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몬스터 토벌전 (2)
가장 빠르게 움직인 건 하늘을 날 수 있는 하피, 쿤이었다.
쿤은 다른 하피들을 이끌고 회색산맥 꼭대기를 향해 날았다.
그들의 안내를 맡은 브로칸은 한 하피의 발에 어깨를 붙잡힌 채 날아올랐다.
하늘배를 써도 되겠지만, 만에 하나 공중에서 공격당했을 때 피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직접 들고 날기로 했다.
다행히 브로칸은 신나 했다.
“우와아아아아! 너무 재밌어요! 제가 하늘을 나는 거 같아요!”
그걸 보며 웃던 쿤은 재차 확인했다.
“저 산꼭대기에 몬스터가 있는 거 맞죠?”
“네! 저 위에 오크가 많이 있어요. 킁. 킁. 지금도 냄새가 진동하는 게 오크가 잔뜩 모여 있네요.”
브로칸이 다시 냄새를 맡으면서까지 말하자 만족한 쿤은 저 멀리 회색산맥 꼭대기, 바위산을 바라봤다.
‘마침 잘됐군. 저런 곳에 모여 있다니.’
숲속에서는 비행의 장점을 살리기 힘든데, 저렇게 하늘이 탁 트인 바위산이라면 하피들에게 유리한 전장이었다.
쿤은 단순히 유리한 전장이라서 저곳을 목표로 한 건 아니었다.
‘저기서 오크를 잡으면 내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쿤이 듣기로는 최근까지 회색산맥을 장악하고 있던 몬스터는 바로 오크!
심지어 클리페우스성으로 대규모 침공까지 해 왔다고 했다.
그런 오크를 해치운다?
“당연히 나를 제일 높게 평가하실 거야.”
몸이 달아오른 쿤은 비행 속도를 높였다.
* * *
반면에 심해성의 공주 델라와 타모라국의 아파기 공주는 회색산맥 아래에서부터 출발했다.
천천히 산을 타고 올라가는데, 이내 갈림길이 나타났다.
아파기 공주 쪽 안내를 맡은 옥스가 설명했다.
“왼쪽은 본래 놀의 영역이고, 오른쪽은 오크의 영역입니다. 드래곤 둥지에서 나온 몬스터 때문에 지금 상황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만.”
그 이야기를 들은 아파기 공주의 시녀가 수호병에게 물었다.
“아파기 공주님이 오른쪽으로 가고 싶다는데 어떠십니까?”
‘잉? 공주가 따로 말한 거 같진 않은데?’
-잠시만 기다려라.
옥스는 이상하게 여겼지만, 수호병은 별 상관 없다는 듯 델라 공주에게 가더니 이내 돌아와 대답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그렇게 말한 시녀는 앞장서서 오른쪽 길로 향했다.
-…….
수호병은 그런 시녀를 물끄러미 보더니 몸을 돌렸다.
현재 델라는 뒤편에서 자신의 안내를 맡은 노아나를 비롯해 엘프 자매들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그렇게 카엘 님을 만났다고. 알게 된 지 꽤 됐겠네. 그래서 카엘 님이 뭘 좋아하셔? 선물로 뭐를 드리면 기뻐할까?”
“아, 약을 만드시다 보니 아무래도 특이한 약재를 좋아하시죠. 특히 구하기 힘든 약재를 얻었을 때는 아주 기뻐하세요.”
“오옷. 좋아! 좋아! 술은 좋아하셔? 주량은?”
“…별로, 주량은 세.”
“흐음, 그래? 술로 공략은 못 하겠는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린 델라는 히죽 웃었다.
“그래도 술을 잘 마시면서도 안 즐기는 건 더 마음에 드는데?”
“왜 그러세요?”
“그럼 안 취할 거 아니야? 우리 아버지는 심장이 안 좋아서 술 좀 그만 마시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너무 마시거든. 아픈데도 너무 마셔.”
“그래도 카엘 님이 치료해 주셨다고 들었는데요.”
“덕분에 매일 마음 놓고 들이켠다니까. 저러다가 다시 탈 나는 거 아닌가 걱정돼.”
“아……. 정말 걱정되시겠어요.”
“아프면 또 카엘 님이 와서 치료해 줄 테니까, 얼굴 볼 기회가 생기는 건 좋지만.”
“델라 님도 참.”
델라의 너스레에 모르타가 웃었다.
아파기 공주가 제안하고, 쿤 공주도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끼었지만. 몬스터를 잡는 데 크게 관심은 없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카엘 님의 측근과 친하게 지내면서 정보를 얻는 게 낫지.’
마침 엘프들은 제국에서 탈출할 때 심해성 어인들의 도움을 받았다니 아무래도 친절하게 알려 줄 거라 믿었다.
엘프 자매들도 개의치 않았다.
