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타모라 왕국으로 (2)
‘뜬금없이 웬 칭찬?’
카엘은 라 키레아스의 말에 괜스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지? 상처받으니까. 나라도 착한 일이랑 나쁜 일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그걸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안 그랬다면 천 년 전에 마족과 싸우지도 않으셨겠지요.”
마왕에 대한 전설은 그리 남아 있지 않았지만 일전에 라 키레아스가 말했듯이 당시 드래곤들이 마왕에 대항해 싸웠다는 전설만은 카엘도 기억하고 있었다.
“치, 그럼 난 간다. 다른 구경거리가 있나 봐야지.”
라 키레아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카엘도 거인들에게 먹일 약을 만들기 위해 약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아무래도 덩치가 큰 만큼 약도 많이 필요했다.
‘그나마 구하기 쉬운 약재들이라 다행이지.’
그러고 시장의 관저로 돌아가니 델라 공주가 돌아와 있었다.
“구경 많이 하셨나요?”
“네, 가져갈 책도 잔뜩 사 왔어요.”
델라는 그러면서 사 온 책을 보여 줬다.
‘그 비싼 책을 저렇게 많이 사다니!’
카엘은 반가워하며 들춰 봤다가 실망했다.
-상단주 청년과의 비밀 연애.
-정략결혼은 원수와 하는 게 제격.
-피폐 후작님이 내게 집착한다.
…등등.
하나같이 연애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
“제 취향은 아니네요.”
카엘이 그러면서 이곳에 있는 약제실로 갈 때였다.
프리츠가 다급한 얼굴로 찾아왔다.
“카, 카엘 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그, 카엘 님이 데려오신 손님들이…….”
그 말에 순간 혹시 ‘라 키레아스가 사고 쳤나?’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 동방의 공주님들이 납치당했답니다.”
고여와 아파기 공주의 이름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큰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항구도시 내에서 납치되다니.
카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동향인과 만난 거 같은데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고 서로 싸우더니 잡혀갔다고 합니다.”
타모라 국왕이 공주들을 가둬 죽이려고 한다고는 들었는데, 탈출한 공주를 찾으러 여기까지 사람을 보낸 모양이었다.
“납치해서 어디로 갔나?”
“부둣가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대로 납치해 배를 타고 돌아갈 작정인 모양이었다.
“다들 구하러 가자!”
“네!”
소피아와 모르타가 대답하며 검을 들었고, 브로칸이 앞장섰다.
카엘은 부둣가로 향하면서 일행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납치범들의 실력이 보통은 아닌 거 같다. 혹시 모르니까 주의해.”
아파기는 둘째 치고, 고여는 보통 실력이 아닌데 잡혀간 것만 봐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부두로 달려가니 마침 무관들과 같은 비슷한 복장의 사내 수십 명이 고여를 둘러업고 가고 있었다.
항구도시 내 경비병들이 창을 들고 막으려고 하는 듯했지만 납치범들의 기세가 얼마나 살벌한지 쉽사리 접근도 못 하고 있었다.
“비켜! 납치범은 우리가 막겠다!”
카엘이 소리치자 경비병들이 살았다는 듯 좌우로 길을 비켰다.
그 틈으로 브로칸, 소피아, 모르타가 뛰어들어 갔다.
납치범들도 거기에 대항해 검을 들고 나섰지만 셋의 공격에 순식간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단번에 둘을 쓰러트린 브로칸이 자신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안 센데요?”
“글쎄, 아직 모른다.”
카엘은 납치범의 제일 앞에 서 있던 중년의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다른 납치범들과 달리 몇몇 사내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중에도 이 중년의 사내는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넌 누군데 우리의 일을 방해하느냐?”
“나? 여기 주인인데, 여기서 대낮에 여인을 납치해 가면 안 되지.”
카엘의 말에 중년인이 정곡을 찔린 듯 미간을 살짝 모았다.
“납치가 아니라 국왕의 명에 따라 모셔 가는 것뿐이다. 물러나라.”
“누가 봐도 납치인데?”
“도, 도와주세요!”
마침 고여가 입을 틀어막은 천을 뱉으며 소리쳤다.
“거봐.”
“우리를 막으면 벨 뿐이다.”
중년인은 말로는 이길 수 없다고 여겼는지 검을 뽑았다.
스릉.
뽑아 든 검에서 희미한 기운이 맴돌았다.
“앗, 저건 오러?”
브로칸이 놀라자 아조트가 설명했다.
-저건 검기라는 거다. 오랜만에 보는군.
“소드 엑스퍼트보다 강해?”
-그야 경지에 따라 다르지만 비슷해.
어쨌거나 소드 엑스퍼트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스릉. 스릉.
중년인 뒤에서 푸른 옷을 입은 무인들이 검을 뽑는데, 하나같이 검기를 두르고 있었다.
지금 나온 녀석들만 해도 모두 여덟.
‘저 나라는 소드 엑스퍼트들이 넘쳐 나나?’
저러니 고여가 붙잡혔지.
하지만 카엘은 별걱정 하지 않고 소피아를 쳐다봤다.
