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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127화 (127/234)

127화 7공주 (1)

클리페우스성을 구경하던 라 키레아스는 금세 지겨워졌는지 카엘을 찾아왔다.

카엘은 그대로 라 키레아스를 연구실로 데려갔다.

“오, 여기가 연구실이야?”

그러면서 연구실을 둘러본 라 키레아스가 대뜸 감상을 말했다.

“생각보다 작은데?”

그야 드래곤 둥지보다는 작겠지.

“그래도 필요한 건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몇 가지 더 챙겨 줄까 했지.”

카엘은 순간 귀가 쫑긋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긴, 필요한 게 있으면 내 둥지에서 훔쳐 갔겠지. 현자의 돌을 훔쳐 간 것처럼.”

“…….”

“야. 얼굴 풀어, 농담이니까. 돌려 달라고 안 할게.”

라 키레아스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사실 현자의 돌은 디오네가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 말했다가는 괜히 엘프들에게 화풀이할까 걱정돼서 말았다.

‘그래도 의외긴 하단 말이야.’

드래곤이 카엘의 옆에 붙어 있기로 한 이상 누가 말릴 수 있겠느냐만.

둥지에 감금당해 일하던 드워프는 물론이고, 둥지를 짓는다고 세계수까지 깔아뭉갠 엘프들에게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드워프와 엘프들은 겉으로 복수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진 못하더라도, 피하는 모습도 안 보이는 게 아닌가?

왜 그런지 물어봤더니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드래곤은 살아 있는 자연 재난이나 마찬가지니 거기에 원망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거였다.

운 나쁘게 자연재해를 입었다고 여기고 넘기는 게 낫다고 했다.

심지어.

“오히려 너처럼 드래곤에 대항해 싸우려는 쪽이 특이한 거지.”

스승인 엘프 디오네에게는 그런 소리마저 들었다.

‘잠깐, 드래곤이 살아 있는 재난이라면 난 재난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란 소리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울했다.

“뭐야? 왜 죽을상이야? 농담이라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얼른 고쳐서 내보내야지.

“여기 앉으시죠. 상태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응.”

라 키레아스는 웃음기를 거두고 순순히 앉았다.

“인간의 형태로도 체온이 높아지는 증상은 계속 심해진다고 했죠.”

“그래, 나중에는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질 정도야. 그때는 너무 심심하단 말이지.”

“인간이 그렇게 재밌으면 굳이 불태우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가만히 놔뒀다가는 나한테 대들 테니까. 장난감은 장난감일 때나 재밌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는 라 키레아스는 섬뜩했다.

역시 앞에서 웃는다고 쉽게 대하면 안 된단 말이지.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탈피를 하신다고요.”

“시원한 곳에서 몸을 식히고 있는 건 괜찮은데, 그러면 껍질이 굳거든. 더 강해지긴 하는데 너무 힘들어.”

카엘은 그 말을 듣고는 라 키레아스의 머리와 몸, 팔다리를 빠짐없이 만져 보면서 차분히 진찰했다.

“음, 예상한 대로 체질이 문제네요.”

“내가 말했잖아. 그래서 그 체질을 고칠 수는 있겠어?”

“이건 고친다기보다는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거 같네요. 꾸준히 약을 드시며 관리하시면 현 상태로 유지가 가능할 겁니다.”

“음, 귀찮지만 하는 수 없겠네.”

라 키레아스는 이미 예상한 바인 듯 순순히 받아들였다.

“다만 워낙 극단적인 체질이라 대륙 내의 재료로는 힘듭니다.”

“그건 전에도 들었어. 만들 수 있는 게 중요하지. 재료야 천천히 구하면 돼.”

“네, 일단 약 말고도 음식과 과일을 먹는 거로 미약하지만 증상을 완화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효과적인 걸 써 드릴게요.”

“어, 정말?”

“네, 그러면 약을 구하기 전에도 체질 때문에 괴로운 건 훨씬 덜할 겁니다.”

“꺅! 고마워.”

라 키레아스는 정말 기쁜지 카엘을 꽉 껴안았다.

“컥!”

어찌나 힘이 센지 카엘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으스러져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든 말든 라 키레아스는 여기에 쓰여 있는 음식과 과일을 모조리 먹을 거라며 카엘이 써 준 쪽지를 들고 나갔다.

