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위험한 초대 (4)
“어제 정말 멋졌다면서요? 아쉽네요. 구경했어야 했는데.”
제국으로 향하는 도중에 브로칸이 신나서 떠들어 댔다.
“정말 어제는 대단했지.”
카엘의 칭찬에 소피아와 루크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 두 사람 덕분에 어제 연회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화끈했다.
어떤 의미로는 당연했다.
브리운 공작가의 막내아들이 데려온 여인과 소년이 제국의 기사들을, 그것도 소드 엑스퍼트급 기사들과 대결해서 이겼으니까.
평소라면 제국의 기사를 쓰러트다고 해도 통쾌해하거나 대놓고 좋아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어제는 달랐다.
대결의 증인으로 자리한 제국 기사, 파프닐 경도 일방적인 승리에 놀라긴 했어도 소피아와 루크의 실력을 칭찬한 데다가.
대결에 임했던 제국 기사 라우릭과 아젠하임 모두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 거였다.
“내가 졌네. 역시 소드 마스터 브리운 공작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런지 강하군.”
이런 식으로 그냥 여인과 소년에게 진 게 아니라, 브리운 공작의 제자에게 졌다는 식으로 포장했지만, 인정은 인정이었다.
그러자 라우릭과 아젠하임도 대범한 모습이 기사 중의 기사다.
심지어 여인과 소년 상대라 봐준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까지 돌아서 나름대로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듀리프 후작도 경계심보다는 자기 영지의 골칫거리를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지 기꺼워했다.
“두 사람의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네. 나 대신 제국에 가서도 잘 부탁하네.”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 여기 일은 내게 맡기고.”
훈훈한 분위기에서 듀리프 후작이 칭찬하는 걸 보고 왕국 사람들은 대결에서 왕국이 승리한 걸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거였다.
거기다 귀 밝은 귀족들은 둘의 대화를 듣고 지레짐작으로 소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혹시 저 브리운 공작의 막내아들이 듀리프 후작의 후원을 받는 게 아닐까?”
“못 들었어? 브리운가가 제국으로 망명할지도 모른다던데?”
“티겔 공작을 몰라? 그게 아니라 막내아들이라 아무것도 못 물려받으니까, 제국으로 가 기사 작위를 받으려고 그러는 거지.”
소문이야 어쨌든 귀족들은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앞으로 왕국의 실세는 카엘의 브리운 공작가가 될 거라는 거였다.
귀가 밝은 카엘은 그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혔지만, 따로 정정하진 않았다.
착각이나 오해로 듀리프 후작의 후원을 받는다고 하니 다들 조심하는 게 느껴져서였다.
특히 나중에 이 소문을 전해 들은 국왕은 듀리프 후작이 왜 클리페우스성 쪽에 물자를 보내는 걸 못 막게 했는지 깨닫고 전전긍긍했다.
소문과 별개로 연회장에서는 또 다른 소란도 일어났었다.
결투를 벌였던 소피아와 루크의 인기가 치솟은 거였다.
소피아에게는 귀족과 기사들이 접근했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뛰어난 검술 실력에 반했다는 거였다. 그렇게 추근대는 건남자는 물론, 여성 귀족들도 많았다.
‘심지어 바로 결혼하자는 이도 있었지.’
물론, 소피아는 모조리 거절했다.
카엘 님을 모실 거라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 대답에 하나같이 카엘을 부럽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루크도 마찬가지로 주목받았다.
루크의 경우에는 기사 작위를 내려 주겠다, 입양해서 아들로 삼겠다라는 등.
별의별 말이 다 나왔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소드 마스터가 될 때까지 수련에 집중하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더욱 아쉬워했었지.’
소드 엑스퍼트라고 해도 아무나 소드 마스터가 되진 않는다.
그래도 루크는 아직 어리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카엘 님! 저기 관문이 보입니다!”
선두에서 길 안내를 맡은 용병대장 레몽이 소리쳤다.
레몽은 제국 출신에 레오폴드 1왕자가 데려고 왔다는 이유로, 억류되어 있던 참이었다.
원래 왕국에서 용병단을 운영하고 있던 레몽이 뭔가 잘못했다기보다는 국왕이 못마땅해한 탓이 컸다.
그러다 카엘이 마침 수도 킹스콧에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답답하다며 붙잡고 하소연했다.
카엘은 마침 잘됐다며 제국 내 길잡이로 쓰겠다고 데려온 거였다.
국왕은 카엘이 듀리프 후작의 부탁으로 제국으로 가는 길에 데려간다는 말에 순순히 레몽을 풀어 줬다.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환대했지만, 아무래도 꺼림칙한 얼굴이었다.
