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몬스터 토벌전 (5)
잠시 후.
카엘의 뒤를 쫓아 지원조의 레인저들이 나타났다.
“이거면 어느 정도까지는 해독되겠지.”
카엘은 그들이 가져온 자신의 가방에서 해독 포션을 하나 꺼냈다.
그걸 자신을 시녀가 아니라 타모라국의 공주라고 밝힌 고여에게 먹였다.
먹이고 잠깐 상태를 살펴보니 효과가 있는지 금방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어, 아… 네.”
정신을 차린 고여는 자신이 뜬금없이 카엘 앞에서 정체를 밝혔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숙이며 눈치를 봤다.
‘반응을 보니 정신도 어느 정도 멀쩡해진 모양이네.’
카엘은 그런 고여를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만티코어의 독은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마비, 마취, 환각, 정신 이상 등 온갖 증상을 유발하거든요.”
실제로 만티코어는 자신의 체내에서 만들어 내는 독뿐만 아니라, 지나가면서 발견한 온갖 독을 묻혀 놓는다.
덕분에 만티코어의 독에 걸리면 병증도 각양각색이고 해독하기 까다로웠다.
“그러면 아까 제가 한 말은 어디까지나 정신 이상으로 잘못 말한 거로…….”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겠죠, 공주님.”
헛된 희망인 줄 알면서도 한번 말을 꺼내 본 고여는 카엘의 대답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카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옥스와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다가 독 안개에 마비되어 쓰러진 아파기 공주를 가리켰다.
“그럼 저분은 누굽니까? 공주가 아니라 시녀인가요?”
“저 아이의 정체를 속인 건 아닙니다. 저 아이는 유리 아파기, 제 동생입니다.”
일단 저쪽도 공주는 맞긴 한 모양이었다.
카엘은 해독 포션을 하나 더 고여에게 건네주고는 남은 해독 포션을 무관들에게 먹이라고 하고 돌아왔다.
그사이 아파기 공주에게 해독 포션을 먹인 듯 아파기 공주가 멍한 눈으로 고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언니……. 앗!”
아파기는 뒤늦게 카엘이 있는 걸 깨닫고 놀랐지만, 고여가 진정시켰다.
“괜찮아. 내가 이미 들켰어.”
“아, 죄송합니다.”
그 말에 아파기도 카엘의 눈치를 살피며 사과했다.
카엘은 그걸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면 모른 척해 드리죠.”
정체를 숨긴 것부터 해서.
향수로 매혹하려 했다든지, 이런 토벌전을 벌이게 만든 것까지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혼담이 더 나오지 않게 얌전히 돌아가면 묻어 둘 생각이었다.
이걸 빌미로 교역할 때 더 유리할 수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라를 줄 테니 나라를 구해 달라고 할 정도니, 뭔가 위험을 겪는 듯해도 교역은 가능하겠지.’
그러나 카엘의 바람과 달리 두 공주는 완강히 거절했다.
“그,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요.”
“아니, 못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에 아파기와 고여 공주가 차례로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이웃의 섬나라, 솔국의 해적질과 해변가에 출몰하는 괴물들 때문에 고통받는 중이에요.”
“그런데도 부왕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는커녕, 솔국에서 보낸 귀신에 현혹되어 제정신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를 막으려는 저희까지 가둬 죽이려고 해 탈출해서 이곳까지 온 겁니다.”
부마를 찾는다는 건 외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저를 부마로 지목한 건 뭣 때문입니까?”
“브레프니 왕국에 왔더니, 마침 카엘 님의 영웅담으로 대륙이 떠들썩해서…….”
“솔직히 물려받을 거 없는 막내아들이라고 해서 저희의 제안이면 응하실 거라 여겼습니다. 다른 공주들이 더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런데 몬스터 토벌전은 갑자기 왜 한다고 하신 겁니까?”
고여가 대답했다.
“그건 제가 생각해 낸 겁니다. 아파기의 매혹이 안 통해, 다른 방법으로 호감을 얻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호감?”
“듣기로는 소드 마스터를 하녀로 두고 있을 정도로, 강한 여자를 선호한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소드 마스터 하녀라는 건 소피아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오해입니다. 원래 시녀로 데리고 있었는데, 재능이 뛰어나 소드 마스터가 된 거니까요.”
