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누가 여우지? (5)
흔히 드래곤을 살아 있는 재난이라고 부르곤 한다.
드래곤이 작정하고 부수기로 마음먹는다고 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도 막지 못해서 나온 말이다.
이건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아인종도 마찬가지.
그 때문에 엘프들이 자신들의 목숨과도 같은 세계수를 드래곤에게 잃고도.
드워프들이 드래곤에게 붙잡혀 둥지에서 일하고도 항의하지 않았다.
딱히 원한을 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에 저항하려는 카엘을 이상하게 볼 정도였다.
태풍이 몰아치고 지진이 일어났다고 태풍과 지진에 원한을 품지 않는 거랑 같다나.
그리고.
대륙에 드래곤이 있다면 타모라국에는 용이 있었는데, 지금 벌어진 난리를 보면 살아 있는 재난이라는 말에 딱 맞아떨어졌다.
궁궐에 나타났던 용 영노는 자신을 공격하고 여의주를 훔쳐 간 인간을 발견했다.
당연히 황룡은 영노를 피해 달아났고, 분노가 머리 뿔까지 치달은 영노는 황룡을 쫓아가며 온갖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폭풍우가 몰아치고, 벼락이 떨어졌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번쩍! 콰르르릉!
대부분이 천둥과 번개를 피해 건물로 들어갔지만, 무술에 자신 있는 군졸과 무관들은 여전히 카엘 일행을 포위하고 있었다.
정작 당황한 건 카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모르타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영노 님을 저대로 내버려 두면 큰일 나겠어요!”
벼락도 벼락이지만,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이대로라면 궁궐은 물론, 도성도 무너지고 그 안에 사는 많은 사람이 여기에 휩쓸려 죽거나 다칠 게 분명했다.
“근데 어떻게 막죠?”
“나한테 맡겨 둬. 기왕 이렇게 됐으니 나도 본모습을 드러내도 되겠지.”
브로칸의 물음에 대꾸한 라 키레아스는 서서히 드래곤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먼저 머리에 뿔이 돋았다.
양손이 커지면서 발톱이 날카롭게 변하며 비늘이 생겨났다.
엉덩이에도 꼬리가 튀어나왔다.
천천히 드래곤의 모습이 되던 라 키레아스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무관들은 깜짝 놀라며 소란스러웠다.
“아이고, 저건 또 뭐야.”
“괴물이다, 거대 괴물이 둘이나…….”
“용만으로도 난리 났는데 끝장이다!”
한편 어느새 용인 영노보다 훨씬 커진 라 키레아스는 궁궐 내 건물들을 깔아뭉갤 판이었다.
“라 키레아스 님, 조심해 주세요!”
“어, 걱정하지 마.”
카엘의 외침에 라 키레아스는 날아오르더니 영노에게 다가갔다.
“어이 잠깐,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 여의주 가져간 녀석 어디에 숨었어? 안 나와?!”
콰르릉!
“윽!”
하필 이번에 날린 벼락이 라 키레아스의 뿔에 직격했다.
순간 감전되어 충격받은 라 키레아스가 영노를 후려쳤다.
퍼억!
“아 씨, 진정 좀 하라니까!”
“이게? 왜 때려?”
강한 충격에 크게 휘청인 영노는 진정하기는커녕 라 키레아스를 공격했다.
기다란 몸통으로 라 키레아스를 휘감더니 목덜미를 문 거였다.
덥석!
“악! 지금 날 문 거야? 이것이?”
물론 라 키레아스도 그냥 참고 넘어갈 성격이 아니었다.
두꺼운 꼬리로 후려치며 몸통을 잡아 뜯으려 했다.
용과 드래곤.
두 거대 괴수의 육박전이 허공에서 펼쳐지기 시작한 거였다.
‘장관이긴 하네.’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심각했다.
두 거대 괴수의 전투에 이미 궁궐 곳곳이 부서진 데다가, 계속해서 내리는 비 때문에 물난리가 날 판이었기 때문이다.
궁궐답게 배수로가 잘되어 있어 당분간은 버티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궁궐이 떠내려갈 게 빤히 보였다.
이미 궁궐 밖은 난장판인 듯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갑자기 벌어진 이상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했다.
그걸 들은 카엘은 가슴이 아프면서, 왠지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몬스터를 막는 장벽이 무너지고, 클리페우스성이 불타는 그 끔찍한 기억.
