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드래곤과 용 (5)
“정말 내 역린을 고칠 수 있다고?”
카엘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영노가 되물었다.
고여가 끼어들어 거들었다.
“믿으셔도 됩니다. 이 분은 서방의 고명한 약제사로 서쪽의 해룡의 심장병도 고치셨으니까요.”
“허, 정말이냐?”
“맞아. 내 체질도 고쳐 준다고 해서 함께 다니고 있으니까.”
“그래?”
영노는 혹했다.
고여가 해룡의 심장병을 고쳤다는 거야 허풍이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자신과 동격으로 보이는 라 키레아스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영노는 슬쩍 호구록모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천성이 올바른 거 같으니 신뢰할 만한 인간 같습니… 악!”
호구록모가 대답하다가 비명을 질렀다.
눈물을 글썽이며 따졌다.
“잡아당기면 아프다니까요! 이번에는 왜요?!”
“말하는 게 재수 없어서 그랬지. 그보다 약제사, 그렇게 실력이 좋으면 내 역린 좀 고쳐 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웃다가 대뜸 카엘의 눈치를 보는 게, 부탁하기 민망해서 호구록모를 괴롭힌 모양이었다.
그때 라 키레아스가 따져 물었다.
“설마 맨입으로 고쳐 달라는 건 아니겠지?”
“뭔가 줘야 해? 너는 뭘 줬는데?”
“…….”
고여가 되묻자 라 키레아스가 할 말을 잃었다.
고쳐 주면 클리페우스성을 떠난다고 했지, 뭘 구체적으로 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아니면 또 현자의 돌로 트집 잡아서 퉁치려나?’
카엘은 그래도 상관없긴 했다.
중요한 건 드래곤이 클리페우스성을 불태우지 않는 거니까.
그런데.
“고치고 나면 줄 게 있다. 뭘 줄지는 비밀이지만.”
라 키레아스가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드래곤으로부터 뭔가 대단한 보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지만, 카엘은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아뇨. 이미 현자의 돌도 가져갔으니 괜찮습니다만.”
“아니야.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지.”
라 키레아스의 단호한 말에 영노가 중얼거렸다.
“그럼 나도 뭔가 주긴 해야겠네…….”
“고민은 천천히 하시고, 일단 고쳐 드리겠습니다. 상처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어, 어.”
카엘의 말에 영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목을 보였다.
목에 단단한 비늘이 거꾸로 박힌 게 보였다.
인간으로 둔갑했어도 비늘만은 저렇게 남아서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어떻게 건드렸는지 주변이 시커멓게 부어 있었다.
“이거 보니 많이 아프셨겠네요.”
“응. 정말 아팠어. 어찌나 아프던지 한동안 엉엉 울었어.”
“덕분에 홍수가 나서 마을이 떠내려갈 뻔했지.”
그때를 떠올렸는지 호구록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일종의 내성 발톱 같은 건데, 파고드는 부분만 건드리긴 너무 민감하니 아예 뽑아내야겠네요.”
그 말에 영노가 충격을 받았다.
“뽀, 뽑는다고?!”
“네. 그러고 재생시킬 때 똑바로 나도록 관리하면 됩니다.”
“어, 음… 아니, 괜찮아. 이제 안 아파. 사실 역린 건드려도 끄떡없어. 봐 봐. 아무리 건드려도 안 아프다고. 으악!”
겁을 먹은 영노가 다 나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의 역린을 건드리다가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자 맑은 하늘에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거 같은 날씨로 변하는 걸 보고 카엘은 감탄했다.
‘이곳의 용은 자연을 움직일 정도라더니,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하지만 카엘은 가만히 서서 비를 맞을 생각은 없었다.
카엘은 회복 포션을 꺼내 영노에게 살짝 뿌렸다.
“으아아아아아악! 어? 시원하네?”
“이 회복 포션을 뿌려서 그렇습니다.”
카엘은 회복 포션을 보여 줬다.
벌떡 일어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회복 포션을 보던 영노는 카엘에게 따졌다.
“봤지? 건드리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그런데 이걸 뽑겠다고?”
“금방까지는 괜찮다면서요…….”
“…안 괜찮아. 차라리 그거나 있는 대로 줘.”
아무래도 역린을 뽑는 게 너무 무서운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프지 않도록 뽑기 전에 마취할 테니까요.”
“마취하면 안 아파?”
“네. 뽑았는지도 모를 겁니다.”
“끄응.”
고민하는 영노에게 호구록모가 권했다.
“천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인데 이번에 고쳐 버리시죠. 언제까지 역린을 건드릴까 전전긍긍할 겁니까?”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하면 될 거 아냐!”
“잘 생각하셨습니다. 재생 포션은 가져왔는데, 마취약은 없으니 그건 따로 만들어야겠네요.”
“아, 그래?”
