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만들어진 종족들 (2)
황금 갑옷을 입은 하피와 달리 다른 하피들은 여전히 적대적으로 굴었다.
“원래 모습이라니, 헛소리하지 마라!”
“이게 우리 하피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이다!”
“저 인간의 혀를 뽑아라!”
하피들은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지 바람의 정령이 막고 있는데도 소용돌이가 일어날 정도였다.
점점 소리가 높아지자 황금 갑옷을 입은 하피가 날개를 쫙 하고 펼쳐서 제지했다.
“시끄럽다!”
“…….”
하피들은 일시에 입을 다물고는 황금 갑옷을 입은 하피의 입만을 쳐다봤다.
“일단 데려가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자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안 됩니다! 콴 님!”
“헛소리를 듣는 건 시간 낭비입니다!”
“인간들의 요설에 속아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어디서 내 말에 토를 다느냐!”
황금 갑옷을 입은 하피, 콴이 소리치자 주변의 공기가 크게 출렁이면서 하피들이 비틀거렸다.
하피가 소리를 질러서 정신 사납게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음파 공격이었다.
마치 오러를 쏘아 내는 듯 지면에 있던 스켈레톤과 좀비들도 타격을 입었다.
카엘도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을 정도.
스펙터 같은 언데드 몬스터도 힘을 못 쓰고 소멸할 게 분명했다.
‘저러면 확실히 리치들도 상대하기 어려울 만해.’
-호오, 기세가 제법인데? 소드 마스터랑 비슷해.
아조트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단번에 주변 분위기를 장악한 콴은 카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따라와라.”
그리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날아가 버렸다.
다른 하피들도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뒤따라 날아갔다.
-젠장. 들어오라고 할 거면 곱게 들어오라고 할 것이지. 왜 난리를 피워.
한편 메라자이드는 투덜거리며 음파 공격에 피해를 본 스켈레톤을 복구하느라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다 카엘을 보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다리를 놓을 테니까.
늘 하던 대로 절벽과 절벽 사이를 건너기 위해 스켈레톤끼리 연결해 다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괜찮아. 우리 먼저 갈게.”
-응?
카엘의 말에 의아해하며 보니 카엘이 천천히 허공을 날아가는 게 아닌가?
모르타가 바람의 정령을 불러낸 거였다.
-아니, 아무리 바람의 정령이라고 해도 저게 돼?
“여기는 바람의 정령의 힘이 강한 편이라는군.”
놀라는 메라자이드에게 카엘이 설명했다.
절벽과 절벽 사이로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덕분인 듯했다.
-잠깐, 그러면 나도 데려가.
“나도 물어봤는데, 정령이 거부해서 안 된대. 이것도 힘들다나 봐.”
카엘의 말대로 모르타는 잔뜩 집중한 얼굴이었다.
-치, 그러기야.
투덜대는 메라자이드의 어깨에 뼈다귀 손이 얹어졌다.
-걱정하지 마, 메라자이드. 내가 함께 가 줄 테니까.
데비하이드였다.
그러나 메라자이드는 손을 쳐 내며 쏘아붙였다.
-언데드라 저기에 못 끼어서 그런 건 아니고?
-…….
정곡을 찔린 데비하이드는 아무 말 못 하고 시선을 피했다.
한편 카엘은 계속 하피들이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콴이 허락했다고 해도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
그러는 사이 계속 위로 날아올라 가던 하피들은 결국 구름까지 뚫고 올라갔다.
그 뒤를 쫓아 구름 너머로 올라갔더니 감탄할 만한 풍경이 나타났다.
가로로 긴 나뭇가지를 가진 기이한 거목들의 나뭇가지가 엮여서 평지를 이루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던 거였다.
그 평지 저편에는 거대한 성이 세워져 있었다.
소피아도 그걸 보고 놀란 눈이 됐다.
“하피들이 아예 왕국을 세운 거 같네요.”
“그러게. 그보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걸어갈게.”
카엘은 바람의 정령에서 뛰어내렸다.
모르타가 많이 지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령술이 정령들과 소통해 움직이는 거라고 해도 기력이 많이 소진된 거였다.
“괜찮아? 자, 업혀.”
“응, 고마워.”
