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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121화 (121/234)

121화 드래곤 라 키레아스(1)

현재 회색산맥은 대격변 중이었다.

얼마 전 오크들은 함께 회색산맥을 양분하던 놀 부족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회색산맥 오크의 숙원이었던 클리페우스성을 함락하기 위해 대규모 침공을 시도했다.

정복해 노예로 삼은 놀을 모두 동원하고, 오크 로드는 그동안 잠재워 뒀던 역전의 전사들을 깨워 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나중에는 사이가 나쁜 오크 제사장과 그 추종자까지 동원했다.

그렇게 총력전을 펼쳤으나 오크의 대침공은 실패했다.

오크 로드는 오른팔을 잃고 도망쳤고, 오크 제사장은 전사했다.

그걸 모르는 오크들은 끝까지 성을 공격했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다.

정확한 집계는 할 수 없지만, 클리페우스성 측은 오크 전체 병력의 1할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뒤로 살아남은 오크끼리 치열하게 싸워 댔다.

새로운 오크 로드를 뽑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티겔 브리운이 도망치는 오크 로드를 보며 했던 말처럼.

오른팔을 잃은 오크 로드가 다시 오크들을 추슬러 세력을 다시 결집하려고 했다.

한쪽 팔을 잃었지만, 마석의 힘 덕에 여전히 다른 오크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대패에도 다른 오크들은 쉽사리 반발하지 못했다.

오크 로드 자신도 명예롭게 싸우다가 오른팔을 잃은 희생을 치렀다고 봐서였다.

문제는 몇몇 오크가 오크 로드가 도망치는 모습을 증언하고부터 벌어졌다.

오크 로드는 처음에는 부인했지만, 증언하는 오크가 늘어나고 그가 버리고 온 창을 들고 온 오크 워리어까지 나타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크들은 곧바로 오크 로드를 내쫓으려 했다.

오크 로드는 힘으로 버텼지만, 전사의 쉼터에서 깨어났을 정도로 강력한 오크 워리어들이 합심하자 버티지 못했다.

“쯧, 그래, 너희들끼리 어디 잘해 봐라. 나처럼 잘할 수 있나!”

오크 로드는 오크 무리에서 쫓겨나면서 저주를 했다.

그러나 오크 로드는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했다.

놀들에게 쫓기기 시작한 거였다.

대침공 때 도망친 놀들은 다시 부족을 일으켰는데, 오크 로드가 무리에서 쫓겨났다는 말에 복수하겠다고 나선 거였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크 로드는 자신이 금지로 지정한 드래곤 둥지로 향했다.

자포자기한 건 아니었다.

오크 로드에게 남은 유일한 기댈 곳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 라 키레아스 님이라면 모든 것을 불태워 내 복수를 해 주실 거야.’

* * *

“후. 오랜만이군.”

이젠 오크 로드가 아닌, 외팔이 오크에 불과한 트팍이 드래곤 둥지로 내려가는 미궁을 거닐며 감회에 사로잡혔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기억하는 오크가 없지만, 과거 트팍이 마석을 얻은 뒤 강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기존의 오크 로드를 꺾고 새로이 오크 로드가 된 트팍은 회색산맥을 장악하기 위해 곳곳의 몬스터를 공격해 몰아내는 데 골몰했다.

그러다 겁도 없이 드래곤 둥지에 발을 들이게 된 거였다.

‘처음에는 드래곤의 둥지인지도 몰랐지만.’

도망친 몬스터를 쫓아왔더니 어느새 미궁 안이었다.

그 안에서 한참을 헤매다 마주친 건 마계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케르베로스였다.

트팍은 죽음을 불사한 혈투 끝에 케르베로스의 목 두 개를 베고서야 겨우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

‘이 이후에는 계속 미노타우로스가 미궁을 지키고 있다 들었는데 보이질 않는군.’

가끔 마주치는 몬스터도 트팍을 보고 도망칠 뿐이었다.

어쨌든 케르베로스를 해치우고 기세등등해진 트팍에게 한 인간이 나타났다.

“호, 누가 우리 귀염둥이를 죽였나 해서 봤더니 더러운 오크의 짓이었구나.”

나타난 인간은 바닥까지 끌리는 길고 붉은 생머리를 가진 가녀린 여인이었다.

여인은 불쾌한 듯 미간을 모으며 이쪽을 바라봤다. 정작 여인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더러운 오크?! 가만두지……. 음?!”

분노한 트팍이 달려들어 여인을 찢어발기려 했지만, 밧줄에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인을 다시 본 트팍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라고 말이다.