카엘은 해명하면서도 황당했다.
‘정말 그런 소문이 돈단 말인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앞서 말한 것보다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타모라국에 그런 문제가 있다는 건 언제 밝힐 생각이었습니까? 일단 속여서 데리고 가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래도 나라를 구한 뒤에는 정말 왕으로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저희 중 마음에 드시는 쪽과 결혼하시면 정통성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카엘은 고여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게 황당했다.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지도 않을 테지만, 저의 뭘 믿고 왕으로 모신다는지 모르겠네요. 타모라국의 백성들을 모두 노예로 삼아 버리면 어쩔 겁니까?”
“……?!”
“…….”
외세의 도움을 받는 건 그만큼 위험하니, 신중해야 했다.
두 공주의 반응을 봐서는 미처 생각 못 한 듯했다.
아무리 큰 뜻을 품고 있다고 해도 아직 어렸다.
‘실제 타모라국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니,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지만 말이야.’
말은 그럴싸해도 뭔가 사고를 치고, 도망친 걸 수도 있었다.
정말 그랬다가는 타국을 명분 없이 침략하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아파기와 고여 공주가 서로 은밀히 대화했다.
[언니, 어떡하지? 이미 신뢰를 잃은 거 같은데…….]
[내가 첨부터 어렵겠다고 말했잖아. 솔국이 제국의 지원을 받는데 제국과 친한 사람이 도와줄 리가 없다고.]
[하긴…….]
그 말을 들은 카엘이 물었다.
“제국? 솔국이 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앗, 그걸 어떻게…….”
고여는 깜짝 놀랐다.
금방 자신들이 사용한 건 전음(傳音).
시끄러운 전쟁 중에 의사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음공으로 아주 작은 소리를 내 상대 귓가로 보낸다.
입술을 달싹이는 거로 전음을 주고받는 걸 알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내용을 듣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제가 귀가 좀 좋은 편이라서요.”
놀라는 두 자매를 향해 카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실제로는 카엘이 세계수의 씨앗을 내어줘서 클리페우스성에 심은 후.
안 그래도 카엘에게 호감을 느끼던 정령들이 자연스럽게 주위에 머물며 카엘을 도와주는 중이었다.
한편 카엘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데 그냥 넘기려다가 문득 한 가지 더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쫙 돋았다.
‘분명 방금 전음도 우리나라 말로 했었는데? 그걸 알아들었단 말이야?’
두 사람은 몰랐지만, 카엘과 카엘의 스승 디오네가 쓰는 조제법은 동방의 기법도 융합한 것.
디오네가 연구할 때 동방의 말을 배웠고, 당연히 카엘도 디오네에게 배웠었다.
“어쨌든, 들으신 대로예요.”
고여가 놀라는 사이, 아파기가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솔국의 해적질은 오래전부터 하던 거라 특별한 문제는 아니에요. 문제는 제국의 마법사들이 도와주면서 해적들의 만행이 심해졌고, 몬스터까지 풀어서 해안가 일대가 혼란스러워졌어요.”
‘몬스터를 부리는 제국의 마법사라, 익숙한 그림인데?’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때였다.
탓.
하늘에서 누군가가 카엘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라 키레아스가 인간 형태로 나타난 거였다.
‘근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라 키레아스는 회색산맥에 갑자기 강력한 몬스터가 출현한 걸 느끼고 둥지로 알아보러 갔었다.
그런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돌아온 게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에이 씨, 내 둥지 안에 있던 몬스터 우리가 완전히 털렸어!”
“털렸다고요?”
누가 감히 드래곤의 둥지를 턴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던 카엘은 내심 찔렸다.
‘아, 나도 털었었지. 혹시 그거랑 관계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어, 마족이 털어 갔다.”
그렇게 말한 라 키레아스는 작은 보석을 하나 카엘에게 손가락으로 튕겨서 날려 보냈다.
받아 보니 아까 만티코어의 이마에 박혀 있던 거랑 같은, 작은 마석이었다.
“꽁꽁 냉동해 둔 걸, 저걸 박아서 풀었지 뭐야.”
“그랬군요. 제가 잡은 만티코어의 이마에도 이 마석이 박혀 있었습니다.”
뜻밖이었다.