브로칸이 등을 내밀자 모르타가 순순히 업혔다.
그러고 성 앞으로 걸어가는데, 갑옷을 갖춰 입은 하피들이 잔뜩 둘러싸고 창을 겨눴다.
브로칸은 그게 못마땅한지 으르릉거렸다.
“이것들이 어디서.”
“카엘 님, 해치워 버릴까요?”
“아니, 괜찮으니까 진정해.”
소피아마저 전의를 불태우며 검을 뽑으려는 바람에 카엘이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자 콴이 되돌아와 하피들에게 말했다.
“다들 물러나라. 너희도 소란 피울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그제야 하피들이 물러났다.
카엘은 다시 날아가는 콴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구경했다.
하피의 성은 투박했지만, 안팎으로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진 탓에 번쩍번쩍한 게 보는 것만으로 눈부셨다.
‘이거 황금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얼마 지나지 않아 옥좌가 보였는데, 그 끝에는 콴과 마찬가지로 황금 갑옷에 왕관까지 쓴 하피가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서자 콴이 소리쳤다.
“하피의 왕, 칸 님께 예의를…….”
“오를란도산맥의 지배자이시자 하피의 왕께 브리운 공작가의 카엘이 인사드립니다.”
콴이 소리치기 전에 카엘은 진작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칸이 눈빛에 이채를 띠었다.
“호오. 너는 보통 인간과는 다르구나.”
멀리서 노려보던 하피들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어라? 왜 저렇게 순순히 인사하지?”
“우리 왕을 인정하는 건 당연하잖아.”
“다른 인간들은 어찌 몬스터한테 무릎을 꿇느냐고 발광했잖아.”
카엘은 상대를 존중해 잠깐 고개 숙이는 건 상관없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걸 얻냐 못 얻냐가 중요하지.’
그때 칸이 입을 열었다.
“콴에게 들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지.”
“네, 저희의 원래 모습을 되찾고 싶지 않냐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콴의 설명에 칸이 몸을 숙여 카엘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우리 종족의 비밀을 아는 거 같구나. 혹시 마법사인가?”
그 말에 언제 분위기가 부드러웠었냐는 듯 다시 차가워졌다.
그만큼 마법사에 대해 반감이 심한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
하피는 라이칸스로프처럼 마법사의 실험으로 탄생한 몬스터.
원래 맹금류와 인간으로 날 수 있는 인간을 만들려고 했는지 아니면 새로 변신할 수 인간을 만들려고 했는지는 지금에는 알 수 없지만.
실험 도중에 날아서 도망친 개체가 퍼져서 자리 잡은 거였다.
이미 수백 년 전의 일이라 대부분의 하피는 그 내막을 모르는 듯했지만.
저 하피의 왕과 그 일족만큼은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마법사는 아니고, 약제사인데 오랜 지식을 배우다 보니 알게 된 겁니다.”
“…그런가.”
칸은 중얼거리다가 카엘의 옆에 있는 브로칸과 모르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긴 같이 있는 자들을 보니 마법사도 악인도 아닌 거 같군.”
목줄 없는 라이칸스로프와 숲의 지킴이인 엘프가 따르는 자라서 좋게 본 거였다.
문제는.
“근데 일전에 저희를 침공해 온 리치와 한패 같기도 했습니다.”
“리치와?”
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리치도 일종의 마법사. 그것도 죽음을 거스르는 마법사와 한패라면 금방처럼 좋게 봐주긴 힘들었다.
“우리와 같은 운명이었던 라이칸스로프와 함께 있으니 해명할 기회를 주겠다.”
“글쎄요. 굳이 해명해야 하나 싶은데. 본 대로 한패입니다만.”
카엘은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저것이.”
“저런 오만한 인간을 봤나.”
“푸하핫! 마음에 든다!”
다른 하피들은 화를 냈지만, 정작 칸은 호탕하게 웃었다.
“무슨 연유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구차하게 변명은 하지 않겠다?”
“네, 그렇습니다.”
확인하듯 재차 묻는 칸을 향해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넘어가지. 그래서 우리의 본래 모습을 찾게 해 준다고, 그게 가능한가?”
“제게 현자의 돌이 있으니까요.”
“현자의 돌이라… 그게 정답이었나?”
