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누가 여우지? (2)
“음. 여기에는 정말 소드 엑스퍼트급 무인이 많군요.”
카엘이 감탄했다.
금방 조정에서 보낸 무관들이 덤볐는데 대다수가 검기를 쓰고 있어서였다.
감탄하는 카엘을 고여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 무인들을 손쉽게 다 때려 눕혀놓고서는…….’
“으. 으…….”
“아이고.”
“큭.”
지금 사방에는 무인들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다 합치면 50명이 넘는데 그걸 다 물리친 거였다.
드래곤인 라 키레아스는 나서지도 않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렇게 혼전을 벌이면서도 어느 하나 죽은 이가 없다는 거였다.
카엘이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 덕분이었다.
심지어 많이 다친 이들은 카엘이 회복 포션으로 치료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차례로 손발을 묶어서 한쪽에 모아 뒀다.
무관들은 적이 봐준 것도 모자라 적에게 치료까지 받는 자신들의 처지가 부끄러운지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묶였다.
하나같이 고여와 눈을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 피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카엘이 봐주고 치료해 주는 게 고여 공주의 뜻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지금 내가 뭐라고 해도 안 믿겠지.’
“여긴 얼추 정리된 거 같으니 이제 출발하죠.”
“아, 네.”
카엘의 말에 고여가 뒤를 따랐다.
카엘 일행은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로 향했다.
마을 뒷산을 넘어가면 바로 도성이 보일 정도니, 제법 가까이 온 셈이었다.
원래라면 그냥 지나쳐도 됐지만, 라 키레아스에게 필요한 약재를 구하려고 들렀다.
‘무관들이 찾아온 걸 보면, 도성에 도착하면 난리가 나겠지.’
그랬다가는 약방에 들를 짬이 안 날 거 같았다.
마을에는 아직 괴물이나 괴인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곳곳에 다른 곳에서 피난 온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제법 됐는데, 그들에게서 요괴한테 공격당했단 소식을 들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왕실에 대한 불만도 가득했다.
“이거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국왕이 지켜 줘야지 왜 군사들을 안 보내?”
“듣자 하니 해안가는 아예 포기하고, 일부 요지만 대장군들이 지키고 있다던데?”
“허, 나머지는 그냥 앉아서 죽으란 말이야? 새 중전 맞는다고 세금은 진탕 걷어 가 놓고 너무하네, 정말!”
“예전에는 참으로 총명하던 분이셨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흐려지셨는지…….”
“혹시 들었는가? 국왕이 저러는 게, 웬 여우 같은 요괴한테 꾀여서 그렇다던데.”
“듣고말고. 그것도 불여우라며. 남자를 어찌나 잘 후리는지, 조정 대신들도 꼼짝을 못 한다지 뭔가.”
지나가면서 그 말을 듣던 카엘은 문득 고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부왕이 귀신에 현혹되었다고 했지. 그 귀신이라는 게 여우 요괴 같은 건가?’
여우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요괴가 있었다.
바로 구미호.
동방의 요괴로 종종 언급되는 요괴로, 왕을 유혹해 나라를 도탄에 빠트리는 게 주특기라 할 수 있었다.
간혹 요력을 높이기 위해 인신 공양까지 받는다고도 했다.
‘나중에 가면 확인할 수 있겠지.’
* * *
그 시각 조정에 악보(惡報)가 전해졌다.
검 좀 쓴다고 자신하는 오십의 무관들이 덤볐는데 고여 공주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는 거였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전령이 부리나케 달려와 알린 거였다.
“패했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설마 공주라고 봐준 건 아니겠지?”
국왕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공주님은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50명의 무인이 모두 쓰러지는 데는 한 시간도 안 걸렸습니다.”
신하들도 놀랐다.
“이럴 수가. 그렇게 많은 숫자가 덤볐는데도 일방적으로 패하다니.”
“공주님이 어마어마한 외세를 끌고 들어오셨군요.”
그때 한쪽에서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 무슨 이야기입니까?”
옥조가 또 조정에 나온 걸 본 국왕이 깜짝 놀랐다.
“아니, 옥조여. 쓸데없이 신경만 쓴다고 여기 나오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안 그래도 몸도 약한데.”
“어찌 저만 편안히 있을 수 있습니까? 조정의 무관들이 저 때문에 쓰러진 게 맞지요? 다들 저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다니. 아!”
옥조는 충격을 받은 듯 쓰러졌다.
“오, 옥조!”
놀란 국왕이 달려가 부축하며 소리쳤다.
“어, 어서 어의를 오라 해라!”
“어, 어의가 없습니다.”
“어의가 없다니, 무슨 그런 어이없는 일이 다 있단 말이더냐.”