이 마석이 드래곤인 라 키레아스가 박아 놓은 게 아니라, 마족이 손댄 증거였다니.
어쨌거나 중요한 건 마석이 박힌 몬스터를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거였다.
내버려 두면 주변의 마력을 계속 흡수해 마석이 커지는 만큼 더욱 강력한 몬스터가 될 테니까.
“혹시 우리에서 탈출한 몬스터가 얼마나 더 남아 있습니까?”
“아, 이제는 없어. 내가 둘은 잡았는데, 나머지 셋은 너희가 처리했더라.”
다행히 다른 두 곳도 무사히 몬스터를 쓰러트린 듯했다.
“그나저나 마족, 이것들을 어떻게 잡아서 복수하지?”
“마족은 라 키레아스 님도 찾기 어렵습니까?”
“그야 마력을 숨기는 데 능하거든. 혹시 어디서 본 적 있어?”
그 말에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거 레오폴드 님이 나한테 한턱내야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라 키레아스에게 말했다.
“제국 수도에 있을 겁니다. 제국 황제가 마족과 접촉했다는 걸 들었거든요.”
“뭐?! 정말이야?”
“네, 제국 마법사를 하나 잡았는데, 그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심해성 내의 수호병에게 진실인지 확인받았는데, 사실이라더군요.”
“그래? 쩝. 제국 수도에 있으면 당장 찾아가기 힘들겠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게 라 키레아스도 당장 제국 황제를 치기는 어려운 듯했다.
하긴 회귀 전에도 왕국을 불태우긴 했어도 제국을 불태운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근데 둥지를 침입한 마족과 같은 마족인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상관없어. 마족은 모두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움직이는 존재니까.”
그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카엘이 회귀하고 이것저것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마족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천 년 전 마왕이 마계에서 이곳으로 쳐들어왔을 때나 마족이 있었지.
마왕이 퇴치당하고 대부분 마족은 마계로 다시 쫓겨 갔다는 전설만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천 년이 지났으니 아는 사람이 드물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 목적이 뭡니까?”
“그건 바로 마왕의 부활이다.”
카엘은 듣자마자 등 뒤로 소름이 쫙 하고 돋는 느낌을 받았다.
마왕이 부활한다면, 말 그대로 회귀 전 겪었던 몬스터 대침공이 세계급으로 이뤄지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카엘의 표정을 읽었는지, 라 키레아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걱정할 거 없다. 마족들이 마왕을 부활시킨다고 난리 친 지도 천 년은 됐으니까. 부활시킬 수 있었으면 진작 시켰겠지.”
“아, 그렇습니까?”
“무엇보다 돌아다니다가 마족이 보이면 무조건 해치워 버리거든. 수백 년 전에도 마족이 모여 있던 성을 하나 불태웠지.”
한마디로 모여서 무언가를 도모하기 전에 드래곤이 나서서 해치웠다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고도 카엘은 그렇게 안심되지 않았다.
‘다음에 한번 조사를 해 봐야겠어. 스승에게도 물어보고.’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라 키레아스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아.”
카엘은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않고 요약해서 말했다.
“타모라국이 몬스터에게 위협받고 있는데, 제국의 마법사들이 뒤에 있는 거 같다는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몬스터들이랑 제국의 마법사들이랑 무슨 상관인데?”
“제국의 마법사들이 몬스터를 부리거든요. 제가 잡았다는 제국의 마법사도 거대 거미 아라흐네를 풀었던 자입니다.”
“음? 몬스터를 부리는 건 마족 놈들이나 하는 건데. 아무래도 연관성이 있는 거 같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타모라국에 가 보려고요.”
그 말에 감히 드래곤과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잠자코 있던 아파기, 고여 자매가 놀라며 감격했다.
“어,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카엘이 타모라국에 가기로 한 건 둘의 감사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가서 라 키레아스 님의 약도 만들고, 겸사겸사 제국의 마법사들도 조사해 보죠.”
“엇, 정말이야?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나도 같이 간다!”
그 말에 카엘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같이 간다고 할 줄 알았어.’
타모라국의 지금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는 알 수 없지만, 드래곤이 함께 가는 이상, 더는 걱정할 게 없었다.
‘당장 문제는 이 몬스터 토벌전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