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드래곤과 용 (3)
카엘은 귀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천구귀인에게 말했다.
“쓸모 있는 걸 말하면 살려 주지.”
-켈켈켈. 감사합니다. 그럼, 이름을 걸고 절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십시오. 아! 당연히 다른 인간들도 절 죽이면 안 됩니다.
천구귀인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주절주절 이것저것 요구했다.
그걸 보며 고여가 제지했다.
“카엘 님! 저런 사악한 요괴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바로 해치워 버립시다!”
실제도 아무리 괴물, 요괴와 한 거라도 이름을 건 맹세를 저버리면 안 됐다.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져 격이 떨어진다든가, 저주에 걸려 죽거나 힘을 잃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뭔가 문제가 생긴다는 건 이 세계의 상식이었다.
‘게다가 조금 잔머리가 돌아가는 요괴들은 맹세에 함정을 판다지.’
실제로 방금 천구귀인이 제안한 맹세만 해도 함정이 있었다.
다른 인간들도 절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카엘이 용서해도 카엘의 동료들에게 당하는 걸 막기 위해 내건 조항처럼 보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인간들이라는 건 엄밀히 따지면 카엘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지칭하는 거였다.
즉, 카엘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는 인간들로부터 천구귀인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였다.
엘프인 모르타와 라이칸스로프인 브로칸도 함께 왔지만, 무시하긴 위험했다.
아인종까지 포함될 여지가 있으니까.
하지만 천구귀인이 모르는 게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꼭 내가 저 녀석을 해치울 필요는 없지.’
“카엘, 괜찮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허풍 치는 걸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한번 들어 보죠.”
라 키레아스도 만류했지만, 카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맹세라는 건 상호 간에 이뤄지는 것.
카엘을 함정에 빠트릴 정도의 맹세라면 천구귀인이 알려 준다는 정보도 꽤 신뢰성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마석과 마족은 어디 있지?”
“그게 마석인지 마족인지는 모르겠는데, 저기 타라비산에 높으신 분이 계시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당부받았습니다. 그 높으신 분이 가진 신비로운 돌을 얻으면 강해지지만 탐내지 말라고요.”
“마석과 마족인 게 확실치 않네. 높으신 분이라는 게 인간일 수도 있잖아.”
“아니다. 확실히 집중하니 제법 강한 마기가 느껴지는군.”
라 키레아스가 말할 정도면 보통이 아니긴 했다.
“고여 님, 혹시 타라비산이 어딨는지 아시나요?”
“네, 조금 둘러 가긴 해도 도성으로 가는 방향이긴 해요.”
“그럼 가 봅시다.”
카엘이 결정 내리자 천구귀인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럼, 맹세가 성립된 겁니다.”
“어, 너만 안 죽인다고 했지. 나머지는 다 쓸어 버려!”
“네!”
소피아가 힘차게 대답하며 귀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켈켈?
천구귀인을 구경하느라 앞에서 실없이 웃고 있던 귀인의 목이 뚝 하고 떨어졌다.
“앗, 저도 돕겠습니다.”
뒤늦게 고여도 검기를 두르고 합세했다.
-어, 그러고 보니. 천구귀인 님이 우리는 살려 달라고 안 했구나.
-켈켈켈. 이게 그렇게 되나. 도망치자!
-귀인 살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귀인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멍청이들, 내가 시간을 끌었을 때 도망쳤어야지.
혀를 찬 천구귀인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맹세한 대로 난 못 죽이는 거 알지? 저 무서운 여자한테 죽이라고 해도 맹세를 어기는 거야.
“알고 있으니까. 그러지 말고 일어나.”
카엘은 천구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구귀인은 그 손을 잡고 일어나며 헤실거렸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긴 앞으로 날 지켜 주려면 서로 가까워질 필요가 있지.
“지켜 줘?”
-맹세했잖아. 다른 인간들로부터 날 살려 주기로. 당연히 다른 모든 인간으로부터 날 지켜 줘야 해. 켈켈켈.
어느새 하대하기 시작한 천구귀인은 득의양양해하며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카엘이 꽉 잡고 있자 꿈적도 할 수 없었다.
-소, 손은 그만 놔줘도 된다.
“잠시만. 조금만 더 빼고.”
-음? 헉!
카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던 천구귀인은 이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몸이 어느새 작아져 카엘만 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요기가 많이 사라진 탓이었다.
-내, 내 요기를 어떻게 한 거야?
“좀 뺏었지.”
카엘이 마력을 생명력으로 변환해 흡수하는 능력을 발휘한 거였다.
‘이거라면 죽이진 않아도 충분히 약하게 만들 수 있지.’