자신 있는 눈빛으로 대답한 소피아는 혼자 푸른 옷을 입은 무인들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여, 여인의 몸으로 이렇게 강하다니.”
소피아의 검에 맞고 쓰러진 중년인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브로칸, 모르타와 함께 그사이 남은 납치범들을 때려눕히고 고여를 구한 카엘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여에게 물었다.
“아파기는?”
“저, 저 배로 데려갔어요.”
고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타모라국의 배인지 독특한 양식의 함선이 있었다.
문제는 이미 돛을 올리고 출발한 상황이라는 거였다.
아마 부두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보고 먼저 도망치려 한 모양이었다.
브로칸이 곧바로 앞장섰다.
“지금 쫓아가서 구하겠습니다! 모르타.”
“응! 준비할게!”
모르타가 바람의 정령을 부르려고 하는데, 카엘이 말렸다.
“잠시만 기다려 봐.”
부두를 벗어나 바다로 나아가려던 함선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분명 바람도 타고, 노도 젓고 있었는데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애들한테 붙잡아 두라고 했어.”
놀라는 브로칸에게 델라가 나타나 대답했다.
시장의 관저에서 납치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준 거였다.
“덕분에 쉽게 잡겠네요. 고맙습니다.”
“카엘 님을 위해서 이 정도쯤이야 당연하죠.”
델라는 칭찬에 기뻐하며 어깨에 힘을 줬다.
그때였다.
“우리도 있다.”
큰 거인을 비롯해 거인들이 배가 아예 바다로 못 나가게 포위했다.
항구도시를 떠나다가 부두에 소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나타난 거였다.
한편 함선이 멈추자 함선 안에 있던 이들은 당황하더니 밖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무인들이 무기를 빼 들고 싸우기 위해서 나타났다.
거기다가 푸른 옷을 입은 무인이 여럿 있는 걸 보고 카엘이 말했다.
“모르타, 이제 저 위로 우릴 날려 줘. 브로칸은 따로 뒤로 보내서 아파기 공주를 구하고.”
“알겠습니다.”
모르타가 불러 준 바람의 정령으로 타모라국의 함선에 올라간 카엘이 무인들에게 말했다.
“항복해라! 이제 도망칠 길은 없다!”
“우리는 국왕의 명을 수행하는 중이다! 방해하지 마라!”
“남의 나라, 남의 도시에 와서 깽판 쳐 놓고 그런 말은 안 통하지.”
“흠… 뭘 원하나? 내 이름은 도동. 공주를 데려가게 놔주면 황금이든 뭐든 원하는 걸 주겠다.”
“아직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가 본데, 여기서 사람을 납치한 이상 너희는 해적이야. 해적이 가진 건 주인이 없는데 뭘 주니 마니 해?”
카엘의 조롱에 도동의 얼굴이 뻘게졌다.
“우리를 해적 취급하다니! 다들 쳐라!”
“네!”
화난 소드 엑스퍼트급 무인들이 검에 검기를 두르고 덤벼들었다.
카엘은 험악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리며 소피아에게 말했다.
“좀 봐줘서 죽이지는 말아.”
“알겠습니다.”
카엘의 말에 소피아가 대답하고는 무인들을 상대했다.
이제 폭발 오러를 다루는 데도 매우 능숙해져 적당한 곳에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거로 가볍게 제압해 나갔다.
“그럼 나도 힘 좀 써야지.”
카엘은 아예 힘으로 하나둘 바다에 밀어내 버렸다.
그러면 정신 차리고 올라오기 전에 어인족들이 바다 깊숙이 끌고 들어가 물을 먹여 기절시켰다.
거기다가 정령을 부리는 모르타, 배를 둘러싼 거인들도 방해하다 보니 타모라 국의 무인들은 숫자가 많아도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어이쿠! 괴물이다!”
놀란 타모라국의 선원이 도망쳤다.
조심스레 아파기 공주를 가둬 둔 곳으로 간 브로칸이 라이칸스로프로 변신해 구한 거였다.
그렇게 아파기 공주를 구하고, 타모라국의 무인들을 제압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엘은 모두 꽁꽁 묶어 두고 어느새 거인들에게 소리쳤다.
“도와줘서 고마워!”
“우리의 고향 같은 곳이다. 지키는 게 당연하다.”
큰 거인의 말에 영문을 모르는 잘 모르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거인이 부두를 지켰나 봐!”
“와아!”
“거인 만세!”
큰 거인은 그 반응에 쑥스러우면서도 기쁜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카엘은 큰 거인에게 말했다.
“좀 더 자랑스러워해도 돼. 너희가 항구를 지킨 건 사실이니까.”
“그런가? 자랑스럽다!”
큰 거인이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밀며 외쳤다.
‘좋아하는 거 같아 다행이네.’
우울증에는 약도 좋지만 사람들의 진심 어린 칭찬도 큰 도움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약을 안 만들어 주고 그냥 넘길 건 아니지만.’
이후 카엘은 타모라국의 배를 압류하고, 무인들을 다 체포했다.
무인들은 임무에 실패했으니 자신을 죽이라고 했지만 선원들은 처형당하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에 떨었다.
