이 온 이들도 하나같이 보통은 아닌 거 같다만.”

멋쩍은지 뒤통수를 긁으며 중얼거리던 김 서방은 카엘의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고여를 발견하고는 버럭 화를 냈다.

“너, 너. 네가 무슨 염치로 여기에 왔어?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 벌로 아직 여기서 입구를 지키고 있잖아!”

“죄, 죄송합니다…….”

고여는 곧장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 말에 브로칸이 슬쩍 고여에게 물었다.

“고여 님은 여길 어떻게 지나가셨나요?”

“…이분이 낮잠을 자는 사이에 지나갔어요.”

“그래요? 낮잠 잔 쪽도 잘못한 거 같은데.”

“뭐?!”

김 서방이 울컥하는 걸 보고 카엘이 나섰다.

“자, 자. 화내지 마시고. 사과하는 의미로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엇, 정말인가?”

안 그래도 싸리비가 먹던 술을 탐내던 김 서방이 반색했다.

“그럼 고여 님의 사과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여기 지키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씨름도 좋아하니까 힘들 거 하나 없어.”

“…….”

카엘 일행은 김 서방이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걸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카엘은 그런 김 서방에게 웃으며 술을 권했다.

“참으로 마음이 너그러우시군요. 자, 어서 한잔 드시죠.”

“그래, 내가 좀 마음이 넓어. 헤헷.”

칭찬에 입이 귀에 걸렸던 김 서방은 카엘이 따라 준 술을 보고는 불평했다.

“이거 잔이 너무 작은 거 아닌가? 나 같은 대인에게는 안 어울리는데.”

“나도 그 소리 했지. 그래도 한번 마셔 보면 왜 그런지 알 거야.”

“그래?”

김 서방은 싸리비의 말에 냉큼 술잔을 비웠다.

“크으으! 맛 좋다! 확실히 이거 막걸리처럼 벌컥벌컥 들이켜는 술이 아니구먼!”

“…….”

김 서방이 감탄하고 있는데, 싸리비가 침을 삼키며 넌지시 카엘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왜 그리 쳐다보십니까?”

“나도 사과받아 줄 수 있는데.”

“싸리비 님이 사과받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에 도와주시면 한잔 드리죠.”

“앗! 정말? 약속이야, 약속! 이히! 신난다!”

싸비리는 약속만으로 벌써 한잔한 것처럼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걸 보며 모르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도채비라는 게 조금 순진해 보이네요.”

“나는 성격이 시원시원한 게 마음에 드는걸.”

브로칸은 싸리비가 흥겹게 춤을 추는 걸 보며 말했다.

“그럼 김 서방 님,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지나가도 돼. 맞다! 나도 도와줄 수 있으니까 불러 줘.”

“알겠습니다.”

김 서방의 말에 카엘이 웃으며 대답했다.

* * *

김 서방을 지나서 길을 따라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나무 숲이 나왔다.

“여기까지 왔으면 다 온 거예요.”

“그렇군요.”

고여의 말에 다들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그런데 점점 들어갈수록 길이 좁아지는 게 아닌가?

나중에는 한 명만 간신히 지날 정도로 좁아 다니기에도 불편했다.

“원래 이렇게 멀었나?”

고여가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브로칸이 말했다.

“이 냄새는?! 아닌가?”

“왜?”

“카엘 님, 아까 지나가면서 맡았던 냄새가 나서요. 분명 그 냄새, 왜 이 냄새가 여기서 나는 거지?”

“맞아요. 여기에 정령이 못 들어와서 못 물어보지만, 아까 봤던 풍경이에요.”

브로칸에 이어 엘프인 모르타까지 그렇게 말하면 확실했다.

“아무래도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모양이네요.”

카엘의 말에 고여가 여우 인간으로 변해 주위를 살피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길을 잃도록 요술을 부린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진작 이 모습이었으면 곧바로 눈치챘을 텐데.”

“괜찮습니다. 조금 더 걸었을 뿐인데요.”