심지어 카엘의 흡수량이 적은데도 많이 작아진 걸 보면 마력도 많은 편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크, 잘못하다가는 소멸해 버릴지도 모르겠네.’
카엘은 어느새 아이 정도로 작아진 천구귀인을 보고는 흡수를 중단했다.
-크억!
겨우 벗어난 천구귀인은 얼굴을 구기면서 카엘에게 악을 썼다.
-이럴 거면 차라리 죽여라!
“그럴 수는 없지. 이제 가 봐.”
카엘이 등을 떠밀었지만, 천구귀인은 귀인들에게 가기 위한 발걸음을 차마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간 다른 귀인들에게 패악질 부린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다른 귀인들이 그걸 참은 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강했기 때문.
지금처럼 약해진 채로 돌아갔다가는 다른 귀인들에게 잡아먹힐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어둠 속에 숨어서 먹음직스럽게 이쪽을 노려보는 귀인들의 눈빛이 보였다.
망설이는 천구귀인을 라 키레아스가 재촉했다.
“왜 가만히 있어? 내가 죽여 줄까?”
-흥. 너는 나를 못 죽인다.
“왜 못 죽여? 나는 인간이 아닌데?”
그게 천구귀인이 미처 모르고 맹세한 두 번째 사실이었다.
한편 뒤늦게 라 키레아스를 살펴본 천구귀인은 화들짝 놀랐다.
눈앞의 존재는 상상 이상으로 아주 강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솔국에서 아주 멀리서 잠깐 본, 모든 귀인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활주박 님에 비견할 정도였다.
‘저렇게 강대한 존재를 눈치 못 챘다니.’
참으로 원통했다.
알았다면 처음부터 도망쳤을 텐데.
지금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천구귀인은 하는 수 없이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귀인이 달려들었다.
귀인들은 천구귀인을 쓰러트리고, 팔을 잡고 다리를 당기고 코를 물어뜯었다.
그러다 여럿이 더 몰리자 하나라도 더 뜯어먹으려고 자기네끼리 아귀다툼을 벌이는 게 아닌가?
그 광경을 보던 천구귀인이 어이없어 웃으려는 순간.
귀인 한 마리에게 그대로 머리를 잡아먹혔다.
* * *
한편 귀인과 괴물들을 쫓아내긴 했지만, 서온 마을은 난장판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아들. 제발 눈 좀 떠 보거라!”
“아부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를 어쩐다. 내 그러니 나가지 말랬더니.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게 됐구나!”
마을이 부모, 형제,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곡소리로 가득했다.
이걸 이대로 두고 가자니 아직 많은 수의 귀인과 괴물이 마을 안팎에 숨어 있었다.
당장 브로칸과 모르타에게 찾아내서 해치우라 했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다행히 기배가 군졸을 이끌고 도착했다.
“카엘 님! 어떻게 됐습니까?”
“적의 우두머리는 해치웠고, 살아남은 나머지 귀인과 괴물들은 도망쳐 마을 안팎에 숨었습니다.”
“아니, 벌써 말입니까?”
그때였다.
“카엘 님, 여기 찾았습니다.”
브로칸의 말에 돌아보니 귀인 셋이 도망치고 있었다.
‘귀인이 셋이나?!’
기배는 긴장했다. 혼자서 귀인 하나는 어찌 해치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셋은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도 카엘 님이랑 저기 브로칸 님과 함께 싸우면 되겠지.’
펑! 펑! 펑!
그런데 귀인의 머리가 하나 둘 셋 차례대로 터져 나가는 게 아닌가?
뭔가 싶어서 봤더니, 카엘이 돌멩이를 던지는 대로 귀인이 맞고 쓰러진 거였다.
‘저, 저런 괴력을 가지고 있다니.’
정작 당사자인 카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브로칸에게 물었다.
“이것들 어디에 숨어 있었어?”
“한 녀석은 아궁이 안에, 나머지 둘은 마룻바닥에 있었습니다.”
“그래? 거기도 다음에 수색할 때 빠트리면 안 되겠네.”
그러는데, 어느새 나타난 소피아가 귀인들의 사체를 한쪽에 던지면서 말했다.
“북쪽은 이게 전부 같아요. 맞죠?”
“네. 더 없다네요.”
모르타가 맞장구쳤다.
한편 소피아가 가져온 귀인의 사체를 본 기배는 더욱 놀랐다.
‘다섯? 둘이서 다섯이나 잡아 온 거야? 괜히 마을을 구했다고 한 게 아니었구나.’
사실 소피아가 혼자서 잡은 거였지만, 그 사실까지 알았다면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본 것만 해도 아찔했기 때문이다.
‘저런 강자를 포승줄로 묶어 갈 생각을 하다니… 오히려 봐주신 거군.’