당장 안 해도 된다는 사실에 영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볼일 다 보고 천천히 만들고 와.”
“아뇨. 약재 몇 가지만 구하면 되는데요. 바로 마을로 가서 사 오겠습니다.”
“아니야. 천천히 만들면 돼. 그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카엘은 더 우기진 않았다.
‘마취약 재료를 구하면서 라 키레아스 님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약재도 구하면 되겠지.’
그런데 옆에 있던 호구록모가 슬쩍 도발하는 게 아닌가?
“혹시 피하는 건 아니고요?”
“피하긴 누가 피해!”
영노는 버럭 화를 내며 호수 옆의 대나무 숲으로 뛰어갔다.
거기서 귀엽고 작은 손으로 손날을 날려 대나무를 하나 꺾어 오더니, 작은 손가락으로 구멍을 송송 뚫어서 카엘에게 건넸다.
“자, 이거 불면 달려갈게. 이거면 피하는 게 아니라는 걸 믿겠지?”
“제가 언제 의심했다고요.”
카엘은 웃으며 대꾸하고는 대나무 피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걸 보며 영노가 당부했다.
“그거 다른 사람이 불면 안 되고, 꼭 네가 불어야 해.”
“설마 저 인간이 생소한 악기를 못 불면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고 주신 건 아니죠?”
“…….”
호구록모의 말에 영노가 아무런 대꾸도 못 하는 걸 보니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심지어.
픽! 피이이익! 피이이이…….
카엘이 처음에는 잘 못 부르다가 이내 그럭저럭 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절망스러운 얼굴이 됐다.
‘정말 싫은 모양이네.’
이대로라면 괜히 걱정하느라 마음의 병이 걸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싫으시면 안 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 휴.”
대놓고 안도하는 걸 보고 카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회복 포션을 건넸다.
“이거 드릴 테니 아프시면 바르시고요.”
“앗. 정말 고마워.”
훈훈한 분위기로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라 키레아스가 물었다.
“맞다. 여기서 내 본모습을 드러내도 괜찮나?”
“가능하면 삼갔으면 하는데.”
“이유는?”
“구렁이로 500년을 살다가 이 땅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용이 될 수 있었거든. 만약 본모습으로 이 땅을 불태우면 나도 나서서 막을 수밖에 없어.”
“그런가.”
라 키레아스가 납득하는데, 오히려 고여가 따지고 들었다.
“이 땅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셨다고요? 지금 이 땅을 휘젓는 괴물과 귀인들 때문에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데요. 왜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자 영노가 미간을 모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내 역린을 건드리고 여의주를 훔쳐 간 녀석들을 내가 왜 지켜 줘?”
“그건 어떻게 영문인지 저도 잘…….”
“모르면 가만히나 있든가.”
“…….”
“그리고, 저런 허접스러운 요괴는 별문제도 아니야. 아마 이 친구가 화내면 온 나라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걸.”
영노는 그러면서 라 키레아스를 슬쩍 쳐다봤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라 키레아스가 마음먹으면 그런 능력은 충분히 됐으니까.
영노 입장에서는 그게 이 땅에 도래한 최대 위협임이 틀림없었다.
그때 카엘이 넌지시 물었다.
“그럼, 이제 역린으로 아픈 것도 덜하겠다. 여의주를 찾고 사람들이 치성 드리면 도와주실 건가요?”
“하는 거 봐서지만, 아무래도 모른 척하긴 그렇겠지.”
“그럼 여의주도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혹시 어디로 훔쳐 갔는지 짚이는 곳이라도 계십니까?”
“어, 정말?”
카엘의 말에 영노가 댕그란 눈으로 물었다.
그걸 보며 호구록모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다. 천성이 착한 인간처럼 보인다고요. 이 호구록모, 호구처럼 인간들에게 많이 속은 덕에 사람 보는 눈은 있습니다.”
“칫, 자랑이다.”
그렇게 핀잔을 준 영노가 저 앞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향했어.”
“도성 쪽이네요. 설마 조정에서 훔친 건…….”
고여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용의 분노가 왕실을 뒤덮는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레짐작하지 말고, 가면서 한번 훑어보죠. 둘러 가지 않아도 되는 점은 좋네요.”
그렇게 말한 카엘은 대나무 피리를 들어 보였다.
“여의주를 찾으면 이걸 불 테니, 오셔야 합니다.”
“아, 알았어!”
힘차게 대답한 영노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역린 뽑는 거 아니지?”
“네. 뽑아 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강제로 뽑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 그래.”
영노는 안도하면서도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내가 뽑아 달라고 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 * *
영노와 헤어진 카엘 일행은 호구록모의 안내를 받아 타라비산에서 내려왔다.
호구록모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슬슬 날도 추워지는데 무탈한 여행 되시게.”
“감사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하시길.”
