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도채비 전설 (2)
도채비.
솔국의 요괴로 귀인과 괴물이 있다면, 타모라국에는 도채비라는 요괴가 있다.
사람을 해치고 잡아먹는 무서운 귀인들과 달리, 도채비들은 짓궂은 장난을 치긴 해도 사람들을 해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요상한 짓으로 사람들을 겁먹게 하거나, 골탕 먹이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도 요괴는 요괴.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귀인보다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다만, 대신들은 카엘의 말에 부정적이었다.
사대장군들도 기대를 많이 했던 것과 달리 황당한 제안을 듣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는 아니지만, 어찌 도채비의 도움을 받는단 말이오!”
“안 됩니다. 전하, 들개를 잡으려고 호랑이에게 집을 내주는 격이 될지도 모릅니다!”
“뜬금없는 소리긴 하네요. 과연 도채비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맞아. 이야기 속에 나오는 도채비들은 하나같이 장난꾸러기에 사람들을 놀리는 걸 좋아하는데,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요?”
“…못 미더워.”
뜻밖에도 국왕만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도 이 땅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존재가 아니겠소. 절박한 상황이니 힘을 합칠 수 있으면 합쳐야지요.”
그렇게 운을 뗀 국왕이 카엘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어떻게 찾아서 도움을 요청하면 좋겠소? 그 방법을 아니 말을 꺼낸 게 아니겠소?”
그 말에 모두가 옳다구나 싶어 카엘을 쳐다봤다.
용과 이야기할 정도니, 당연히 도채비와 연락한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았다.
적어도 믿는 구석이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거였다.
정작 카엘의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그건 고여 님께서 잘 아실 거 같은데요.”
“확실히 요괴니까 도채비에 대해… 앗, 죄송합니다!”
구망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사과하는데 고여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요괴인 건 사실인데요.”
“그보다, 어찌 방법이 있느냐?”
국왕이 고여에게 묻자 고여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 그럼 네가 좀 수고해 다오! 백성들과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국왕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고여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
“오, 그래. 부탁한다.”
국왕은 기뻐했지만, 카엘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도채비들이랑 사이가 나쁜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도채비들은 딱히 우두머리라는 게 없습니다만, 제일 목소리가 큰 도채비는 두억시니라 하옵니다.”
“두억시니. 그래. 그를 만나면 되겠구나. 그래서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가는 길이 항상 바뀌어 저도 모르니 도채비에게 물어야 합니다. 잠시만요.”
고여가 대신에게 말했다.
“여기에서 제일 오래된 싸리 빗자루 하나만 갖다 주십시오.”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잠시 후.
신하가 낡은 싸리 빗자루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네. 딱 좋습니다.”
싸리 빗자루를 살펴본 고여가 대답하고는 싸리 빗자루를 바닥에 툭툭 쳤다.
“도채비야, 나오너라.”
“…….”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국왕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도채비란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도채비라는 건 우리 근처에 늘 함께 있습니다. 주로 오래된 물건이 자연스레 도채비가 되거나. 아니면 도채비가 오래된 물건으로 변하거나 합니다만…….”
고여는 좀 더 세게 싸리 빗자루를 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 아닌 게 아닐까요?”
브로칸의 말에 라 키레아스가 나섰다.
“어디 줘 봐.”
“아, 네.”
“불태워도 안 나오는지 보자.”
“네?!”
자기도 모르게 싸리 빗자루를 넘겨줬던 고여가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숨어서 안 나온다고 해도 불태워 버리겠다니.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괜찮나?’
걱정됐지만, 그렇다고 드래곤이 한다는 데 말릴 수도 없었다.
‘카엘 님이라면 말릴 수 있겠지만…….’
막상 카엘도 조금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역시 말로만 저러니 정말 불태우진 않을 거라는 걸 아시나?’
“…….”
싸리 빗자루도 ‘허풍이지, 정말 불태우겠어?’
…라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꿈쩍 않았다.
그때 싸리 짓자루를 든 라 키레아스가 입김을 후 하고 부는 게 아닌가?
거기서 나온 화염이 싸리 빗자루를 덮쳤다.
화르르르.
펑!
새하얀 연기가 터져 나오더니, 평복을 입은 사내가 바닥에서 뒹굴었다.
“아뜨뜨뜨뜨뜨! 아이고. 도채비 타 죽는다!”
“헉!”
“이럴 수가.”
“정말 저 싸리비가 도채비였다니.”
그 광경을 보던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국왕 앞이라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내심 고여가 헛짓거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은 벌써 꺼졌으니까, 엄살떨지 말고 일어나.”
움찔.