“잠깐 기다려. 내가 위에서 길 봐 줄게.”

자신만만하게 말한 라 키레아스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

높이 솟은 대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아무리 날아올라도 대나무가 가리는 게 아닌가?

라 키레아스의 비행에 맞춰 자라는 거였다.

“이게 지금 해보자는 거야?”

대나무를 노려보던 라 키레아스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예 태워 버리면 되지.”

그러자 이쪽도 그냥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대나무 끝을 날카롭게 해서 라 키레아스를 노리는 게 아닌가?

그걸 본 카엘이 라 키레아스를 달랬다.

“라 키레아스 님, 저희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진정하고 내려오세요.”

“흥! 난 모르니까 알아서 해.”

라 키레아스는 퉁퉁거리면서도 얌전히 아래로 내려왔다.

카엘은 대나무 숲을 향해 소리쳤다.

“두억시니 님! 저희는 타모라 국왕, 유리 도라의 부탁으로 이 땅에서 괴물과 괴인을 몰아내는 데 협력을 구하고자 찾아왔습니다!”

“…….”

대나무 숲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지만, 카엘은 계속해서 말했다.

“더불어 여기 고여가 만년설삼을 훔친 것도 사과드리려고요.”

고여와 만년설삼 이야기가 나오자 대나무 이파리가 분노하듯 파르르 떠는 소리를 냈다.

‘역시 반응이 있군.’

“…….”

하지만 아무런 말이 돌아오지 않자 카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맨입으로 용서를 구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네 얄팍한 술 따위로 내 기분을 풀 수 있을 거 같으냐.”

아무래도 입구에서부터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아주 위협적이었지만, 카엘은 개의치 않은 듯 대꾸했다.

“술이 아니라 약을 만들어 드리려고요.”

“약?!”

“네. 그 구하기 힘들다는 만년설삼을 취미 삼아 재배하셨던 건 아닐 테고. 어디 필요한 데가 있어서 키우시던 거 아닌가요?”

만년설삼은 아주 극지에 자라나는 산삼의 일종으로.

요괴가 먹으면 요력이 증가하고, 무인이 먹으면 무공이 강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병자가 먹으면 무슨 병이든 낫고, 보통 사람이 먹어도 수명이 길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보통 그걸 먹는 사람이 바라는 게 그거라서 그렇지.’

자연력의 정수인 만년설삼은 그걸 먹으면서 바라는 게 있으면 기적처럼 이뤄 줬다.

“…네 말이 맞다. 근데 내가 원하는 약을 만들 수가 있겠느냐?”

“네, 이런 약도 만들 수 있거든요. 브로칸.”

“아, 네.”

카엘의 의중을 파악한 브로칸이 곧바로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대나무 숲 안에서 두억시니가 퉁명스레 말했다.

“…늑대 인간으로 변신하는 약이 필요한 게 아니다.”

“아, 얘는 라이칸스로프라는 종족으로 이 모습이 본래 모습입니다.”

“…그렇군.”

두억시니가 민망해하는 사이, 브로칸이 거대화 포션을 마셨다.

그러자 점점 덩치가 커지는 게 아닌가?

그러자 대나무 숲에서 두억시니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말 네가 먹은 약 때문에 저렇게 커진 거냐? 원래 저렇게 커지는 요괴가 아니라?”

“네. 인간인 제가 먹어도 마찬가집니다. 한번 먹어 볼까요?”

“그래, 그것까지 보여 주면 믿겠다!”

카엘은 그 말에 거대화 포션을 하나 꺼내 마셨다.

그러자 카엘도 점점 커졌다.

“정말이구나!”

두억시니가 감탄하는 걸 보고 라 키레아스가 쏘아붙였다.

“이쪽이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면 그쪽도 숨어서 떠드는 건 그만하지?”

“…알았다.”

곧바로 대나무들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두억시니가 나타났다.

두억시니는 사내 옷을 입은 여인이었는데, 그 덩치도 다른 도채비들 못지않게 컸다.

“내가 두억시니다!”