델라의 목적이 어떻든 카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몬스터를 토벌하러 가는데도 델라 공주나 엘프 자매들 모두 별다른 긴장감이 없었다.
델라 공주는 따로 싸우는 법을 배운 건 아니었지만, 해룡의 후예인 만큼 신체 능력만으로도 강했고,
정령을 다루는 엘프들도 소드 마스터급이 아닌 이상 상대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소드 마스터급으로 강하다는 수호병을 생각하면 어떤 몬스터가 나타나도 걱정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막강한 전력이 이야기꽃을 피우며 놀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 * *
“음?”
아파기 공주 일행을 안내하던 옥스가 멈칫했다.
그걸 본 시녀가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무리 살펴도 오크들의 흔적이 거의 안 보여서요.”
아무리 연이은 패배로 타격이 컸다고 해도 이 일대를 주름잡던 오크의 흔적조차 볼 수 없다니.
그걸 의미하는 건 다 하나.
오크를 몰아낼 만큼 강력한 몬스터들이 이곳을 장악한 거였다.
그 말에 시녀도 미간을 모은 채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오크가 없다니 아쉽군요.”
이곳으로 오자고 한 시녀의 속셈도 하피 쿤 공주와 마찬가지였다.
가장 세력이 크고, 최근 클리페우스성을 공격한 오크를 해치우는 게 이 토벌전에서 이기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마치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놓쳐 안타깝다는 시녀의 반응에 옥스가 답답한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니 더 주의해야지요. 그 오크들을 몰아냈을 정도로 더 강한 녀석들이 여기 있을지도 모릅니다.”
“몬스터가 있긴 한데 강하진 않을 거 같은데요. 그냥 오크들이 여기를 버리고 떠난 게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옥스와 시녀의 말은 절반씩만 맞았다.
고블린과 유사한 체형에 들개의 얼굴을 한 몬스터, 코볼트들이 잔뜩 나타나 그들을 둘러싼 거였다.
얼마나 빼곡하게 있는지 그 숫자가 수백 마리는 족히 넘어 보였다.
시녀가 파악한 대로 이 코볼트들은 하나하나는 약했지만.
옥스가 걱정했던 대로 그 숫자는 세력이 약해진 오크들을 몰아낼 정도로 많았다.
실제로 이 코볼트들은 드래곤 둥지 내에서도 가장 큰 세력으로, 미궁 깊숙한 곳에서 자기들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드래곤 피어에 굴복하긴 했으나 직접 저주를 받진 않았다.
코볼트들의 번식력은 고블린과 동급. 클리페우스성의 레인저들이 치를 떠는 놀보다 뛰어났다.
드래곤의 저주를 받은 선조들이 번식해 나은 자식 중 일부는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런 후예가 해를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거였다.
그 탓에 드래곤의 권위를 내세운 오크 로드 트팍이 클리페우스성 공격을 지시했을 때도 대부분이 지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몬스터들이 눈이 뒤집혀 성으로 달려갈 때, 이들은 곧바로 비어 있는 회색산맥을 차지한 거였다.
오크들은 트팍이 죽은 뒤, 뒤늦게 이곳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자리 잡은 코볼트들을 이겨 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내쫓겼다.
위기감을 느낀 옥스가 허리춤에 맨 신호탄에 손을 댔다.
기존의 신호 연기와 달리, 곧바로 위험을 알릴 수 있도록 드워프들이 만들어 준 거였다.
“이거 너무 많은데요? 틈을 봐서 구조 요청을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시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았다.
그러자 검에 무형의 기운이 맴돌았다.
그걸 본 옥스가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시녀가 소드 엑스퍼트?!’
* * *
한편 카엘의 지원조는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한 3개 조에서 지원 요청이 오면 바로 움직이기 위해 회색산맥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끔 몬스터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하나같이 덤비기는커녕 도망치기 바빴다.
지원조에 드래곤 라 키레아스가 끼어 있어서였다.
덕분에 지체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이래서야 몬스터를 해치우긴 힘들 거 같지만, 이쪽은 위험이 생긴 쪽을 지원해 주는 게 목표니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문제점을 떠올리곤 라 키레아스에게 물었다.
“라 키레아스님, 근데 어느 쪽이 이겼다고 뭐로 심판하실 건가요?”
각자 상대하는 몬스터도 제각각일 텐데, 무얼 가지고 승리를 가릴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숫자로 가린다면 고블린을 상대하는 쪽이 유리할 테고, 가장 강한 몬스터를 해치운 거로 정한다고 해도, 그 강한 정도를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그때 라 키레아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야. 보면 다 알거든.”
하긴 드래곤이 마음대로 정한다고 해서 누가 거기에 토 달겠는가?
뭐라고 결정 내리든 어차피 카엘이 중간에서 잘 달래서 없던 일로 할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됐으면 좋겠네요.”
