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누가 여우지? (8)
카엘이 다가갔을 때도 영노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라 키레아스가 옆으로 날아와서 관심을 보였다.
“이 여의주를 어떻게 하면 깨어나는데?”
“가지고 있기만 해도 괜찮아질 겁니다.”
카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영노의 손에 여의주를 쥐여 줬다.
팟.
여의주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영노를 휘감았다.
그러기를 잠시.
영노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벌떡 들어 일어났다.
그걸 본 라 키레아스가 감탄했다.
“오, 정말 바로 일어나네. 저것도 마석처럼 힘이 담겨 있는 건가.”
정작 영노는 분노한 얼굴로 카엘에게 따졌다.
“왜 셋, 둘까지만 세고 바로 뽑은 거야? 마음의 준비를 못 했잖아!”
“마음의 준비 한답시고 움츠러들면 아픈데요? 보세요. 지금은 멀쩡하죠.”
“어, 그러고 보니…….”
그 말에 영노는 역린이 있던 자신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만졌다.
“음? 역린이 여기 있었던 거 같은데, 아니면 여긴가. 원래 있던 자리도 못 찾을 만큼 완벽하게 나았나 봐.”
“여의주도 되찾아서 돌려드렸습니다.”
“앗! 정말이잖아! 고마워.”
영노는 그제야 자신의 손에 여의주가 들린 걸 깨닫고 기뻐했다.
“그러니 이제 좀 아이 모습으로 변해 주실 수는 없나요? 덕분에 궁궐이 다 파괴되었네요.”
“아, 그런가? 헤헷.”
주위를 둘러본 영노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카엘과 주변을 몇 번이고 번갈아 쳐다보더니 겨우 깨달은 듯 소리쳤다.
“뭐야? 너 언제 그렇게 커졌어?! 원래 거인이었어?”
“커지는 약을 먹어서 그렇습니다. 저 친구도요.”
“어? 정말 그러네.”
영노는 뒤늦게 브로칸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쨌든 여의주도 되찾고, 역린도 고쳤겠다, 여기 남을 이유는 없지. 그냥 이대로 갈게.”
그걸 보며 주위에 있던 모두가 안도했다.
벼락과 폭우를 뿌리며 난리 쳤던 용이 떠나가는 거였다.
하늘 위로 솟구치려던 영노는 문득 생각났는지 카엘을 돌아봤다.
“맞다. 피리 줘 봐.”
‘더 못 부르게 대나무 피리를 회수해 가려나?’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긴 했다.
거대화한 카엘이 직접 꺼낼 순 없어 소피아에게 부탁했다.
“대나무 피리 좀 꺼내 줘.”
“네.”
소피아는 카엘의 가방이 어디 있는지 진작에 봐 뒀는지 곧바로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대나무 피리를 꺼내 왔다.
그걸 앞으로 내밀자 대나무 피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여러모로 도움받았으니까.”
영노의 말과 동시에 대나무 피리가 번쩍이더니 옥피리로 변했다.
“앞으로 그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부르면 와서 도와주겠노라!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영노는 그 말을 남기고는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만파식적은 내려왔다.
그걸 소피아가 잘 챙겨서 가방에 넣어 뒀다.
‘이제 일단락된 건… 아니군.’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었다.
“나 혼자 이러고 있으려니 뻘쭘하군.”
라 키레아스도 인간으로 폴리모프 했다.
잠시 후.
카엘과 브로칸도 본래 크기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근처에 다가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겁을 집어먹은 거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지.’
그나마 자기네들끼리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사대장군들이 복잡한 얼굴로 다가와 인사했다.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대가 장담한 대로 용이 정말 애원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네. 정말 대단하네. 어쨌든 덕분에 살았소.”
“…고맙소.”
다들 고맙다고는 했지만 지금 궁궐 꼴을 보면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자신들과 막상막하 실력의 부하를 가진 데다가.
용이 고맙다고 부르면 와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똑똑히 들었다.
무엇보다 저 서방의 용인 드래곤이 또 날뛰기라도 하면 그날로 왕실이 끝장날 상황이었다.
카엘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사대장군들에게 제안했다.
“그보다 국왕님은 어떻습니까? 아직 쓰러져 계시면 치료하는 게 나아 보입니다만.”
사대장군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안 그래도 회복 포션의 효과를 본 터라 마시게 하면 어떨까 이야기했던 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이쪽으로 오시죠.”
욕수가 앞장서서 안내했다.