그러자 고여가 냉큼 엎드려 빌었다.

“두억시니 님, 제가 만년설삼을 훔쳐 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알고 있다! 널 만나면 꼬리를 모두 뽑아 버린 뒤, 머리만 보이게 땅에 묻어 두려 했었지!”

두억시니가 고여를 노려보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뱉었다.

고여는 그저 계속 엎드려서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그런 고여를 살펴보던 두억시니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그걸 먹은 것치고는 요력이 여전히 보잘것없어 보이는구나. 아직 만년설삼에 걸맞게 자라진 못했어도 요력에 제법 보탬이 됐을 텐데.”

‘요괴가 훔쳐 갔으니 그리 오해할 만하지.’

카엘이 나서서 해명해 줬다.

“고여 님이 드신 게 아니라, 아픈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린 겁니다.”

“정말이야?”

“…덕분에 저희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고여의 말에 눈을 끔뻑끔뻑 뜨던 두억시니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구미호에게 아버지가 어딨다고.”

“국왕 유리 도라가 고여 님의 양아버지입니다.”

“그래?”

“그건 확실합니다.”

두억시니가 미심쩍어하는데 뒤에서 불쑥 싸리비가 나타나 말했다.

보니까 김 서방도 뒤에서 따라온 게 아무래도 지름길로 온 듯했다.

“흠.”

한편 그럴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한 듯 두억시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픈 사람을, 그것도 인간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그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갔다고 하니 혼내기도 어려운 거였다.

만년설삼 같은 귀한 걸 당연히 쉽게 가져가게 내버려 두진 않았다.

김 서방이 졸아서 입구가 뚫렸다고 해도 갖은 함정을 파 놓고 숨겨 뒀다.

그걸 다 뚫었다는 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훔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양아버지라고 해도, 그토록 인간을 위하다니. 대단하구나.’

거기에 감명받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에 상응하는 걸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 용서해 줘도 나쁘지 않다는 계산이었다.

두억시니가 카엘에게 물었다.

“그래, 사과의 의미로 내게 약을 주겠다고 했지.”

“네. 무슨 약을 원하십니까.”

“금방 네가 마신 그 약을 다오!”

두억시니의 말에 카엘은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제가 마신 약이라면, 거대화 포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포션? 아무튼, 커지는 약을 원하는 게 맞다.”

그걸 보고 브로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도 큰데 더 크고 싶은 건가?”

그러자 싸리비와 두억시니가 한마디씩 했다.

“사실 두억시니 님이 실제로는 조금 왜소하거든.”

“우리가 보기에는 귀여운데 아무래도 신경 쓰이나 봐.”

그러자 두억시니가 호통을 쳤다.

“이 자식들아, 시끄럽다!”

“이크!”

싸리비는 싸리 빗자루로 다시 변해 버렸고, 김 서방은 다른 곳을 보고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카엘은 그걸 보며 웃다가 두억시니에게 말했다.

“거대화 포션을 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먹는 사람에 맞춰 성분을 조절해야 해서 그대로는 못 드십니다. 기다려 주시면 맞춰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카엘이 아닌 인간은 무리겠지만, 변신하거나 변형하는 도채비에게 통하는 약은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좋아. 그 약만 만들어 주면 만년설삼 건은 잊겠다.”

그 말에 고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만약 성공하면 새로 키우던 것도 주지. 내겐 더는 필요 없으니까. 사실 키우기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거든.”

“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만년설삼에 대해 궁금했는데, 잘됐다.

키우는 것도 걱정 없었다.

약재를 재배하는 것도 약제사의 능력인 데다가, 세계수의 생명력과 엘프들의 도움을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고여의 사과를 구하러 온 게 주목적이 아니었다.

카엘은 분위기가 좋은 틈에 말을 꺼냈다.

“그리고 괴물과 귀인들을 퇴치하는 건 말입니다만. 이대로 솔국의 요괴들이 이 땅을 짓밟도록 내버려 두실 겁니까.”

그때 두억시니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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