오크 군단이 홍수처럼 흘러나와 사람들을 해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절규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카엘은 그 난리 속에서 도망친 후,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몬스터와 싸웠지만.
결국, 오크 로드의 창에 맞아 살해당했다.
회귀한 지금 몬스터 대침공을 막아 냈지만, 눈앞의 상황을 보니 남 일 같지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카엘은 자신의 품속의 포션병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원래 드래곤 라 키레아스와 싸우기 위해 만든 비장의 약.
이걸 먹으면 라 키레아스와 함께 영노를 제압할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다.
아니, 둘이 싸우다 지치기라도 하면 둘 다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위험하긴 하지만, 이 세계에서 몬스터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해야 해.’
카엘은 문득 이게 일전에 만난 도사가 말한 초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자 더욱 확신이 생겼다.
‘그래. 저 몬스터들을 해치워서 이 세계에서 몬스터를 몰아내는 거야.’
그때였다.
“카엘 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브로칸이었다.
“카엘 님이 나서기 전에 제가 먼저 나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비장의 약에 대해 아는 브로칸이 부작용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었다.
브로칸의 말대로 아직 라이칸스로프의 본모습을 드러내지도, 거인화 약을 먹은 것도 아니니 시도해 볼 남은 전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긴 하겠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써야지요.”
카엘의 눈빛을 읽은 듯, 그렇게 말한 브로칸이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
자신을 걱정하면서 늑대 얼굴의 라이칸스로프로 변하는 브로칸의 모습을 보며 카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려 한 거지? 내가 무리해서 저 둘을 해치면 누가 좋아한다고.’
현재 타모라국에는 온갖 괴물과 귀인 그리고 그를 지원하는 마족까지 있는 상황.
당장 드래곤과 용을 해치우고 나면 이들이 유리해진다.
이곳뿐만 아니라 대륙에도 마족이 득세해, 마왕이 부활하고 마계로부터 대침공이 이뤄질 가능성이 컸다.
자칫 눈앞에 상황에 매몰되어 오판할 뻔한 거였다.
“카엘 님? 괜찮으세요? 상태가 안 좋으시면 아예 여기서 피하죠.”
어느새 완전히 라이칸스로프 모습이 된 브로칸이 다가와 걱정했다.
카엘은 그런 브로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야, 괜찮아. 덕분에 살았어.”
“네? 제 덕분이요?”
브로칸이 늑대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귀엽다.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때가 있을 정도였다.
‘인간일 때 모습을 생각하면 쉽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이람.’
카엘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여전히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용과 드래곤을 바라봤다.
브로칸이 위를 보면서 투덜댔다.
“라 키레아스 님도 참. 말리러 갔으면 끝까지 말려야지. 같이 드잡이질 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지.”
카엘도 쓴웃음을 지으며 저 광경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영노 님부터 정신 차리게 해야겠어.”
“어떻게요?”
“그건 내게 맡겨 둬, 다 방법이 있으니까. 문제는 저기까지 가는 거겠네.”
현재 주위 상황을 생각하면 쉽지 않았다.
지금도 소피아는 축융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었고, 모르타, 고여가 나머지 무관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문제는 드래곤과 용이 싸우느라 정신없는 사이, 여유가 생긴 황룡이 다시 나타났다는 거였다.
“용을 부르는 걸 보니, 후환을 제거하려면 당신들은 제거해야겠군요.”
그러면서 달려오는데 소피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카엘이 함께 싸워도 이기는 걸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브로칸이 소리쳤다.
“카엘 님, 큰일 났어요. 저기 사대장군이 왔어요.”
“그래?”
브로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 일전에 상대했던 사대장군인 욕수, 구망, 현명 세 명이 보였다.
다들 보통 고수가 아닌 만큼 어떻게든 묶인 걸 풀고 나올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래도 상처가 다 회복된 건 아닌 거 같네.’
하나같이 부하의 부축을 받아서 오는 게, 도성에 난리가 나고 궁궐 위에 괴수들이 나타난 걸 보고 아픈 와중에도 와 본 모양이었다.
‘저들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일전에 만났을 때 이쪽을 나쁘게만 보는 건 아닌 거 같았으니 한번 시도해 볼 만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다른 의미의 비장의 수를 쓸 수밖에 없겠지만.’
