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만들어진 종족들 (5)
“콴 님, 이제 괜찮습니다. 마법사가 사라졌으니 오셔도 됩니다.”
카엘은 저 멀리서 구경하던 콴을 불렀다.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용병들이 항복했다고 해도 카엘을 포함해 넷이서 용병 수백을 통제하긴 어려웠다.
‘차라리 죽이는 게 쉽지.’
콴은 부하에게 이곳 상황에 대해 칸 님께 보고하라고 지시한 뒤, 해안가를 향해 날았다.
콴은 카엘 앞에 착지하자마자 칭찬했다.
“정말 강하시군요. 놀랐습니다.”
카엘의 전투를 두 눈으로 지켜본 입장에서 진심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아닌 거 같아 다소 얕잡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싸우는 모습은 소드 마스터 못지않았다.
‘괜히 저 소드 마스터가 따르는 게 아니었단 말이지.’
“과찬이십니다. 그보다 여기 항복한 인간들 처리를 좀 부탁합니다.”
“네, 일단 묶어서 가둬 두면 되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여러분을 구하고 돕는 처지일 뿐이니까요.”
“이렇게 겸손하실 때가.”
콴은 감탄했지만, 정작 용병들은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했다.
저 인간이라면 자신들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서 노예로 팔더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데, 하피 손에 떨어졌다가는 다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다 포획해 두고 칸 님의 지시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콴은 죽어 있는 켄타우로스에 관심을 가졌다.
“…혹시 이자도 우리 하피처럼 마법사에 의해 만들어진 종족입니까?”
“그렇습니다.”
카엘의 대답에 콴은 복잡한 눈빛으로 켄타우로스를 바라봤다.
같은 처지라 안쓰러운 걸까?
아니면 자신도 저렇게 됐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일까?
어쨌거나 콴은 부하에게 사체를 최대한 정중하게 옮기라 지시를 내렸다.
아무래도 칸에게 보고한 뒤에 제대로 장례를 치러 줄 생각인 듯 보였다.
그럴까 봐 카엘도 최대한 험한 상처를 내지 않도록 신경 쓴 거였다.
카엘은 아조트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아조트 네 덕을 봤네. 고마워.”
-응? 무슨 소리야? 난 이번에 가만히 있었는데. 오늘 보니 실력이 많이 늘었더라.
그 말에 카엘도 놀랐다.
그게 내가 펼친 검술이었다니.
“검술 연습은 딱히 안 했는데.”
-이 몸이 이끌어 준 게 몸에 밴 거 아니겠어?
“그렇게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네.”
-혹시 모르지.
아조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지만, 카엘은 웃어넘겼다.
‘오러도 못 쓰는데 소드 마스터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그때였다.
퍼덕. 퍼덕. 퍼덕.
힘찬 날갯짓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서 하피들이 잔뜩 날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뭐지?”
그 중앙에 유난히 체격이 큰 하피들이 황금배를 메고 날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심지어 하피들은 그 황금배를 카엘의 바로 앞에 내려놓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카엘 님, 모시러 왔습니다.”
* * *
‘고맙다고 대접해 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황금배를 타고 날아가며 카엘은 감탄했다.
수천은 넘는 하피가 좌우에 늘어서서 카엘과 그 일행을 맞이하고 있는 거였다.
“우리의 은인이 오셨다!”
“이번에 쿤 님을 구하고, 인간들을 혼쭐을 내 주셨다지.”
“와아아아아아아!”
하피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환호하며 황금 꽃잎을 뿌렸다.
황금배를 메고 날던 하피가 말하길.
카엘이 쿤은 물론, 쿤을 구하러 나섰다가 사로잡힌 판을 비롯해 하피들을 구하고 인간들을 내쫓았다는 보고를 받고 칸이 준비한 거라고 했다.
‘그래도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준비하다니. 왕국 수도에서 받았던 환대보다 더욱 거창한데?’
심지어.
칸이 직접 날아와서 카엘의 옆에 서서 외쳤다.
“앞으로 카엘은 우리 하피의 영원한 친구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칸 님 만세!”
“카엘 님 만세!”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 것이니 다들 마음껏 즐기도록!”
“칸 님 만세! 카엘 님 만세!”
그 환호성 속에 카엘은 의아해했다.
“아무리 동족을 구해 왔다고 해도 너무 과한 거 같은데… 원래 칸 님이 이렇게 기분파신가요?”