“네, 그렇습니다. 현자의 돌만 가진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만.”
“음…….”
잠깐 눈을 감고 고민하던 칸이 물었다.
“혹시 우리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새가 되거나, 인간이 되거나 하겠죠.”
이제껏 누구도 시험해 본 적은 없으니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짐작되는 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게 아니면 라이칸스로프처럼 변신할 수 있게 되리라 예상합니다.”
결국, 실패해 쓰이지 못한 하피와 달리 라이칸스로프들은 지배의 목걸이로 노예로 부림당했다.
그 때문에 라이칸스로프처럼 인간이었다가 필요할 때, 원하는 형태로 변신하는 게 고대의 마법사들이 원했던 형태가 아닐까 싶었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한번 시도해 볼 만은 한 거 같군. 우리 종족의 가능성을 한 차원 높일 수 있을 테니.”
원할 때 인간 모습을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저런 안목이 있기에 이 정도로 세력을 일굴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맨입으로 해 준다는 소리는 아닐 테고 우리한테 뭘 원하나? 황금?”
“황금은 저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원래 이곳에서 저희와 한패인 리치의 세력을 키우려고 했습니다. 하피 외의 다른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불가.”
칸은 단호히 거절했다.
“사특한 존재가 이곳에 들어오는 것도 싫지만, 여기서는 다들 자기 영역 안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굳이 그걸 깨트려야 할지 모르겠군.”
하긴 소드 마스터급이 되는 하피가 머리 위에 자리 잡고 있으니 다들 얌전히 지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콴의 힘을 보자마자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카엘은 곧바로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면, 이곳에 버려진 사체를 수거해서 주시기만 해도 됩니다. 몬스터가 아니라 적들도 좋고요.”
리치는 언데드 몬스터를 만들면서 마력도 조금씩 흡수해서 강해지지만, 마력은 현자의 돌뿐만 아니라 다른 수단으로도 충분히 보충 가능했다.
“흠, 그래? 근데 그렇게 세력을 갖춰서 무얼 하려고 그러나.”
“황자들의 내전에서 쓰일 겁니다.”
“쯧. 인간들이란.”
메라자이드와 반응이 같았다.
한심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마찬가지로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좋다. 받아들이지. 구체적인 건 여기 콴과 상의하도록.”
“감사합니다.”
카엘이 감사를 표하자 브로칸이 놀라서 수군거렸다.
“어, 이렇게 대화로 끝날 거면 데비하이드는 진짜 올 필요 없었네요.”
“그러게.”
모르타도 괜히 헛심 빼고 있을 데비하이드가 떠올랐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파닥. 파닥.
성안으로 날아온 하피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이, 인간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인간들이?”
그 말에 하피들의 시선이 카엘에게 꽂혔다.
콴도 놀라 물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쳐들어온 거냐.”
절벽 쪽은 자신이 직접 감시하며 철벽 방어 중이었다.
절벽 너머에도 리치와 이 인간과 함께 온 자들 외에는 인간들은 없었다.
“해안가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콴은 그제야 안심했다.
한편 칸은 날아온 하피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쨌든 쿤에게 평소처럼 대응해서 내쫓으라고 전해라.”
쿤이라는 하피도, 콴처럼 지휘관인 모양. 그런데 보고하러 온 하피가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쿤 님이 사로잡혔습니다.”
“뭐라고?!”
콴은 이해가 안 됐다.
쿤이 사로잡히다니, 쿤은 자신과 비슷할 정도의 강자였기 때문이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갑자기 힘없이 추락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카엘이 중얼거렸다.
“침입자 중에 마법사가 있나 보네요.”
그러자 보고하던 하피가 깜짝 놀랐다.
“허걱! 여기에도 인간이.”
“이쪽은 우리 손님이니까 괜찮다.”
안심시킨 콴이 카엘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마법사는 상대하기 까다롭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모조리 해치웠다.”
“하지만 그것도 여러분의 비밀을 아는 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마법사들이 라이칸스로프를 조종하기 위해 쓴 지배의 목걸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어를 할 수 있는 장치는 만들어 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면 무슨 약점이라도 아는 거겠지.’
“비밀이라…….”
한편 카엘의 말을 곱씹던 칸이 카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도와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