신하의 대답에 국왕이 황당하다는 듯 따졌다.
“그게… 옥조 님이 약 냄새가 싫다고 하여…….”
“아, 그랬지.”
그때 옥조가 쓰러진 채로 힘겹게 중얼거렸다.
“도, 도사님을 불러 주세요.”
“그렇지. 도사를 불러라.”
잠시 후, 도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도사는 황금색 도복과 모자를 썼는데, 어찌나 화려한지 임금보다 더 번쩍였다.
국왕은 못마땅한 얼굴로 도사를 바라보다가도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전하, 무슨 일이옵니까.”
“옥조가 충격을 받아 쓰러졌으니 좀 살펴보라.”
“아, 알겠습니다.”
“어떤가?”
옥조에게 귀를 들이대던 도사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걸 보고 말했다.
“옥조 님께 마귀가 달라붙었을 수 있으니 사람들을 물려 주십시오.”
“어, 그래? 들었지? 다들 물러나라.”
“…전하도 위험합니다.”
“아, 그래?”
도사의 말에 국왕은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도사가 옥조를 살피는 게 아니라, 그냥 귀를 갖다 대고 있는 게 아닌가?
‘귀신의 소리라도 듣는 건가?’
국왕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도사가 몸을 일으키는데 표정이 심각했다.
“왜 그리 표정이 어둡나?”
“주변에 사악한 기운이 많아 우려했거늘. 기어코 옥조 님의 육신에 파고든 모양입니다.”
“뭐?! 그럼 어떡하냐?”
“이를 몰아내려면 인신 공양을 해야 합니다.”
“뭐, 뭣이 인신 공양?!”
도사의 말에 국왕은 화들짝 놀랐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신하들도 목소리를 높여서 항의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찌 인신 공양을 요구한단 말이오.”
“요괴나 할 법한 짓이 아니요?”
그때를 맞춰 옥조가 괴로워하며 신음을 터트렸다.
“크흑! 아흑!”
그러면서 몸을 꿈틀대는 걸 국왕과 신하들 모두 얼굴이 벌게져 쳐다봤다.
“다들 조용히 하십시오! 인신 공양을 하지 않는다니, 귀신이 더 좋다고 날뛰지 않습니까.”
“아, 미안하네.”
도사의 호통에 국왕이 저도 모르게 사과하고는 눈치 보며 난색을 보였다.
“아무리 인신 공양은 좀 그런데. 보다시피 대신들도 반대할 테고.”
그러자 옥조가 쓰러진 채로 입을 열었다.
“저기 도사…….”
“아, 잠시만요.”
잠시 옥조에게 귀를 기울이던 도사가 일어서더니 자신의 이마를 쳤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인신 공양이라고 하지 말고,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처벌하면 되지 않습니까?”
“호오?”
“그런 자를 처벌하면서 귀신을 퇴치하면 일거양득이라며 백성들이 우러러볼 것입니다.”
“옳거니.”
국왕은 정말 묘수라는 듯 자신의 무릎을 탁 하고 쳤다.
그러다 이내 뭔가 깨달은 듯 안타까워했다.
“아뿔싸! 죽어 마땅한 죄인들은 이미 처형했는데 어찌하면 좋겠나.”
하지만 도사는 그것도 이미 예상해 뒀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중형을 저지른 자를 처형하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전하께서 순간 측은지심이 들어서 형량을 낮게 준 자들이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하면 될 일이지요.”
“그… 그렇지.”
국왕이 납득하는 듯하자 신하가 물었다.
“그런데 인신 공양이라는 게 귀신이나 좋아할 법한 짓거리 아닌가?”
“그걸로 어떻게 귀신을 퇴치할 수 있단 말인가?”
“타당하신 지적이십니다. 인신 공양을 하면 귀신이 좋아하겠죠. 그걸로 귀신을 옥조 님으로부터 꾀어내려는 거죠. 그래야 퇴치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군.”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러나 국왕이 신하를 나무랐다.
“다들 잘 모르면서 더는 참견하지 말게. 조금만 기다리게. 금방 준비하라고 할 테니.”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도사가 옥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옥조 님이 사대장군을 보내야 고여 공주님을 잡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시는데요.”
타모라국의 사대장군이라고하면 구망, 욕수, 축융, 현명.
이 넷을 일컫는다.
이들은 각각 동서남북을 맡아서 지켜 왔는데, 그 무공이 타모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최강의 무인.
그런 그들이 못 잡는다면 아무도 못 잡는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국왕은 순순히 납득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했다.
“아,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요지를 지켜야 한다고 국경을 지키는 것도 포기하라고 지시 내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대장군을 불러들이다니요.”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 나온 말 아닌가? 저들이 이대로 왕실에 들이닥치면 어쩔 텐가?”