한편 레몽은 고맙다면서 충성을 맹세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어디를 가시더라도 꼭 저를 데리고 다니셔야 합니다. 전처럼 제국에 버려 두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어떤 모험을 겪게 될지도 모르고 꼭 데리고 다녀 달라니.
“나야 상관없지만, 후회할 텐데?”
그 대답에 레몽은 순간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지만, 기분 탓이라 여기고 웃으며 넘겼다.
“흐흐, 보수만 제대로 주시면 절대 후회 안 합니다.”
그러고 카엘 일행에 합류한 거였다.
* * *
“어이쿠!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카엘은 관문에 들어가자마자 표찰을 내밀었다.
제국의 문장이 새겨진 걸 본 경비원이 경비대장을 불렀고, 거기에 낯익은 듀리프 후작가의 문장을 확인한 경비대장은 냅다 달려와서 친절하게 카엘 일행을 맞이했다.
제일 좋은 숙소를 내주는 건 물론, 제국 국경 검문소로 향하는 길까지 호위해 주겠다고 했다.
“제국 측에서도 편히 모실 수 있도록 바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사절로 레오폴드 왕자와 함께 왔을 때보다 대접이 좋군.’
카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후한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관문을 통과해 제국령에 들어온 카엘은 천천히 페르스발트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레몽과 엘프 자매들에게 정보 수집을 지시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보고를 받았다.
첫 번째는 황자들 간의 내전에 대한 정보.
초기에 나름대로 치열하게 싸웠던 두 진영은 최근에는 산발적인 전투만 있었을 뿐, 별다른 변화 없이 지지부진한 중이라고 했다.
‘안 밀리는 것만으로 잘했다고 해야 하나?’
카엘은 회귀 전 다른 황자를 압도하며 후계자가 됐던 키슬링 4황자를 막고 싶었다.
그리고 망나니 황자라 불리는 탈프 황자를 이용해 다른 황자와 연합을 맺어 막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던 모양이다.
‘당장은 키슬링 황자군이 소드 엑스퍼트가 여럿 사망해 저러는 거 같은데, 조만간에 다시 정비하고 반격하겠지.’
그러면 밀릴 게 빤히 보였다.
‘그전에 도와줘야겠어.’
마침 제국에 돌아왔겠다, 도울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두 번째는 페르스발트 지역의 언데드 몬스터에 대한 정보.
언데드 몬스터가 나타난 데다가 퇴치하려던 용병들이 실패하고, 기사들마저 당했으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다들 페르스발트 지역으로 가는 걸 말릴 정도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듣기로는 로데악성은 점령당하진 않은 듯한데 페르스발트 지역 내 몇 개 마을은 이미 초토화됐다고 하네요.”
노아나의 말을 들은 브로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정도로 난리 났으면 처벌감 같은데요. 이제 퇴치해도 황제한테 혼나지 않을까요?”
“아마 황제도 언데드 몬스터가 절대로 안 생기게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 알 거야.”
대체로 시체를 사제가 정화하거나 최소한 불에 태워야 한다고 알려졌지만.
의외로 누구도 모르게 죽어 있는 시체도 있는 데다가, 동물의 사체가 언데드 몬스터화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다만 언데드 몬스터에게 성을 점령당하거나 일이 커지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측면에서 말한 게 크겠지.”
“아아, 그렇군요.”
카엘의 설명에 브로칸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스발트 지역에 들어서 처음 도착한 마을은 아직 언데드 몬스터의 공격이 미치지 않았는지 멀쩡했다.
마을 주민들은 카엘 일행이 언데드 몬스터를 퇴치하러 온 거라는 말에 안도하며 반겼다.
“아이고, 그렇습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오셔서 다행입니다. 저흰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피신이라도 하시지…….”
소피아가 안쓰러워서 하는 말에 마을 주민들이 손사래 쳤다.
“에이, 큰일 날 소리를 다 하십니까? 그랬다가는 영주님 손에 죽습니다요.”
평소에도 영주민이 함부로 영지에서 떠나지 못하지만, 홍수나 폭풍이나 몬스터의 습격 등 불가피한 재난이나 사고 때는 어느 정도 이해해 줬다.
다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지금은 언데드 몬스터가 없도록 관리하라는 황제의 칙명도 내려온 상황.
영주민들이 다른 곳에 가서 언데드 몬스터 때문에 도망쳤다고 하면 영주가 아주 곤란했다.
뒤늦게 말실수했다고 생각한 마을 주민이 겁먹었다.
“앗 제가 괜한 말을…….”
“음? 아무 말도 못 들었다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카엘이 능청스럽게 못 들은 척하자 마을 주민이 고마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몇 개의 마을을 더 지나친 후.
먼저 정찰을 나갔던 브로칸과 모르타가 저 산 너머 마을을 언데드 몬스터가 점거하고 있다고 알려 줬다.