“괜찮아. 지금도 잘 싸우고 있는 거 같네.”
심지어 이 멀리에서도 실제로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파악도 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원래 부하라서 인지 마법으로 감지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카엘도 그리 걱정하진 않았다.
드래곤 둥지를 침입할 때 들었던 대로 미궁을 지키던 우두머리 몬스터가 미노타우로스 정도라면, 공주들의 전력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어서였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미노타우로스가 소드 엑스퍼트 정도로 강했으니까.
하피 쿤이라면 1대1로 상대할 수 있고, 다른 하피까지 가세하면 승리하는 데 문제없어 보였다.
델라 쪽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델라 자신도 해룡 제피슈의 후예일 뿐만 아니라, 소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전력인 수호병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타모라의 아파기 공주 쪽인가? 그쪽도 제법 강해 보였지.’
실제로 정확한 전력은 알 수 없지만, 무관들과 시녀 모두 소드 엑스퍼트 정도의 실력자로 짐작됐다.
티겔 공작이 몬스터 토벌을 외부인에게 허락한 것도 다들 문제없이 돌아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 판단해서기도 했다.
그때였다.
“음, 이 녀석들은 좀 강할 텐데.”
라 키레아스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네?”
뜬금없는 소리에 카엘이 쳐다보니 라 키레아스가 멋쩍어하며 설명했다.
“아, 공주들 앞에 내가 미궁을 맡기려고 했던 녀석들이 하나둘 나타나서 말이야. 어떻게 나왔지?”
‘미궁의 주인 후보들인가.’
하지만 이미 그런 상황도 예상은 했었다. 여럿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그래도 미노타우로스 정도면 다 싸워 볼 만할 텐데요.”
“미노타우로스? 걔는 말을 잘 들어서 놔둔 거지 미궁을 맡기려고 했던 녀석 중에서는 최약체인걸?”
“최약체요?! 그러면…….”
“소드 마스터는 돼야 상대할 만할 거야.”
라 키레아스의 말에 카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피아! 하피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쫓아가 도와줘!”
“네, 알겠습니다!”
뒤에서 잠자코 있던 소피아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을 폭발시켜 뛰쳐나갔다.
“깜짝이야!”
라 키레아스가 드래곤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요청도 안 했는데 지원하러 갈 필요가 있나?”
“그러다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저희 가문의 체면이 떨어지게 돼서요.”
“몬스터에게 다친 쪽의 체면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들의 관습은 참 이상하단 말이야.”
카엘은 무시하고 검을 쥐고 방향을 가늠했다.
“…저도 가 보겠습니다.”
“어디로 가게?”
“아파기 공주 쪽으로 갑니다.”
여차하면 하늘로 도망칠 수 있는 쿤과 수호병과 함께 있는 델라와 달리 아무래도 실력이 미지수라서 제일 걱정이 됐다.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래 잘 갔다 와. 난 저것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둥지로 가 봐야겠다.”
라 키레아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음. 나도 어서 도와주러 가야겠네.”
카엘은 함께 온 레인저, 엘프, 라이칸스로프들에게 미리 지시한 대로 움직이라고 말한 뒤 아파기 공주가 있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 * *
오크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오크 로드였던 트팍의 주도로 클리페우스성을 몇 번이나 침공했지만, 별다른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사상자만 잔뜩 냈다.
그런 와중에 드래곤 둥지에 있던 몬스터까지 회색산맥에 잔뜩 들어와 버린 데다가, 원래 영역은 코볼트 들에게 뺏겨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오크 제사장이 치성을 드리던 바위산 꼭대기 쪽에 모여 있었다.
다들 어찌나 지쳤는지 새로운 오크 로드를 뽑기 위한 싸움도 미룰 정도였다.
그런 그들을 해치우기 위해 나타난 하피들은 재앙이었다.
손이 닿지도 않은 하늘 위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만 해도 아주 고통스러운데 기다란 창을 다리로 잡고 찌르니 손쓸 도리가 없었다.
원거리 공격이라고 해 봐야 활도 없이 손도끼를 투척하는 게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요리조리 피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하나둘 쓰러지는 순간.
등 뒤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끼에에에에엑!”
무슨 소리지 하고 등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오크들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하늘에 드래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형이 드래곤과 유사할 뿐, 드래곤은 아니었다.
드래곤보다 훨씬 작고, 짐승의 지능을 지능을 가진, 와이번이었다.
드래곤 브레스도 못 쓰고, 지능이 달리는 탓에 마법도 못 썼으나 아주 강력하고 흉폭한 몬스터였다.
‘앞에는 하피. 뒤에는 드래곤이라니.’
오크들은 절망했다.
그런데 눈이 반쯤 감겨 있는 게 아무래도 자다가 하피들의 음파 공격에 깬 게 틀림없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다행히 와이번도 하피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낸 걸 아는지 하피들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