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도채비 전설 (1)
괴물과 괴인들의 총공격이 시작됐다는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궁궐이 이 난리가 됐는데, 적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다니.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보고를 받은 국왕도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옥조는 그런 국왕 옆에서 뭐라고 끊임없이 주절대고 있었다.
그런 국왕에게 카엘이 말했다.
“난관에 봉착했다고 하여 국왕의 도리를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정신 차린 뒤, 자신의 체면을 모두 집어던져서까지 영노에게 도와 달라고 한 걸 방금 봐서 한 조언이었다.
“아!”
그러자 국왕은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을 번쩍 뜨더니 똑바로 서서 외쳤다.
“군사 회의를 열겠다! 지도를 들고 오고, 사대장군과 대신들, 여기 서방의 손님들을 빼고는 모두 나가거라!”
“…….”
난데없는 소리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국왕이 다시 소리쳤다.
“다들 내 명을 못 들었느냐? 아니면 이제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은 게야?”
“아닙니다, 전하!”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신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리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옥조가 여전히 옆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국왕이 말했다.
“옥조, 그대도 처소로 가 있게.”
“아닙니다. 옆에서 미력하나마 보탬이 되겠습니다. 제가 전하의 힘이 되어 드리지 않으면 누가 힘이 되겠습니까?”
간드러진 목소리로 은근슬쩍 몸을 비비며 말했지만 국왕은 그런 옥조를 밀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려 하니 일단 물러가 있으시오!”
“하지만 전하…….”
“아니면 이대로 내쫓기고 싶소?”
그 말에 옥조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게다가 국왕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간 그대의 교언영색에 그릇된 지시를 많이 내렸소. 이 난리가 끝나면 나는 물론 그대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저, 전하.”
“뭣들 하느냐? 어서 데려가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옥조가 국왕에게 매달렸지만. 국왕은 단호하게 지시했다.
그런 와중에 국왕은 고여가 나가려는 걸 보고 말했다.
“고여, 너는 남거라.”
“……?!”
고여는 국왕이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혹시 카엘 님의 일행으로 보고 남으라는 걸까?’
고여의 짐작과 달리 국왕은 연민 어린 눈빛으로 고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저, 전하……?”
“허, 이제 아바마마로 부르지도 않는 거냐.”
국왕이 웃으며 말했지만 고여는 감히 아바마마로 부를 수 없었다.
이런 몰골로 어떻게 부른단 말인가.
그 마음을 짐작한 국왕이 말을 이어 갔다.
“무슨 사연으로든 너를 키운 지 이미 십수 년이 지났다. 생각해 보면 그간 요상한 일이 많았거늘. 다 네 짓이었겠구나.”
“…….”
“아파기를 물고 가려던 매가 갑자기 날개가 부러져 추락한 적도 있었고, 벼락에 건물이 무너질 때도 아파기만은 무사한 적도 있었다.”
“……!”
“그때는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고 기뻐했으나, 네가 힘을 쓴 거였어.”
“…마, 맞습니다.”
“거기다가 내가 아파 드러누웠을 때 머리맡에 그 귀하다는 만년설삼이 놓여 있기도 했지.”
그때 일을 떠올리던 고여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나가 죽을 고생을 하며 구해 온 거였다.
“중전이 죽었을 때는 네가 어찌 서럽게 울던지. 그러고 삼년상을 치렀으니 네가 탈이 날까 걱정했을 정도였다. 네 친어미도 아닌데 어찌 그리 울었느냐!”
그 물음에 고여의 두 눈에 눈물이 샘솟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를 떠올리니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먹먹해지는 한편, 슬픔이 소용돌이쳤기 때문이다.
그때도 만년설삼을 구해다 어머니를 고쳐 드리고 싶었지만 두 번은 불가능해 더는 손쓸 수가 없었다.
고여는 엎드렸다.
하나는 이제까지 정체를 속인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다른 하나는 요괴 주제에 슬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간 먹이를 챙겨 주던 유모가 벌을 받을까 봐 죽은 아이인 척했다고 했으나, 너무 오랫동안 속였습니다.”
사실이었다.
늙은 유모는 그 뒤로 나이도 많고 힘이 든다며 더는 일하기 어렵겠다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1년 동안 편하게 지내다 죽었으니, 그때 밝히거나 몰래 떠나 버려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아비, 어미를 모르고 산속을 떠돌던 이 여우가 그만 인간의 따뜻한 정을 느끼고는 뻔뻔하게도 안주해 버렸습니다.”
“그 말인즉, 나를 진심으로 부모로 여겼다고 봐도 되겠느냐.”
그 말에 고여가 이마를 바닥에 찍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라도 진짜 고여가 아닌 걸, 여우로 태어난 걸 후회 안 한 적이 없습니다! 제 말이 거짓이라면 제가 이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국왕은 그런 고여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그렇다면 너는 내 딸이다.”
“……?!”
그 말에 고여는 물론 듣고 있던 모두가 놀랐다.