카엘의 말에 황금배를 메고 날던 하피가 웃으며 말했다.
“칸 님이 좀 그런 면이 있긴 한데, 칸 님이 애지중지하는 딸을 무사히 구해 왔으니 저리 기뻐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딸? 설마 쿤 님이?”
“네. 모르셨어요?”
“몰랐네요.”
아마 딸이 사로잡혔기에 칸이 자존심을 꺾고, 처음 보는 인간에게 구해 달라고 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행여나 공주라는 걸 알면 그걸 빌미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까 봐 눈치껏 함구한 것도 있으리라.
‘어쨌든 기뻐하면서 호의를 베푸는데 즐겁게 받아들이면 되겠지.’
그러고 성안으로 들어가니까 어느새 거대한 연회장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특히 기다란 탁자에는 먹을 것이 잔뜩 있었다.
“인간들이 좋아할 만한 게 없어서 미안하군.”
칸의 말대로 연회장의 음식이라고는 요리보다는 각종 과일과 육해공의 고기를 구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카엘의 눈에는 보물이 곳곳이 숨겨져 있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사는 곳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과일이 많군요.”
그 말대로 귀한 약재로 쓸 만한 과일이 여러 종류가 보였다.
연회 자리만 아니었다면 모조리 챙겨 가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칸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런가? 말만 하게, 나중에 잔뜩 챙겨 줄 테니.”
“감사합니다.”
“황금은 거절하더니, 과일을 원한다니 참으로 신기한 인간이구나.”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는 듯 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곱게 차려입고 잠자코 칸과 카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쿤은 내심 깜짝 놀랐다.
‘인간이 황금을 거절해? 역시 그간 봐 왔던 탐욕스러운 인간과는 다르신 분이야!’
이미 커다란 가슴 속을 가득 채운 호감이 더욱 커졌다.
다른 하피들은.
“생명의 은인이라 일시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것뿐이다.”
“잘생긴 얼굴 보고 좋아하는 것 아니냐.”
…하고 놀리기도 했지만.
얼굴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간질간질한 게 이제까지 느꼈던 감정이랑 차원이 달랐다.
‘잘생기긴 건 사실이지만.’
쿤은 날개로 입을 가리며 웃다가 언제 행복했었냐는 듯 순식간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도 이런 몸이라, 카엘 님과 이어지기는 힘들겠지?’
이어지기 이전에 인간과 다른 모습이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드니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실 분은 아닌 건 알아, 알지만.’
싫어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이종족을 꺼리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겠는가?
긍지 높은 하피로 살아온 쿤으로서는 처음 느껴 보는 좌절감이었다.
쿤의 기분이 천국에서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와중에 귀가 쫑긋해지는 대화가 들렸다.
“황금을 거절한다고 해도 뭔가 보답을 안 할 수는 없지. 달리 원하는 건 없는가?”
“그렇다면 제가 원할 때 한 번 도움을 주십시오.”
그 말에 칸이 언제 웃었냐는 듯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제국 내부 싸움이든 아니든 제국과 싸우는 데 낄 생각은 없다.”
칸뿐만 아니라, 하피들은 이미 제국의 강력함과 위험성을 잘 알았다.
아무리 딸과 동족을 구해 줬다고 해도 왕으로서 나라의 존망을 걸고 제국과 싸우지 않을 게 당연했다.
“저도 그런 무리한 부탁은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제국에 의해 억압받는 종족을 구출할 예정인데, 그때 조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조금만 도와 달라라… 날아서 옮겨 주라는 소린가?”
“정확하십니다.”
“제국과 직접 부딪칠 상황만 아니라면 도와주겠다.”
“감사합니다.”
그 대화를 엿듣던 쿤은 다시 한번 카엘에게 감동받았다.
‘저 흉악한 제국에게 억압받는 다른 종족을 구하신다고?! 정말 대의를 위해 사시는 대장부로구나.’
한편으로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나만 구해 주시는 게 아니게 되는 건 좀 아쉽네.’
하피를 구할 때, 쿤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했던 카엘이었기에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쿤의 속마음에서 벌어진 일이라 누구도 정정해 주지 못했지만.
어쨌든 쿤은 내심 큰 결심을 했다.
‘카엘 님이 도움을 요청하면 나도 그때 가서 도와드려야지!’
카엘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하피인 게 다행스러웠다.
그 생각 때문이었을까?
쿤은 저도 모르게 카엘에게 물었다.