“…….”
신하들이 아무런 대꾸를 못 하는 와중에 한 신하가 물었다.
“하나 이미 저들이 코앞에 있는데, 지금 불러들인다고 해도 늦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긴 하겠네.”
국왕이 그제야 그걸 깨달았을 때, 도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옥조 님이 이미 국왕님의 명이라고 사대장군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뭣이?!”
“아니, 정말인가?”
신하들은 화들짝 놀랐다.
국왕의 명이라고 멋대로 서신을 보내다니.
그거야말로 월권이 아닌가.
하지만 국왕의 반응 때문에 뭐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허허, 정말인가? 참으로 현명한 여인이로고.”
* * *
서쪽을 지키던 사대장군 중 하나인 욕수가 낯익은 얼굴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구망, 어서 오게. 참으로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일세. 허 참, 이게 무슨 일인지. 아무리 그래도 공주를 잡는 데 우리까지 움직이라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구망이 투덜거리는 걸, 욕수가 달랬다.
“그래도 이런 일로라도 얼굴을 보니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 그나저나 현명은 아직 멀었나?”
“나는 이미 와 있네.”
어느새 현명이 그 둘의 뒤에 서 있던 거였다.
그걸 보며 욕수가 웃으며 나무랐다.
“자네는 언제나 사람 놀라게 하는군.”
“진작에 눈치채 놓고서는 놀라는 척하기는.”
현명이 차갑게 대꾸하자 욕수가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자 구망이 현명에게 동의를 구했다.
“현명, 자네도 내 말에 공감하지? 요지를 지켜야 하니 각지의 괴물들을 내버려 두라 해 놓고 공주를 잡으라고 어명을 내리다니. 국왕께서 예전만큼 총기가 있으신 거 같지 않네. 정말 걱정이지 않나?”
척.
현명은 동의하는 대신 어느새 빼 든 칼을 구망의 목에 갖다 댔다.
“지금 내 앞에서 역모를 이야기하는가?”
그걸 보며 욕수가 말렸다.
“에이 참, 이러지 마시게나. 구망이 원래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는 거 알면서.”
구망도 늘 겪는 일인 듯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명의 칼끝을 옆으로 치웠다.
“맞아, 역모는 무슨. 의심스러우면 파직을 받아주든가. 나야 어서 이 짐을 내던지고 전기수나 하면서 돌아다니고 싶다네.”
“짐을 내던지다니, 그런 소리 말게.”
“알았어, 알았어. 적도 소수라고 하니, 빠르게 해치우고 돌아가자고. 돌아가서 소설책이나 한 자 더 읽어야겠구먼.”
구망이 투덜대며 하는 말에 욕수가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공주님도, 함께하는 이들도 나쁜 이들은 아닌 거 같던데.”
“흠, 그건 무슨 소린가?”
“내 부하 중에 기배라고 혈기 넘치는 녀석이 하나 있거든. 괴물이 인근의 마을을 습격했다길래 한 무리 부하들과 함께 구하러 갔지 뭔가.”
“오! 정말인가? 혈기 왕성한 게 꼭 자네 한창 시절 때 보는 거 같군. 호랑이가 아이를 물어갔다고 해서 자네가 활 하나만 메고 산으로 올라갔었지. 화살도 하나뿐이었는데, 그걸 호랑이의 인중에 꽂아 넣고 아이를 구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일세.”
“그거야 급하다 보니 실수로 검이며 화살이며 놓고 간 탓이지.”
쑥스러운 듯 대꾸한 욕수가 다시 화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그보다 기배가 말하기를, 마을에 갔더니 이미 괴물을 모조리 물리쳐 놨다지 뭔가.”
“그거야 자기들한테 덤비니까 해치운 게 아닌가?”
“아닐세. 그 마을뿐만이 아니라 서온 마을이 위험하단 소리에 달려가서 거기 요괴들로 무찔렀거든.”
“아니, 그게 정말인가? 안 그래도 장인어른이 거기에 사셔서 요괴들이 습격해 왔다는 소리에 집사람이 그렇게 걱정하던데 잘 됐군.”
욕수에 이어 구망까지 호의를 보이자 현명이 목소리를 높여 그들을 나무랐다.
“다들 정신 차리게! 상대가 뭐든 우리는 왕명을 이행하는 게 우선이야!”
“뭐, 그렇긴 하지.”
“어쨌든 어서 가서 잡자고. 붙들어 놓고 여기까지 오면서 무슨 모험을 했는지 물어봐야겠어. 도성까지는 멀진 않지만 감옥 안에서도 이야기를 들으면 충분하겠지.”
“허허, 누가 자네를 말리겠나.”
욕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구망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