“음, 그래? 마침 해도 지겠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쉬고 가자.”
카엘의 말에 일행은 노숙 준비를 했다.
그러는 사이, 카엘은 데비하이드가 든 가방을 메고 소피아와 브로칸과 함께 몰래 언데드 몬스터가 있다는 마을로 향했다.
덜그럭. 덜그럭.
마기의 연무로 휩싸인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스켈레톤과 좀비들이 카엘을 향해 덤볐다.
카엘은 검을 빼서 반격하는 대신, 가방을 열어 데비하이드에게 물었다.
“메라자이드가 부리는 언데드 몬스터가 맞지?”
-응, 맞아.
데비하이드의 대답을 들은 카엘은 보라색 보석이 박힌 팔찌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언데드 몬스터들이 멈칫했다.
팔찌의 보라색 보석에는 메라자이드의 마력이 담겨 있어 그걸 알아본 거였다.
“여기로 부르면 오래 기다려야 할까?”
-음, 아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아.
“그래? 잘됐군.”
카엘은 언데드 몬스터들에게 말했다.
“네 주인더러 어서 오라고 해.”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언데드 몬스터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고 데비하이드에게 다시 물었다.
“어때? 메라자이드가 세력을 좀 모은 거 같아?”
-여기 마력이 미약하긴 한데, 이것만으로는 잘 몰라. 일부러 이렇게 보이도록 만든 걸 수도 있으니까.
“그렇겠군.”
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메라자이드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예전에 카엘은 괜히 황제를 자극해 일찍 제거되지 않도록 철수하라고 했다.
그 조언을 받아들인 메라자이드는 철수했으니 인적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세력을 키우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마을로 나와 사람을 해치고 다니다니.’
이렇게 금방 언데드 몬스터를 노출시키는 덴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어마어마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일궈 황제가 겁나지 않을 정도라든가.
아니면, 이러지 않으면 곤란할 정도로 몰린 상황일 수도 있었다.
잠시 후.
메라자이드와 재회한 카엘은 곧바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후자인가 보군.’
메라자이드는 마도사처럼 검보랏빛 로브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기다란 지팡이를 쥐고 있는 겉모습은 여전했지만, 그 힘만은 예전의 절반도 안 되어 보였다.
‘데비하이드를 처음 봤을 때의 절반 정도일까?’
자신을 해치우러 오는 용병과 기사들도 용케 해치웠다 싶을 정도로, 로데악성이 멀쩡한 것도 점령을 안 해서가 아니라, 그러지 못한 게 분명했다.
‘세력을 키우기 위해 만만한 마을만 공격한 거군.’
그걸 느낀 건 데비하이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리 약해졌어?
-너는 왜 징그럽게 내 걱정을 해?
-누,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
메라자이드가 쏘아붙이자 데비하이드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흥, 넌 기운이 넘치는 게 저 인간이 제법 대우를 잘해 주나 봐?
-응, 안 그래도 현자의 돌도 주고…….
-현자의 돌!
메라자이드는 놀랐는지 데비하이드의 말을 끊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골 속 보랏빛 눈이 탐욕으로 번뜩이는 게 아무래도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힘이 약해졌으니 더욱 간절하겠지.’
카엘은 속으로 생각하며 메라자이드를 추궁했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제국에 제거당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한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맞아. 좀 더 외딴곳에서 차근차근해도 되잖아.
-시끄러워! 내가 뭘 하든 내 마음대로다!
그렇게 말한 메라자이드는 손짓하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카엘을 쳐다봤다.
-아니면 너희를 죽이고 현자의 돌을 가져가도 되고.
그러자 메라자이드 뒤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뿜어져 나오는 언데드 몬스터 데스 나이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데스 나이트의 얼굴은 영락없이 사망한 소드 마스터 올리버였다.
올리버는 제국 귀족들의 의뢰를 받고 카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나섰다가 죽었는데, 카엘이 그 시체를 메라자이드에게 넘겨줬다.
메라자이드는 그걸 데스 나이트로 만든 거였다.
지금 데스 나이트 올리버는 데비하이드가 라이프 베슬을 지키기 위해 세워 뒀던 데스 나이트보다 몇 배는 강해 보였다.
문제는.
-너 그거 유지하는 것도 간당간당하네.
-윽. 쓸데없는 소리.
데비하이드의 지적이 뼈아픈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틈에 카엘은 뒤편에서 잠자코 있던 소피아를 앞으로 밀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쪽도 소드 마스터는 있다고.”
-헉!
뒤늦게 소피아를 본 메라자이드는 전의를 잃었는지 투덜댔다.
-치, 그러면 대체 날 왜 보자고 한 거야?
“싸우는 건 그만두고, 건설적인 이야기나 해 볼까 해서 불렀지.”
-건설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