“…….”
라 키레아스의 말에 사내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정말 불이 다 꺼진 걸 보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일어선 걸 보니 체격이 제법 건장한 게 힘 좀 쓸 것처럼 보였다.
“그대가 도채비인가?”
“그럼 넌 인간이냐?”
국왕의 물음에 도채비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대신들이 화를 냈다.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저런 무례한 놈을 봤나?”
“그만 진정하시죠. 사는 세계가 다른데, 어찌 인간의 법도를 알고 따르겠습니까?”
카엘이 제지하자 도채비가 눈에 이채를 띄며 카엘을 쳐다봤다.
“그래, 카엘의 말이 맞네.”
국왕도 카엘을 거들더니 도채비에게 먼저 통성명을 했다.
“반갑네. 나는 타모라국의 국왕인 유리 도라라고 하네.”
“흠. 나는 싸리비라고 해.”
도채비 싸리비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그런 싸리비에게 국왕이 말했다.
“이 땅이 솔국의 괴물, 괴인들에게 짓밟히고 있다. 두억시니를 만나 협력을 구하고 싶은데, 내 의중을 전해 줄 수 있겠느냐?”
“싫은데?”
그 말에 라 키레아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싫다니. 이거 태워 버리고 다른 녀석에게 물어보자.”
“힉!”
금방 불이 붙었던 걸 떠올렸던 싸리비는 순간 놀랐다가, 이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태울 테면 태워 봐. 누가 협박해도 싫은 건 싫은 거야.”
‘도채비들이 장난기도 많지만, 자존심이 세니, 맞서 싸우기보다는 웃어넘기거나 회유하는 게 좋다고 했지.’
카엘은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리며 말했다.
“뭔가 갖고 싶은 건 없나요? 저희 부탁을 들어주면 원하는 걸 드리죠.”
“어, 술?”
“여봐라. 어서 술을 꺼내 오거라!”
무심결에 대답한 싸리비는 국왕이 명령을 듣고는 손사래를 쳤다.
“근데 됐어. 어차피 여기 술은 원할 때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으니까. 한 번씩 다 맛보기도 했고.”
그 말에 궁내 물자를 책임지는 대신이 혀를 찼다.
“어떤지 술이 항상 모자란다 했더니…….”
카엘은 못 들은 척하며 싸리비에게 제안했다.
“그래도 서방에서 온 술은 못 마셔 봤을 테지요.”
“서방에서 온 술?!”
“네. 제가 직접 만든 술인데, 서방 최고의 술꾼이라 일컫는 드워프들도 취해 자빠지는 독한 술이랍니다.”
“호오. 정말이야?”
싸리비의 눈동자에 살짝 호승심이 어렸다.
‘완전히 넘어왔군.’
카엘은 쐐기를 박기 위해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 작은 유리잔에 따라서 내밀었다.
“자, 한번 맛보시죠.”
“이런 쬐끄만 잔으로 마시면 간에 기별도 안 가겠네. 쪼잔하게시리.”
“싫으면 말고요.”
“아, 아니. 마실 거야.”
카엘이 술잔을 돌려받으려 하자 싸리비가 황급히 뒤로 손을 뺐다.
술병 안의 술을 보자마자 싸리비는 깨달은 거였다.
수백 년을 살아도 한 번 맛볼까 말까 하는 술을 마실 기회라는 걸.
날름 술잔을 비운 싸리비가 인상을 썼다.
“크으으! 독하긴 독하네.”
“어떻습니까?”
“맛이 참 오묘하구먼. 이거 한 잔만으로는 맛을 잘 모르겠는데, 한 잔만 더 줘.”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더 마시려는 속셈이잖아요.”
“들켰나?”
“마셨으니 안내나 해 주세요.”
“알았어. 해 주면 될 거 아니야. 하지만, 입구까지밖에 못 데려다준다.”
그 말에 카엘이 고여를 돌아봤다.
“입구만 통과하면 찾기 어렵진 않습니다.”
고여가 그렇게 말하는데, 싸리비가 고여를 가리켰다.
“참, 너는 따라오면 안 돼.”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카엘의 울음에 싸리비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쟤가 두억시니의 만년설삼을 훔쳤거든.”
“아.”
국왕이 아플 때 가져다줬다는 만년설삼을 어디서 구해 왔나 싶었더니 도채비, 그것도 두억시니의 것을 훔친 모양이었다.
‘이러니 도채비의 힘을 빌리자고 할 때 주저했지.’
“…저는 남아 있겠습니다. 괜히 방해되면 안 되니까요.”
그때 카엘이 물었다.
“정말 만년설삼을 훔쳤습니까?”