카엘도 고여가 구미호 요괴라는 게 밝혀졌지만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지금 나무라거나 내치진 않을 거라 짐작했지만.
그걸 다 알고도 자식으로 삼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낳진 않았지만 마음으로 기르고, 너도 진심으로 부모로 나를 모시고 효도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를 다했는데 그걸 부모 자식이 아니라 남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느냐! 누구도 더는 토를 달지 말라!”
국왕의 선언에 사대장군과 대신들 모두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주위를 둘러보던 국왕은 고여에게 물었다.
“맞다, 고여야. 네가 모셔온 분들에 대해 알려 주겠느냐.”
“아, 네!”
고여는 대답하고는 잠깐 고민하더니 술술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분은 서방의 사대장군에 해당하는 소드 마스터 브리운 가문의 막내아들인 카엘 브리운 님입니다. 갖은 서방의 괴물을 해치워 대륙에 이름을 떨치고 계신 영웅이십니다!”
“과연. 용과 인연을 맺고, 사악한 구미호를 퇴치할 정도면 보통 인물이 아니겠구나, 하고 짐작만 했지.”
고개를 끄덕인 국왕이 카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금방 고언해 준 건 정말 고마웠소. 자칫 또 스스로를 또 진창에 던져둘 뻔했구려.”
“전하께서 스스로 깨칠 수 있는 지혜를 가지셨으니 가능한 일이었지요.”
카엘의 겸손한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국왕의 시선이 거칠게 삐친 붉은 머리의 여인에게 향하자 고여가 눈치껏 소개했다.
“이분은 서방의 용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인 라 키레아스 님입니다.”
“서방의 용?!”
“왜? 못 믿겠으면 한번 보여 줄까?”
“아닙니다. 믿겠습니다.”
국왕은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이미 용까지 본 마당에 못 믿을 게 무어가 있으랴.
“이분께서 용님을 안 막아 주셨으면 궁궐이 떠내려갔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래? 감사합니다, 드래곤님.”
그 광경을 보며 카엘은 쓴웃음이 나왔다.
라 키레아스가 용을 온전히 막아 냈으면 모를까, 화내면서 같이 궁궐을 부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대로 라 키레아스 없이 영노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게 피해는 적었을지도 몰랐다.
“이쪽은…….”
고여가 설명하는 걸, 소피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카엘 님의 시녀입니다.”
하지만 사대장군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무공이 저희보다 더 고강한 여인이옵니다.”
“그런가. 허, 여자의 몸으로 정말 대단하군.”
“이쪽은 늑대 인간인 브로칸, 숲의 요정이라 불리는 엘프 종족인 모르타입니다.”
“다들 반갑소! 추태를 부린 것과 현재 상황이 급박해 대접에 소홀한 걸 용서하기 바라오!”
카엘이 대표로 화답하면서 한마디 보탰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만 도성 내 백성들을 돌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말에 국왕이 물었다.
“궁궐 밖에도 피해가 큰가?”
“네, 정확한 피해는 알 수 없으나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그렇군.”
신하의 대답에 국왕이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궁궐을 복구하는 건 미루고, 궁 안의 물자를 풀어 백성을 구휼하라! 심각한 이들을 궁 안으로 들여 어의가 치료하도록 하라!”
사대장군들은 그런 국왕의 모습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봤다.
국왕이 한창 총기 넘치던 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 차렸다고 해서 모든 걸 손바닥 뒤집듯 쉽게 되돌린 순 없었다.
신하가 난처한 얼굴로 고했다.
“하나 전하, 지금 궁내에 어의가 없사옵니다.”
“없다고? 아차.”
국왕은 그제야 옥조의 바람대로 궁 안의 어의를 모두 내쫓으라고 한 걸 기억했다.
“그럼 지금 부상자는 누가 돌보고 있는가?”
“부대 내 의무 담당이 보고 있습니다.”
“어허, 이를 어쩐다.”
그렇다고 전국이 난리인데 당장 어의를 들이기도 어려웠다.
국왕이 난처해하는 걸 보고 카엘이 한마디 했다.
“도성 내 의원을 모두 궁 안으로 불러들이시죠.”
“궁 안으로?”
“네, 모든 약재를 모아 한꺼번에 관리하고, 병의 경중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 치료케 하면 효율적일 겁니다.”
이른바 종합 병원을 차리라는 거였다.
국왕은 무릎을 탁! 치며 기뻐했다.
“좋은 의견이요! 카엘, 그대 덕분에 살았소!”
그때 대신들은 조심스레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아무리 국왕의 명이라고 해도 쉽게 따를지 의문입니다.”
“워낙에 타인과 함께 일을 하는 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궁에 온다 하여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확실히 약제를 숨기고 진심으로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인 계획이었다.
의원들은 조제법을 숨기고 타인과 공유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만의 비법이라고 여겨서였다.
하지만 그것에도 해결 방법이 있었다.
“서방의 약제사가 조제법을 몇 가지 알려 준다고 조건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올 겁니다.”