그런 그들에게 카엘이 말했다.
“굳이 누굴 죽일 생각은 없는데?”
만약 이곳에서 정말 피를 봤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다행히 아무도 죽은 이가 없었다.
카엘의 말에 선원들은 안도했다.
노예로 팔려 가도 일단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때 고여, 아파기 공주가 나타나 도동에게 물었다.
“도동 님, 왜 저희를 잡아가려고 하셨나요?”
“공주들이 국가 전복을 꾀하다 실패하더니 외세를 끌어들이려 하는데 어떻게 충신으로 이를 두고 볼 수가 있나!”
도동이 호통을 쳤지만 고여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도동 님!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 걸 두고 보고만 있는 왕을 어찌 가만히 두고 볼 수만 있습니까!”
“공주 때문에 더욱 혼란에 빠져서 괴물들을 퇴치할 여력이 없어진 걸 모릅니까!”
“저희가 일어나기 전에도 국왕께서는 가만히 있으라 하셨지 않습니까!”
“자, 자. 싸움은 그쯤 하시죠.”
카엘은 점점 목소리가 올라가는 두 사람을 말렸다.
일단 도동과 그 무리가 왕의 명령을 따르는 건 알겠지만 무턱대고 없애 버리기에는 그리 나쁜 녀석들 같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막강한 전력이니 잘 구슬려서 괴물이랑 싸우게 하는 게 낫지.’
그러려면 고여의 말처럼 왕을 현혹하는 괴물을 없애거나 왕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당분간 붙잡아 둬야겠어.’
* * *
다음 날.
카엘은 거인들이 머물고 있다는 인근의 작은 섬을 향해 약을 건넸다.
“여기 나와 있으니 한결 편해졌다.”
“그래도 약을 먹어 두는 게 좋을 거야.”
“고맙다.”
카엘의 말에 큰 거인이 약을 꿀꺽 삼키더니 감탄했다.
“오! 정말. 속이 시원해졌다.”
그러더니 다른 거인들에게도 약을 나눠 줬다.
카엘은 그런 거인들에게 말했다.
“여기 머물러도 되지만 가끔 심심하면 항구로 나와서 놀아.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알겠다.”
그렇게 말한 큰 거인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멋쩍어하며 말했다.
“…실은 어제 인간들이 환호하는 건 듣기 좋았다.”
그 말에 다른 거인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다!”
“예전에 항구를 건설할 때는 칭찬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경거리밖에 안 됐다.”
“그랬구나.”
그간 먹을 거만 주면 된다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이번처럼 말썽이 벌어지면 또 활약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겠는가.
‘가끔 거인들한테 일을 도와 달라고 말하라고, 프리츠에게 당부해 둬야겠네.’
거인들도 한 손 거들만 한 일은 항구에 많이 있었다.
간혹 항구에 문제가 생기면 어인족이 도와주고 있다지만 거인족이 대신할 만한 일은 맡겨도 되리라.
그때 거인들이 말했다.
“카엘은 거인의 친구.”
“거인은 카엘의 친구다. 잊지 마라.”
“카엘,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
몬스터 대침공은 막아 내 도와줄 일은 지났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카엘은 그 호의를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래, 알았다!”
* * *
거인들과 작별한 카엘은 델라에게 말했다.
“이제 심해성으로 가죠. 방주를 불러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어서 가져와!”
델라의 지시를 받은 어인족은 곧바로 바다로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주가 나타났다.
향유고래보다 더 큰, 사각형의 선박이 해수면을 뚫고 치솟더니 방주가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방주는 고래가 입을 벌리듯 뱃머리가 아래위로 열렸고, 그 안을 지키는 수호병이 모습이 보였다.
카엘은 그 수호병에게 인사했다.
“오래간만이야.”
-나한테는 금방이다.
창을 든 수호병은 처음 만났을 때 아주 뻣뻣했던 모습과 달리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호병이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다른 이들은 방주에 타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
그러면서 창끝으로 라 키레아스를 가리켰다.
되레 델라가 놀라서 물었다.
“어, 왜?”
-드래곤을 방주나 심해성에 들이면 위험해서다.
그 말에 라 키레아스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말 나온 김에 내가 왜 위험한지 보여 줘야겠네.”
“잠시만요.”
카엘은 얼른 라 키레아스를 말린 뒤, 수호병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메르 8세에게 물어봐 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았다.
그러고 잠시 멍하니 있던 수호병이 말했다.
-타도 좋다.
다른 수호병과 원거리 통신을 해서 허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흥, 진작에 그럴 것이지.”
라 키레아스는 이번만 참는다는 얼굴로 방주에 올라탔다.
그걸 본 브로칸이 카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이거, 심해성으로 가서도 심상치 않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요?”
“아니야. 둘이 만나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
“그… 그럴까요? 저도 걱정되는데.”
브로칸과 모르타의 우려가 무색하게 라 키레아스와 메르 8세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우 친해졌다.
카엘의 말대로 된 거였다.
‘그야 둘은 함께 싸웠던 전우와 전우의 후예니까.’
서로 존중하기만 한다면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