“저기, 카엘 님은 하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말한 쿤은 뒤늦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자신이 뜬금없이 엉터리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니. 내가 미쳤지.’
칸마저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정작 카엘은 웃으며 대답했다.
“항간에는 시끄럽고 무서운 종족이라고 알려졌지요.”
그 말에 주변의 하피들의 떠들다가 하나둘 멈추고 카엘을 쳐다봤다.
“하지만, 겪어 보니 잘못된 소문이었네요. 흥이 넘치고 다정한 친구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종족 같습니다.”
“우리가 좀 그렇지!”
“제대로 보셨네!”
“역시 카엘 님이야. 안목이 있으셔!”
하피들은 기뻐하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쿤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이런 날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쿤! 계속 무슨 소리 하는 게냐. 술을 과하게 했으면 그만 물러나 쉬어도 좋다!”
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괜찮습니다.”
카엘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 내민 쿤의 날개를 쓰다듬었다.
“멋지죠. 모르시겠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늘을 날기를 동경합니다. 날기 위해 마법을 배우기도 할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이 날개는 멋진 마법 같은 게 아닐까요?”
“아.”
다정한 말에 쿤은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한 하피가 분위기를 깨며 날아왔다.
“마법사의 시체와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가져왔습니다!”
그 소식에 카엘은 기뻐했다.
어인족에게 부탁했더니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지금 확인하겠는가? 그건 전적으로 그대의 것이니.”
“지팡이만 이 자리에 들고 왔으면 합니다만.”
“곧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잠시 후 하피가 들고 온 지팡이를 확인한 카엘은 씩 웃었다.
‘역시 현자의 돌이잖아.’
드래곤의 둥지에 있는 것보다는 당연히 작고, 왕국의 보물 창고에 있던 것에 비하면 그 크기가 절반에 불과했지만.
현자의 돌은 현자의 돌이었다.
이것 덕분에 하피를 단숨에 무너트린다든가, 순식간에 순간 이동 하는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게 꽤 값진 건가 보군.”
“현자의 돌이 박혀 있는 지팡이라 그렇습니다.”
“현자의 돌?! 우리 종족이 원래 모습을 찾는 데 필요하다고 했던 게 아닌가?”
“네, 제가 현재 안 들고 있어서 가져오라고 시켰어야 했는데 잘됐네요.”
“원래 모습이라니요?”
놀라서 묻는 쿤에게 칸이 설명했다.
“그게 말이다…….”
우리도 라이칸스로프처럼 지금 모습 외에도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에 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요?!”
“네, 어디까지나 이론상입니다만 가능합니다. 실험해 봐야겠지만요.”
“그럼, 제게, 제게 실험해 주세요!”
“말도 안 된다!”
칸이 대번에 나서서 나무랐지만, 쿤은 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마법사에게 잡혀 가면 죽는 것보다 더한 짓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칸은 어른답게 쿤이 왜 저러는지 꿰뚫고 있었다.
이 인간에게 반한 거였다.
‘딸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칸은 슬쩍 카엘더러 만류해 달라고 눈빛을 보냈다.
카엘도 공주를 실험 대상으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거 현자의 돌이 워낙 작아 한 번 쓰면 소멸해 버릴 거 같네요.”
“아. 그런가요?”
“만약 잘못되면 되돌릴 시도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거로 실험하기에는 위험해 보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전 카엘 님을 믿어요!”
“제가 어떻게 쿤 님을 위험에 빠트릴 일을 하겠습니다. 제게 너무 큰 짐을 지우지 말아 주세요.”
“아.”
단호하던 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토록 다정하시다니.’
그걸 본 칸이 더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지시를 내렸다.
“흠, 흠. 그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지. 그 밖에 사전에 논의했던 지원은 콴을 통해서 받도록 하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카엘이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을 때였다.
또 다른 하피가 날아와 보고했다.
“리치 메라자이드와 데비하이드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 잠시 후, 메라자이드와 데비하이드가 걸어오며 투덜거렸다.
-휴우. 힘들다, 힘들어.
-그래,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어찌나 험한지 죽는 줄 알았어.
하긴 아무리 리치라고 하더라도 저 절벽에서 이 위까지 올라오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카엘이 하피들을 구하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도착한 거였다.
그런 메라자이드에게 카엘이 말했다.
“이제 이야기 다 끝났는데? 소재는 절벽 너머로 가져다 주기로 했으니 이제 돌아가면 돼.”
-…….
두 리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생해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돌아가야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