“서방의 약제사?! 약제사도 함께 왔단 말이냐.”
놀라는 국왕에게 카엘이 대답했다.
“제가 바로 그 약제사입니다.”
“설마 제가 마신 그 신비한 물약을 만든 게 카엘 님이란 말입니까?”
욕수가 놀라서 묻자 카엘이 멋쩍어하며 대꾸했다.
“네, 마음 같아서는 다 나눠 드리고 싶지만 아무 곳에서나 만들기 어려워서요.”
“아니,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그걸 어찌 달라고 합니까. 그냥 놀라서 하는 소립니다.”
“…정말 대단하군.”
구망과 현명도 감탄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국왕이 명령을 내렸다.
“어쨌든 카엘 님의 의견대로 도성 내 의원들에게 약제를 들고 모이라 전하라. 조제법 외에도 이번에 협조하는 것에 따라 관직을 원하면 관직을, 금을 원하면 금을 준다고 하라.”
“알겠습니다!”
국왕의 명을 받은 신하들이 뛰쳐나갔다.
한숨 돌리기에는 제일 중차대한 문제가 남았다.
사방에서 공격해 온다는 괴물과 괴인들을 막아야 하는 거였다.
문제는 무관들이 많이 다친 데다가 사대장군 중 남쪽을 맡은 축융이 죽고.
심지어 타모라국의 최고수이자 국왕의 호위를 맡은 황룡마저 죽은 상황이라는 거였다.
지도를 놓고 보고를 들은 국왕이 말했다.
“일단 사대장군들은 각각 원래 맡은 방위로 가서 싸워 주시오.”
“축융이 담당하던 남쪽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보다 전하의 호위부터 뽑아야 하는 게 아닌가? 차라리 우리 셋 중 하나가 호위를 맡고 남북으로 전력을 나누는 게…….”
“…일리가 있어.”
세 사대장군들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짐은 괜찮다! 백성이 죽고 우리 땅이 짓밟히는데 짐의 안위가 무슨 소용이겠느냐. 짐이 직접 남쪽으로 가겠다!”
국왕은 그러면서 슬쩍 카엘을 쳐다봤다.
카엘은 그걸 보며 내심 감탄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계획이군.’
국왕이 직접 나서면 이 난리를 겪은 중앙을 지키느라 애쓸 필요 없고, 적들도 남쪽으로 병력이 쏠리면 오히려 도성이 안전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적들이 국왕을 중점적으로 노린다고 해도 카엘이 함께 다니면 안전하다는 계산까지 내린 모양이다.
‘그런 의미로 나를 쳐다봤겠지.’
문제는 카엘의 협조해 줄 걸 전제한 계획이라는 거였다.
어차피 최대한 마기를 줄이는 게 목적이니만큼 그 정도는 도와줄 용의가 있기도 했다.
그래도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긴 했다.
욕수가 그걸 지적했다.
“하나, 전하. 적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저희 병력을 생각하면 적들과 맞붙는 건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요지를 지키라는 명령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부분이 있어서 따랐던 거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
현명까지 순순히 납득하자 국왕은 정말 심상치 않다고 여기며 되물었다.
“그 정도로 적이 많단 말이냐. 온 나라의 군인이 모두 일어서도 맞서기 힘들 정도로?”
“그렇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요괴뿐만이 아니라 솔국의 병사들도 상륙했다니, 더욱 힘든 상황이 될 겁니다.”
“…상륙을 막지 않은 탓이지요.”
“그렇군. 다 짐이 부덕한 탓이로다.”
국왕은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새로운 중전에 빠져 그 치마폭에서 허우적대느라 외적의 침입에 소홀히 대처한 게 떠올라 자괴감을 느낀 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국왕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짐은 포기하지 않고 이 산천의 요괴들을 몰아내는 데 목숨을 걸겠소. 그것만이 선조들과 백성들에게 조금이나마 죗값을 치르는 거겠지.”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고여도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에 맞춰 욕수, 구망, 현명도 국왕의 뒤를 따르겠다고 소리를 높였다.
“음, 인간들의 이런 모습은 언제 봐도 재밌단 말이야.”
라 키레아스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때 브로칸이 넌지시 물었다.
“카엘 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무리 마족을 막기 위해서 왔다지만 냉정하게 따졌을 때 남의 나라 일에 목숨을 걸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서 물은 거였다.
카엘도 동감이었다.
“일단, 상황을 보자.”
드래곤도 있는 데다 급하면 영노도 부를 수 있겠다, 정말 다급하면 방주를 불러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카엘에게는 부족한 병력을 만회할 만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카엘이 넌지시 말했다.
“타모라국에는 이이제이라는 말이 있다죠.”
다들 카엘이 뭐라고 말하자 귀를 기울였다.
카엘의 위상도 높기도 했지만 그간 낸 의견들도 하나같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말이 있지. 근데 그 말은 왜 꺼낸 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국왕에게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타모라국의 요괴들인 도채비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