기배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카엘이 말했다.
“아직 숨은 녀석들이 많으니까 한 집씩 수색하는 게 좋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치는 인원이 없도록 최대한 뭉쳐서 하고요.”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기배가 힘차게 대답했다.
되레 카엘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정도였다.
‘갑자기 너무 공손해진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어쨌든 지시대로 움직인다니 다행이었다.
‘근데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지?’
카엘이 기배에게 물었다.
“여기에 더 증원은 오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불렀습니다만. 언제 올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기다렸다가 늦게 가는 거야 카엘은 상관없었다.
마족이 있다는 소리에 라 키레아스가 안달이 난 상태라는 게 문제였다.
“뭐야, 그럼 한참 여기 있을 거야?”
“아뇨. 출발해야죠.”
한참을 보챈 라 키레아스에게 카엘이 대꾸하고는, 지시를 내렸다.
“브로칸과 모르타는 여기 남아 퇴치하는 걸 도와주고 와. 증원이 오면 바로 돌아오고.”
“네!”
지금 남은 귀인들을 생각하면 이 둘로도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았다.
“길을 몰라도 쫓아올 수 있겠지?”
“카엘 님이 브레프니 왕국에 돌아가 계셔도 냄새 맡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
자신 있게 말하는 브로칸을 본 카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카엘은 고여의 안내를 받아 빠르게 타라비산으로 향했다.
드래곤인 라 키레아스를 비롯해 소드 마스터 소피아, 검기를 쓰는 고여까지.
이들이 날 듯이 뛰어가니까 해가 질 무렵, 타라비산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엘은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름달이 밝긴 한데, 밤도 됐으니 내일 올라가죠? 마침 저기 마을도 보이는데.”
“아니, 괜찮아. 밤은 상관없으니 바로 가 보자.”
라 키레아스가 강경하게 말했지만, 카엘이 다시 한번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마을로 가서 산에 뭐가 있는지 물어보죠. 마을도 뭔가 분위기가 묘한 게 신경 쓰이네요.”
“그래?”
라 키레아스는 마을을 살펴봤다.
“기운이 희미하긴 한데, 확실히 뭔가가 있긴 있어 보이네. 그럼 너희는 마을로 가 있어. 나는 산을 뒤져 보고 올 테니까.”
“그렇게 하시죠.”
카엘은 그렇게 말하고 소피아와 고여와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주민들이 반갑게 맞아 줬다.
“어이쿠, 손님이 오셨네. 어서 오십시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늦었는데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가시지요.”
“손님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너무 스스럼없는 반응에 고여도 당황했다.
“다들 왜 이렇게 평화롭지…….”
나라가 괴물들로 인해 고통받는 것과 전혀 딴판이었다.
아직 괴물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고 해도, 주변의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는 게 보통일 텐데.
“그것도 그렇지만 다들 미남 미녀네요. 마치 엘프 같아요.”
소피아의 감상에 카엘도 동의했다.
스르르륵.
그러는 사이, 갑자기 어두워지길래 하늘을 보니 마을을 밝혀 주던 보름달이 핏빛 먹구름에 가려진 게 아닌가?
동시에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길하고 두려운 상황임에도 마을 주민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갑자기 어두워졌네요. 어서 저희 집으로 가셔서 쉬시지요.”
“저는 저런 구름은 처음 보는데 불길하지 않습니까?”
“요즘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나긴 하는데 별일 없을 겁니다. 여차하면 호랑이 형님이 지켜 주시거든요.”
“호랑이 형님?! 그게 누구…….”
예상치 못한 말에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콰르르릉!
갑자기 구름에서 파란 번개가 내려치더니 마을 입구에 귀인이 나타났다.
그 귀인은 얼굴이 새파란 것만 빼고 천구귀인과 비슷하게 생겼다.
-켈켈켈. 활주박 님이 여긴 손대지 말라고 했지만, 여기에 요기를 늘릴 돌이 있다는데 안 들를 수가 없지!
그렇게 웃는 귀인을 본 카엘은 잘됐다 싶었다.
“저거 해치우고 물어보면 되겠네.”
“소피아!”
“네.”
카엘이 소피아를 부르자마자, 귀인의 몸통이 펑 하고 터져 나갔다.
그때였다.
“어흥!”
우렁찬 호랑이 울음이 들리더니 카엘과 소피아 앞에 호랑이가 뛰어 내려온 게 아닌가?
“어떤 요괴가 감히 이 호구록모가 지키는 마을에 들어오느냐!”
그렇게 외친 호랑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마을 주민에게 물었다.
“어……. 요괴가 안 보이는데, 어디 갔나?”
그 말에 마을 주민이 웃으며 말했다.
“한발 늦었습니다, 호랑이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