“…네.”
“그렇다면 더더욱 함께 가셔야죠.”
“……?”
“가서 제대로 용서를 비는 게 어떻겠습니까?”
카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고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빌어도 용서를 할지…….”
“그건 가서 이야기해 봐야 알죠. 저를 믿고 함께 가시죠.”
카엘이 싸리비를 돌아봤다.
“용서를 구하러 가는데도 따라가면 안 됩니까?”
“어?”
싸리비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는지 얼빠진 얼굴이 됐다.
“훔치려고 오는 걸 막으라고 했지. 사과하러 오는 것까지 막으라고 하진 않았을 텐데요.”
“그건 그래.”
“그럼, 함께 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카엘은 국왕에게 말했다.
“전하, 그럼. 제가 가서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오! 정말 그래 주겠는가?”
안 그래도 국왕도 카엘이 도채비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걸 보고 부탁할까 싶었던 참이었다.
카엘도 애당초 국왕이 가는 건 무리라는 걸 잘 알았다.
‘그렇다고 달리 갈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카엘이 두억시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과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어쩌면 이야기가 잘 통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자신한 카엘이 말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 * *
앞장서서 궁궐 뒤편으로 나온 싸리비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험한 산길을 성큼성큼 가볍게 뛰는데, 보기보다 훨씬 빨리 움직였다.
카엘 일행이 달리다시피 해서 쫓아가야 할 정도였다.
그때, 라 키레아스가 말했다.
“음. 뭔가 수상한 기운이 도는군.”
-그래, 조심해야겠어.
라 키레아스의 말에 아조트까지 경고를 보냈다.
그러고 얼마를 더 들어갔을까.
웬 수염이 덥수룩한 장정이 길목을 막고 있는 게 아닌가?
브로칸이 코를 킁킁대더니 말했다.
“저 인간도 도채비 같군요.”
“이제 구분이 되나?”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카엘과 브로칸이 이야기 나누는 사이, 가까이 다가간 싸리비가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했다.
“어이, 김 서방! 나 왔네. 오래간만이야!”
“흥. 뭘 그리 줄줄 매달고 온 건가.”
“이게 다 사정이 있지.”
싸리비의 대꾸를 받은 김 서방이 카엘 일행을 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쨌든 여기를 지나가려면 나와 씨름해서 이겨야 한다!”
“씨름?”
“서로 맞붙어서 하는 이 나라 특유의 겨루기야.”
“헤에.”
설명해 주는데 싸리비가 말했다.
“내가 안내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카엘은 인사를 받고도 가만히 있는 싸리비를 넌지시 바라봤다.
답답했던 싸리비가 먼저 말했다.
“술은?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아, 그렇죠.”
카엘은 가방에서 술병을 꺼냈다.
“다 데려다주지도 않고 월급을 달라고 하시다니 정말 뻔뻔하시네요.”
“히히히.”
카엘이 비아냥거리며 술잔을 채우는데, 싸리비는 마냥 좋은 듯 헤실거렸다.
김 서방은 거기에 호기심을 느끼는지 물었다.
“뭐 마시나?”
“이자가 만들었다는 서방의 술이야. 어찌나 맛이 깊고 색다른지 허허,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군.”
“맛을 모르겠다고, 한 잔 더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자네 말대로, 한 잔 더 얻어먹으려고 한 소리거든.”
밉상처럼 구는데 화난다기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그때 김 서방이 이쪽을 뚫어져라 보는 걸 눈치챈 카엘이 말했다.
“김 서방 님도 한잔하시렵니까?”
“좋다!”
“그럼 들여보내 주시나요?”
“아, 안 된다! 나와 씨름을 해서 이겨야만 지나갈 수 있다!”
“하는 수 없죠.”
은근슬쩍 지나가려던 카엘은 혀를 찼다.
그걸 본 고여가 깜짝 놀랐다.
“도채비랑 정말 씨름하시게요?”
“네. 안 되나요?”
“그게 도채비와 씨름하면 힘으로는 절대로 못 이긴다는데요.”
“어허. 구미호여, 겨루기 하는데 훈수 두지 말거라!”
김 서방의 경고에 카엘이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다가가 김 서방 허리춤의 샅바를 잡았다.
“이걸 잡으면 되죠.”
“어, 그래.”
예전에 네먼 교관이 카엘에게 검술을 가르칠 때도 힘만으로 안 된다고 했었다.
하지만 기술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힘으로 깨부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퍼억!
카엘이 힘을 주자마자 땅에 처박힌 김 서방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 됐다.
‘어? 어? 잠깐, 지금 내가 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