쓰러진 국왕은 난리를 피하고자 궁궐 끝 건물로 옮겨진 채였다.
거기로 욕수가 다가가자 무관들은 망설이면서도 앞을 막아서며 제지했다.
“욕수 님, 멈추시오!”
“이것들이 지금 누구한테…….”
“괜찮아.”
구망이 화내려는 걸 제지한 욕수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전하를 치료할 약을 가지고 왔다. 나와 다른 사대장군들도 효과를 본 약이니 어서 받아 가서 치료해 드려라.”
그때 쓰러진 국왕 옆에 있던 옥조가 길길이 화를 냈다.
“치료는 무슨. 저 인간이 저 구미호와 한편이 되어 싸우는 걸 봤다. 어서 저 죄인을 포박해 처형하라! 안 그렇습니까?”
“오, 옥조 님의 말씀이 맞소. 치료약이 아니라 독약이니 마시게 하면 절대 안 되오!”
함께 있던 황금색 옷을 입은 도사도 거들었다.
국왕이 의식이 없으니 중전이 상전이 된 것처럼 나대는 거였다.
그 말을 들은 신하들과 무관들은 난감했다.
‘사대장군을 포박해 처형하라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장군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막을 도리가 없는데.’
‘장군님이 화내시면 안 될 텐데. 그나마 온화한 욕수 님이라 다행이야.’
솔직한 말로 사대장군 셋 중 하나만 해도 여기 모두를 도륙 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거기다가 고여 공주와 함께 나타난 서방인들은 또 어찌나 강한지.
욕수 장군이 순순히 멈춰 준 것만 해도 정말 고마운 일로.
여전히 왕실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고 믿어도 될 일이었다.
그 상황이 답답한지 현명이 나섰다.
“내가 가서 치료하겠다. 약을 내게 다오.”
카엘이 회복 포션을 주자 현명은 그걸 받아 그대로 국왕에게 다가갔다.
“막을 테면 막아 봐라.”
평소 더 막무가내인 현명 장군이 저러고 나오자 앞을 막고 있던 무관들도 비킬 수밖에 없었다.
“다들 뭣들 하느냐? 어서 막지 않고?!”
옥조가 더욱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지만 다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사님이라도 막아요.”
“어, 어.”
보다 못한 옥조가 도사를 떠밀었지만. 현명이 손을 내젓는 것만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이쿠.”
“보세요. 지금 도사님을 공격했는데도 가만히 있는 건가요?”
“…….”
어차피 궁내의 모두가 도사를 매우 싫어했던 터라 더욱 반응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국왕에게 도착한 현명은 회복 포션을 마시게 했다.
“으음.”
놀랍게도 국왕이 바로 눈을 떴다.
다들 감탄하고 안도하는 사이, 옥조가 곧바로 국왕의 곁에 붙었다.
“어머,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신첩, 국왕께서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옵니다!”
“옥조여, 이제 괜찮다. 왠지 모르지만 머리도 한결 개운하구나.”
국왕은 옥조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더니 주위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내가 왜 혼절했지?”
‘아, 그러고 보니 기절한 지 한참 됐구나.’
그사이 용과 드래곤이 나타나서 궁궐이 부서지고, 구미호 백면금모까지 나타나서 그간의 음모가 드러났다.
…라고 요약해 봐야 국왕이 이해할 거 같진 않았다.
심지어 현명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게… 구미호 때문입니다.”
‘너무 축약했잖아!’
“구미호?!”
그 말에 국왕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고여에게 향했다.
고여는 여우 인간의 모습으로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걸 본 옥조가 좋은 기회다 싶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요! 어서 저 여우를 잡아서 처형시키세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 그대는 조용히 좀 하시오!”
“어.”
평소처럼 국왕에게 요구하던 옥조는 국왕이 단호하게 막자 당황했다.
그사이 욕수가 다가가 설명했다.
“저 구미호 말고, 타마모라는 구미호의 꼬리를 먹고 조종을 받고 계셨습니다.”
“요괴를 퇴치하는 연기를 피우자 그걸 토하시면서 기절하셨고요. 타마모라는 구미호를 내쫓고, 여기 이 서방인이 준 약을 드시자 깨어나셨습니다.”
“음, 그랬나?”
국왕의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에 다른 무관들도 거들었다.
“전하, 사대장군들의 말이 맞사옵니다!”