한편 트팍을 살펴보던 여인은 갑자기 미소를 띠었다.

“너 오크치고는 제법 강하다 했더니, 재미난 걸 가지고 있구나.”

그 순간.

트팍이 품속에 고이 간직해 뒀던 신비로운 돌이 날아가 여인의 손에 잡혔다.

그걸 본 트팍이 깜짝 놀랐다.

‘아니, 저걸 어떻게 아는 거지?’

원래 트팍은 오크답지 않게 왜소했다.

다른 오크들에게 무시당하며 살던 중, 저 신비로운 돌을 얻은 뒤에 체격이 커지고 힘도 세진 거였다.

무리하면 머리가 멍해지면서 의식을 잃을 거 같긴 해도, 아직은 별문제 없었다.

그런데 저걸 뺏긴다면, 오크 로드의 자리를 잃는 건 당연하고 원래의 별 볼 일 없는 오크 트팍으로 되돌아갈 게 틀림없었다.

트팍은 온 힘을 다해 압박을 이겨 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 돌려 줘.”

“돌려받고 싶어? 넌 네가 뭘 가졌는지 모르는구나. 이건 마석이란다.”

“마석?!”

“마계의 사악한 힘이 응축된 돌이지. 이 힘이 널 강하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결국에는 널 집어삼킬 거야.”

여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석을 손가락 끝으로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더니 트팍을 다시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되면 너희 오크가 그토록 갈망하는 전사의 천국에 못 갈 텐데?”

“…사, 상관없다. 약해지는 것보다 나으니까.”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돌려주마.”

여인이 손가락을 튕기며 놓자 마석은 다시 날아가 원래대로 트팍의 품속에 들어갔다.

동시에 트팍을 옭아매던 힘도 풀렸다.

자유를 찾은 트팍은 공격하거나 도망치는 대신, 엎드려 머리를 박고 부탁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럼 뭐든지 하겠습니다!”

오크가 무릎을 꿇고 빌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왜소한 탓에 오크들 사이에서 빌어먹는 게 익숙했던 트팍에게는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뽐낸다면 그만한 힘을 내게 줄지도 몰라.’

다행히 여인은 흥미를 보였다.

“강해지고 싶어? 도와줘 볼까?”

“가, 감사합니다!”

쿵! 쿵!

트팍은 지면에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박았다.

“도와주면 나한테는 뭐 해 줄 거야?”

“…….”

여인의 말에 트팍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저런 강한 존재에게 자신이 해 줄 게 딱히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설마 맨입으로 힘만 받아먹을 작정이었어?”

“주, 주인님으로 모시고 무한한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주인님이라…….”

즉흥적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여인의 마음에 든 듯했다.

다만,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트팍은 곧바로 후회했다.

“그럼 저 앞에 있는 인간들이 만든 장벽을 무너트려 줄래? 전부터 거슬렸거든.”

‘클리페우스성의 장벽을 무너트리라고?! ’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던 저 장벽을 넘은 오크는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통곡의 벽이나 다름없는 곳을 무너트리라니.

“저, 저로서는 무립니다. 무엇보다 저기는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인간이 지키는데, 어떤 오크의 도끼도 그 검을 막아 내지 못합니다.”

“아, 소드 마스터?”

여인은 알겠다는 듯 허공을 휘젓더니 창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거면 투기를 일으키지 않고도 소드 마스터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거다.”

“가, 감사합니다.”

트팍은 고개를 숙여 창을 건네받았다.

정말로 창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회색산맥 동북쪽에 빙한목의 뿌리 끝이 닿는 곳에 동굴이 있어. 거기에 강한 오크를 모아 뒀다가 한꺼번에 꺼내면 해볼 만할 거야.”

“빙한목의 뿌리…….”

“알았지? 저길 무너트리고 대륙에 오크의 왕국을 세워 봐. 그러면 내가 대륙을 모조리 불태울 때도 거기만은 남겨 줄 테니까.”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눈앞의 여인은 그럴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네가 실패해도 자고 일어나서 내가 무너트리면 되겠지만.”

‘아, 눈을 감고 있는 게 자고 있어서인가?’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다.

“근데 언제까지 주무시는 겁니까?”

“아마 수백 년은 자겠지?”

“수백 년…….”

“너도 마석을 가지고 있는 한 그때까지 살아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건 뜻밖이었다.

‘그러면 수백 년 동안 준비해도 된단 말인가?’

아니, 오히려 여인이 깨는 수백 년 뒤에 하는 게 나았다.

기껏 무너트렸다가 인간들이 반격해 와 다시 뺏길지도 모르니까.