카엘은 브로칸에게 말했다.
“나는 저기로 가 볼 테니, 소피아를 좀 도와줘.”
“아, 맡겨 주세요!”
브로칸은 곧바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황룡이 소피아의 뒤를 노리고 공격하기 전에 달려가 막아 냈다.
그런 다음.
소피아가 황룡을, 브로칸이 축융을 맡았다.
‘열세긴 해도 당분간 버틸 수는 있겠지.’
카엘은 그 둘이 어떻게든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걸 보곤, 곧바로 사대장군들에게 달려갔다.
“엇. 너는?!”
카엘이 다가가자마자 사대장군들이 흠칫했다.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지금 난리를 막으려면 여러분 도움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그래, 지금 이게 무슨 난리냐.”
“용이 나타나더니, 이상한 괴물까지 나타나고. 구미호를 잡는 게 아니었나? 도통 영문을 모르겠네.”
“…나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군.”
카엘은 당장 필요한 부분만 요약해서 알려 줬다.
“황룡이라는 자가 용의 역린을 건드리고 여의주를 훔쳤답니다. 그걸 알게 된 용이 화나서 황룡을 공격해서 궁궐이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제 동료가 나서서 막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제가 용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는데, 여의주를 훔친 황룡 님의 방해 때문에 어렵군요.”
뜻밖에도 사대장군은 안 그래도 황룡에 대해 악강점을 가지고 있었는지 곧바로 이해하는 게 아닌가?
“황룡이 여의주를 훔쳤다고? 그럴 만해.”
“쯧, 황룡이라면 충분히 그러고 남지. 만날 자신이 용손이라고 잘난 체하더니만. 공손하게 말하면 잘난 척 안 하는 줄 아는 것도 웃기지 않나? 오히려 더 비꼬는 거 같아서 재수 없잖아.”
“확실히 그간 여의주를 갖고 싶다 하긴 했다. 그런데 정말로 여의주를 훔쳐서 이 사달을 내다니. 어떻게든 막아야겠군.”
반발이 심했던 현명까지도 협조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현명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네 동료라는 게 저 괴물이… 드래곤이냐?”
“네. 서방의 용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군.”
그 대답에 욕수와 구망도 놀랐다.
“우리가 저런 괴물한테 덤볐다니.”
“미쳤지, 미쳤어. 저런 괴물을 어찌 이기려고. 아, 자네 동료한테 괴물이라고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자신을 무섭게 여기면 더 좋아할걸요. 어쨌든 황룡을 제지해 주시겠습니까?”
사대장군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워낙 강한 자라 우리가 나서도 막긴 어렵다.”
“맞아. 조금 창피한 이야기지만, 우리 최선의 상태로도 셋이서 간신히 막을까 말까 해. 둘이서 덤볐을 때도 진 적이 있거든. 그때 어찌나 잘난 척하던지.”
“…분하지만 구망의 말이 맞다.”
“축융이라는 분도 설득해 맞서는 건요?”
“그 녀석은 원래부터 자기 이득이 되는 대로 움직이는 녀석이라 설득이 어렵다.”
현명이 단호하게 말하자 욕수와 구망도 말이 좀 심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긍정했다.
카엘도 특별히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었다.
“제가 회복약을 드릴 테니 그거 먹고 회복해서 저희 동료와 합세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빠른 회복을 자신하다니, 무슨 비약이라도 들고 있는 거냐?”
“그러고 보니 원래 우리를 치료해 주려고 했었지.”
“…약을 주면 협조해 주지.”
“정말인가?”
“…….”
현명의 말에 구망과 욕수 둘 다 놀랐다.
저 제일 고지식한 녀석이 협조라니.
말 많은 구망이 말을 잃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드리죠.”
카엘은 곧바로 회복 포션을 나눠 줬다.
처음에는 신기해하면서 주저했지만 현명이 들이켜고 회복한 걸 보더니, 다른 두 사람도 즉각 마셨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카엘의 말에 현명이 살기 어린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반드시 막아라, 만약 용을 못 막으면 너는 내가 제거해 주마.”
그런 현명에게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두고 보십시오. 용이 저한테 비는 광경을 보게 될 테니.”
그 말에 대장군들이 충격을 받았다.
“비, 빌어?”
“막는 정도가 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