“그 후 용이 나타나고, 다른 괴수가 나타나서 싸우고 있는데, 그 용이 쓰러진 뒤, 다른 구미호가 나타났습니다.”
“그 구미호가 자신의 계략을 모두 밝혔습니다.”
정작 그 말에 국왕이 놀란 건 따로 있었다.
“용이 나타났다고?! 정말이냐?”
“못 믿으시면 제가 한번 불러 볼까요?”
카엘의 말에 다른 사대장군들을 비롯해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목격한 궁궐의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그 난리를 치르고도 용을 부를 생각을 한단 말인가.
“괜찮습니다. 이 나라 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카엘은 그렇게 대꾸하며 만파식적을 불었다.
그러자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어두워지더니 영노가 나타났다.
“음? 무슨 일이냐? 또 여기에 뭔가 나타났나?”
“아뇨, 국왕이 일어났는데 여기에 용이 나타났다는 게 도저히 안 믿기시는 듯해서 말이죠.”
“흥! 그런 일로 이 몸을 부르다니.”
영노는 콧방귀를 끼며 투덜대더니 국왕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이 몸을 봤으니 이제 믿겠는가?”
“네, 네. 믿습니다, 용님.”
그러자 영노가 카엘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됐지? 안 그래도 지금 피곤하니 다음에는 좀 더 중요한 일에 부르도록.”
그러면서 영노가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용, 용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뜬금없이 국왕이 소리치며 앞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다들 놀라는 와중에 국왕은 심지어 용 앞에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용님! 소인이 부덕하여 전국각지에 괴물과 괴인이 들끓어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하옵니다! 제발 굽어살피셔서 괴물과 괴인이 이 산천을 더럽히는 걸 막아 주십시오!”
그걸 본 모든 이가 깜짝 놀랐다.
한 나라의 왕이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도와 달라고 한 거였다.
그야말로 지극히 백성을 위하는 모습.
심지어 영노도 살짝 감탄한 듯 눈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러고 돕기에는 그동안 당한 게 많았다.
“흥! 황룡이라는 네 부하가 내 역린을 건드리고 여의주를 훔쳤다. 그러고도 뻔뻔하게 내 도움을 바라느냐!”
“화, 황룡이?!”
국왕은 정말 깜짝 놀랐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국왕이 절망하고 있을 때 잠자코 있던 고여가 외쳤다.
“영노 님! 황룡은 구미호 백면금모의 말을 듣고 한 짓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지시를 내린 게 아닙니다.”
“닥쳐라!”
영노가 화를 내자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평범한 이들은 그대로 쓰러졌고, 그 노여움의 대상이었던 고여는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덜덜 떨었다.
드래곤 피어와 비슷한 능력을 발휘한 거였다.
영노는 매서운 눈빛으로 고여를 노려봤다.
“내가 그걸 모르고 질책한다고 여기느냐?”
“…죄송합니다.”
“내 그 일을 생각하면 여길 다 부수고 산산조각 내도 분이 풀리지 않겠다만, 여기 서방인이 역린을 고쳐 주고 여의주를 되찾아 줬길래 참았다.”
그렇게 말한 영노는 문득 생각난 듯 카엘에게 물었다.
“어, 잠깐. 생각해 보니 내가 분노하며 이곳을 부수는 걸 막길래 참았다만, 너도 딱히 참으라고 한 적은 없지. 여길 부숴도 되나? 너랑도 상관없지 않으냐?”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카엘에게 쏠렸다.
카엘의 말 한마디에 이곳의 운명이 결정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굳이 애를 써서 부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고여 님이 슬퍼하실 테고요.”
“음, 역시 그렇지? 그럼 정말 돌아간다.”
카엘의 대답에 영노는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솟구쳐 사라졌다.
카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영노 님도 괜한 짓을…….’
방금 영노는 카엘의 영향력을 크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사라진 거였다.
덕분에 안 그래도 특별했던 주위에서 카엘을 보는 눈빛이 더욱 달라졌다.
용이 의사를 묻고 용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다니.
경계를 넘어서 경외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때 소피아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저 옥조라는 분은 뭘까요? 요괴도 아니면서 참으로 요사스럽게 구는데.”
“저런 이야말로 인간의 탈을 쓴 여우지.”
카엘이 그리 대꾸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전령이 달려와서 흉보를 알렸다.
“저, 전하! 괴물과 괴인들의 총공격이 시작됐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어디서 총공격이 시작됐느냐.”
욕수의 물음에 전령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사방에서 동시에 시작됐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