“휴. 일단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카엘은 그걸 보며 안도했지만 아직 카엘을 괴롭히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 * *

“카엘, 어떻게 하기로 했어?”

셋째 형, 막시마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뭘 말하는지는 굳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타국(他國)에서 온 공주와 혼인을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거였다.

타모라 왕국에서 온 공주가 브레프니 왕국에 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대륙을 떠들썩하게 했고.

심지어 카엘을 부마로 삼기 위해 클리페우스성으로 향한다는 말까지 나오자 대륙이 뒤집혔다.

당연히 클리페우스성까지 그 이야기가 닿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부모님은 곧장 카엘을 불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셔도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그렇게 둘러대고 풀려나왔건만 볼 때마다 어떠냐고 질문을 받고 있었다.

사실 보통 귀족 집안의 막내아들이 저런 제안을 받으면 이렇게 묻지도 않고 바로 혼인시켜 버린다.

대부분 아무것도 물려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부마가 되면 오히려 예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엘은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더라도 이미 어마어마한 황금과 항구도시 아말레이라는 영지를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클리페우스성에 남아 있는 게 특이할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몬스터 대침공을 막기 위해서 있는 거지만.’

지금은 오크 군단부터 드래곤마저 어떻게든 막아 내서 회귀 전 최대 위기를 넘긴 상황. 언제든 떠나도 괜찮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떠나기에는 이곳에 엘프와 드워프, 라이칸스로프까지 자신을 믿고 자리 잡은 이종족이 많지만.

“그나저나 기대되지 않아? 타모라국에는 신비로운 미녀가 많다잖아.”

“그야 거기는 하얀 피부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이가 많은데 우리가 보기에는 다 생경해서 그렇겠지요.”

기대하는 막시마의 모습을 보며 카엘이 대뜸 말했다.

“정 그러면 형님이 결혼하시든가요.”

“나? 나를 선택해 주면야 당연히 하지. 하지만 그쪽에서 너를 지목한 걸 어쩌겠어?”

“나중에 예쁘게 단장하고 나오면 또 모를 일이죠.”

“어, 정말 그럴까? 그때 무슨 옷을 입지?”

그러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아무래도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반면에 큰형 브란은 이 상황을 조금 경계했다.

“그런데 왜 킹스콧으로 오라고 하지 않고 여기로 온다고 하지?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몰라.”

확실히 아무리 카엘이 이곳에서 몬스터 대침공을 막아 내고, 제국에서 언데드 몬스터를 퇴치한 일로 영웅으로 유명해졌다고 해도, 만나 보지도 않고 부마로 지목해서 데려간다는 건 의도가 있어 보였다.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다고 그러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나라의 풍습일 수도 있지.”

아무래도 소싯적에 여러 나라를 여행했던 티겔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가족 중에서 제일 심경이 복잡한 이는 어머니 마리안이었다.

“타모라국인가. 거기가 따뜻하고 그렇게 살기 좋다면서요.”

“그렇다고 하오. 나도 가 본 적은 없어 여행 중에 들은 거지만 서로 돕고 살아서 굶어 죽는 이도, 도둑도 없어 집에 대문이 없을 정도라니.”

“그런 나라에 가면 참 좋긴 하겠네요. 그래도 그 먼 나라로 가면 얼굴 보기가 힘들 텐데…….”

아무래도 자식이 좋은 곳으로 가서 잘되는 것도 좋지만 먼 타국으로 장가보내면 다시 만나기 어려워지는 게 걱정된 거였다.

장성하면 독립시키는 게 당연했지만 카엘이 어린 시절부터 워낙에 아파 끼고 살다 보니 애틋한 마음이 안 들 수 없었다.

‘나도 딱히 그 나라로 갈 생각은 없는데.’

당장 거절하지 않는 건 이곳까지 오는 공주를 봐서였다.

괜히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가는 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요즘처럼 브레프니 왕실에서 못마땅해하는 상황에서는 왕실만 쏙 빠지고, 타모라국와 클리페우스성만이 싸우게 되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딱히 무섭진 않았지만 괜히 싸울 이유도 없지.’

카엘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지금은 회색산맥 토벌부터 해야죠.”

회색산맥을 원래 차지하던 오크와 놀은 몇 번의 침공 실패로 그 숫자가 매우 줄었다.

하지만 그 숫자를 드래곤 둥지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채워 버린 거였다.