“그리고… 아니 상관없겠군.”
“무슨 말을 하시려고 했습니까?”
“아, 이대로 가면 강이 나와서 배를 구하는 법을 알려 주려고 했는데 그대들은 딱히 필요 없겠군.”
“아. 괜찮습니다. 여차하면 날아가면 되니까요.”
그러고 호구록모와 헤어지고 길을 가는데, 정말 커다란 강이 나왔다.
근처에는 다른 배가 보이지 않는 게 건너려면 한참 둘러 가야 할 듯 보였다.
“바람의 정령을 타고 날아가야겠어. 모르타, 부탁해.”
“알겠습니다.”
대답한 모르타가 잠시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바람의 정령이 응답하지 않아요.”
“정말? 바람이 부는데도?”
모르타와 오래 함께 다닌 브로칸도 놀라서 되물었다.
정령이 응하지 않는다는 건 별개의 인위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저기가 수상쩍네.”
라 키레아스가 강 한쪽에 있는 섬을 가리켰다.
그걸 본 모르타가 말했다.
“아, 정말로 바람의 정령이 저기를 피하네요.”
“뭔가 사악한 힘이라도 있어서일까요?”
“가 보면 되지.”
고여의 의문에 라 키레아스가 대꾸하더니 대뜸 혼자 섬으로 날아가 버렸다.
“저희는 어떻게 하죠?”
“따라가야지. 내가 던져 줄게. 저기까진 닿을 거 같네. 잠시만.”
카엘은 가능한지 시험해 보기 위해 사람만큼 묵직한 바위를 하나 집어서 섬에 던졌다.
쿵! 하는 굉음이 들렸지만, 무사히 섬 위에 안착했다.
“되겠다.”
카엘은 먼저 브로칸을 집어서 던졌다.
“잘 도착했습니다.”
브로칸의 소리를 들은 카엘은 모르타도 섬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브로칸이 냉큼 받았다.
“이제 나만 건너가면 되나?”
고여까지 던진 카엘은 주변에 쓸 만한 돌멩이가 없나 확인했다.
주머니에 돌을 집어넣고 괴력으로 돌팔매질하듯 내 던져. 그대로 딸려 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
소피아가 잠자코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넌 뭐 해?”
“저도 던져 주시나 해서요.”
‘소피아는 그냥 폭발의 오러로 날아가면 되지 않나?’
카엘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소피아에게 다른 제안을 했다.
“그보다 네가 날 데리고 날면 될 거 같은데.”
“아, 제가요?”
“좀 그런가?”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소피아는 흥분한 듯 얼굴이 벌겠다.
‘이거 괜찮은가?’
카엘의 걱정과 달리 소피아는 카엘을 붙들고 폭발의 오라를 몇 번 사용해.
무사히 섬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섬에 도착하니 섬 밖과 완전 다른 세상 같은 게 아닌가?
슬슬 추워지는 밖과 알리 섬 안에는 포근한 바람이 맴돌았고, 곳곳에는 꽃들이 피어 있었다.
“신비로운 곳이네.”
“저도 이런 곳은 처음 들어와 봐요.”
고여조차 놀라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느새 카엘 일행 앞에 나타난 어린 동자가 말했다.
“도사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 오시지요.”
그 말에 브로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사님들?”
“이곳의 마법사 같은 존재들이야.”
카엘이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정작 브로칸은 인상을 썼다.
“마법사라고요?”
그만큼 마법사에 대해 반감이 강한 거였다.
카엘은 얼른 부연 설명을 해 줬다.
“마계의 힘을 빌리는 마법사랑 달리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니야.”
“아, 그렇군요.”
그제야 브로칸의 경계심이 누그러졌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따라가 보자.”
라 키레아스의 말에 카엘도 동의했다.
정중하게 초대하는데 안 응할 필요도 없었다.
‘막상 문제가 생기면 라 키레아스 님이 어떻게 해 줄 테고.’
동자가 안내한 곳은 커다란 동굴이었는데.
안에는 세 명의 노인이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저들이 도사인가?’
그때 첫 번째 노인부터 차례로 말했다.
“여기에 그대들이 찾는 건 없네.”
“그대들이 부르는 바람을 우리가 부득이하게 막고 있어 미안해서 불렀네.”
“별거 아니지만, 우리의 대접을 받고 조용히 지나가 주게나.”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카엘이 웃으며 대답하자, 브로칸이 신기해했다.
“카엘 님 말대로 그리 나쁜 사람들 같지 않네요.”
카엘도 도사들치고는 저자세이다 싶었는데, 이내 왜 그런지 깨달았다.
도사들이 눈을 감고는 있지만, 눈을 힐끔 뜨고, 라 키레아스와 허리춤에 있는 대나무 피리를 본 거였다.
‘하긴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드래곤과 용한테는 못 깝죽거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