“됐지? 그럼 난 또 자러 간다.”

“주, 주인님, 한 가지만 더 알려 주십시오.”

“또 왜?”

“주인으로 모시는데 이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말 안 했나? 내 이름은 라 키레아스야. 드래곤이지.”

‘드래곤?! 드래곤이라니!’

트팍은 여인의 존재감에서 벗어나고도 공손하게 힘을 달라 청했던 자신이 대견했다.

그리고 수백 년 뒤.

클리페우스성의 장벽을 무너트리려는 트팍의 시도는 철저히 실패했다.

창도 다른 오크에게 뺏겨 버리고, 모아 놓은 병력도 대부분 잃어버렸다.

심지어 이제 오크 로드도 아니었다.

드래곤과의 약속을 못 지키게 된 이상,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도망칠 생각도 못 했다. 분명히 쫓아와 자신을 죽일 테니까.

‘하지만 죽어도 그냥은 못 죽지.’

트팍은 드래곤 라 키레아스에게 이를 생각이었다.

인간의 우두머리이자 자신의 오른팔을 자른 원수, 카엘.

카엘이라는 인간이 주인님의 유흥을 망쳤다고 이르면 분명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고 한참을 들어갔을 때였다.

어느 순간 주변의 풍경이 바뀌더니 눈앞에 여인이 나타났다.

예전에 봤던 모습과 똑같이 붉은 머리 여인의 모습을 한 드래곤 라 키레아스였다.

다른 점은 딱 하나, 한쪽 눈만 뜬 채라는 거였다.

트팍은 곧바로 엎드려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주인님.”

“오랜만? 하긴. 그래,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주인님께 바칠 유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알고 있다.”

눈을 반쯤 뜨고 있어서인가, 라 키레아스는 그간의 일을 아는 듯했다.

그러면 이야기 하기가 편하지.

“인간들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드워프와 엘프, 라이칸스로프까지 뭉쳐 살면서 대항했습니다! 심지어 네크로맨서까지 이용했습니다!”

“…알고 있다. 실패했으나 나름대로 수고는 한 거 같으니, 내 너를 벌하지 않으마.”

“가, 감사합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쉽게 용서받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트팍이 말했다.

“카엘이라는 인간이 우두머리 같습니다. 그자를 반드시 죽여 주십시오.”

하지만 라 키레아스는 찬바람이 씽씽 부는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명령하는 모습이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구나.”

“죄, 죄송합니다.”

트팍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머리를 박았다.

다행히 라 키레아스도 공감했다.

“하지만 그 카엘이라는 인간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우환이 될 거 같으니 제거해 두는 게 좋겠지.”

“마, 맞습니다.”

“곧 벌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라 키레아스는 그 말과 동시에 사라졌다.

“…….”

그렇게 혼자 남게 된 트팍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문득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설마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 놓고 또 몇백 년은 기다리게 하는 건 아니겠지?!’

* * *

한편 카엘은 제국에서 클리페우스성으로 빠르게 귀환하는 중이었다.

‘오크 로드가 드래곤 둥지로 들어갔다니!’

클리페우스성의 연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움직였다.

오크의 대침공을 막아 내고, 오크들을 대부분 소탕했을 때 클리페우스성의 모두가 환호했다.

그때도 카엘은 회색산맥의 몬스터 감시를 늦추지 않을 걸 제안했다.

추후 회색산맥에서 몬스터를 완전히 토벌하려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에 티겔 공작은 흔쾌히 수락했다.

안 그래도 카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오크의 대침공에 자칫 성이 함락될 뻔한 거였다.

이야기를 진지하게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카엘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드래곤의 둥지도 감시시켰다.

당장 드래곤을 깨우려는 제국의 음모를 막았지만, 또 드래곤을 깨우려 할지도 몰라서였다.

그리고 오크 로드가 거기에 걸린 거였다.

‘설마, 드래곤과 손을 잡은 거였나.’

오크를 대량으로 숨겨 두고 있던 건 어떻게 봐도 마법.

그 정도의 대규모 마법이라면 드래곤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게 논리적이었다.

‘드래곤을 깨우려고 할지도 모르겠군.’

오크 로드의 음모를 짐작했지만, 카엘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빠르지만 잘됐어.’

어차피 드래곤이 깨어나지 않으면 이쪽에서 토벌할 생각도 있었다.

언제까지 머리 위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을 두고 불안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문제는 클리페우스성이 먼저 공격을 받는다는 건 계획에 없단 거였다.

‘계획대로 되려면 드래곤이 공격하기 전에 도착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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