현재는 몬스터들끼리 영역 다툼 하며 싸우느라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

그 상황이 당장에는 손 놓고 있어도 될 정도로 편하지만 이전의 놀과 오크처럼 세력이 재편되면서 커져 버리면 골치 아팠다.

그러기 전에 퇴치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일찍 출발해서 그 공주가 오기 전에 정리해 두는 게 낫겠구나.”

티겔도 찬성했다.

아무리 몬스터가 들끓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라도 해도.

손님이 와 있을 때 몬스터가 쳐들어오면 아무래도 분위기가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듀리프 후작 때는 티겔이 일부러 오크들을 도발해 공격하게 만들긴 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 알렸다.

“레오폴드 저하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1왕자가? 갑자기?”

* * *

카엘이 나가서 레오폴드 왕자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레오폴드가 대뜸 물었다.

“타모라 왕국의 공주 소식은 들었지? 어떻게 하기로 했나?”

“천천히 결정할 생각입니다. 아직 공주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래, 그래야지.”

레오폴드가 노골적으로 안도하는 모습에 카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도 않고 이리 급하게 오셨습니까?”

“그래, 돌려 말하지 않겠네. 실은 브레프니 왕실에서도 자네와 혼인을 추진하려 한다네.”

“저랑요?”

“그래, 공주가 하나 있는 건 알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는가?”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국왕 폐하께서 그러더군. 자네가 타모라국의 부마가 돼서 브레프니 왕국 안팎으로 힘을 쓰는 걸 견제하느라 신경 쓰는 것보다 아예 왕족으로 만들어서 흡수하는 게 낫다고 말이야.”

‘그렇게 의심하고 방해할 때는 언제고.’

카엘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본 레오폴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봐. 이 기회에 우리 사이도 돈독해질 테고, 결국 중요한 건 제국을 무너트리는 거니까.”

하긴, 레오폴드 왕자로서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왕실이 경계할 만큼 강력한 전력을 가진 카엘이 만에 하나 타모라국으로 홀랑 가 버린다면.

제국을 상대하기 아주 힘들 테니까.

‘괜한 걱정이지만.’

제국이 브레프니 왕국 내에서 암약하며 소란을 일으키는 걸 고려하면 한번 본때를 보여 주긴 해야 했다.

게다가 제국의 마법사가 했던 말처럼 황제가 마족과 계약한 거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레비아탄을 풀었던 것처럼 또 강력한 몬스터를 대륙에 풀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도 자네를 믿긴 하네만…….”

레오폴드가 말꼬리를 흐리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카엘이 빤히 쳐다보자 레오폴드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자네도 남자니 아무래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서 말이지.”

“……?”

“실은 타모라국에서 왔다는 공주가 절세 미녀거든. 생전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나도 처음 봤네.”

“그런 소문은 못 들었습니다만.”

레오폴드가 순간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가 카엘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멋쩍게 웃었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다가 브레프니 왕가에 인사할 때만 살짝 얼굴을 드러냈거든.”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실제로 그 편이 극적인 효과도 날 테니 괜찮은 전략이었다.

“그런 미인을 보냈다는 건 타무라 왕국에서도 장난으로 온 건 아니라는 의미니 조심해야 해.”

‘여기까지 오는 것부터가 장난으로는 안 되겠지만.’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경비병이 다급하게 달려가는 걸 보고 붙잡아 물으니 마침 잘됐다며 카엘에게 보고했다.

“하피들이 찾아와 입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 마중 나가야겠군.”

“하피들?”

의아해하는 레오폴드에게 카엘은 간단히 설명했다.

“네, 제국령 오를란도산맥에 하피들이 자리를 잡고 왕국을 세웠는데요, 최근에 인연을 맺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아서요. 이번에 드래곤 둥지에 잡혀 있다가 나온 하피들을 데려가라고 불렀는데 지금 온 모양입니다.”

“호오, 그렇군. 재미난 이야기가 있을 거 같은데.”

“당연히 해 드려야죠.”

자세한 내막은 말하기 어렵지만 적당히 안줏거리가 될 정도로는 충분히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러고 성문 밖으로 나가 보니 뜻밖에도 하피 왕국의 대표로 국왕의 딸인 쿤이 온 게 아닌가?

‘그토록 아끼더니 이 먼 곳까지 보내다니.’

그러다 문득 국왕의 딸이면 쿤도 공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이, 설마? 국왕이 그렇게 딸을 아끼는 눈치였는데…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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