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위험한 초대 (1)
카엘은 찔렸지만 치명상을 입진 않았다.
레비아탄 갑옷이 뚫리긴 했어도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크게 다치더라도 회복할 수단도 있었다.
품에 넣어 둔 엘릭서를 떠올린 카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도 다쳤을 때 썼으면 좋았을 텐데.’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엘릭서를 만드는 데는 드래곤 하트와 마석, 세계수의 씨앗.
그리고 현자의 돌까지.
평생 하나도 보기 힘든 전설급 재료가 다수 필요했다.
다만 아무리 전설급 재료라고 해도 무한으로 쓸 수는 없다.
특히 세계수의 씨앗은 세계수를 다시 심느라 장벽 너머에 묻었다.
그 전에 여유분으로 만든 엘릭서는 모두 3병.
하나는 카엘이 가지고 다니고, 두 병은 클리페우스성 내에 비밀리에 숨겨 뒀다.
문제는 그 위치를 카엘 외에 브란과 티겔 공작만이 알고 있다는 거였다.
카엘과 브란이 출타하고, 티겔 공작이 다치는 바람에 바로 못 쓴 거였다.
‘그나마 예전에 만들어 둔 오거의 피로 만든 약환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해서 다행이었지.’
그러는 사이 소피아는 오크 로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쾅! 펑! 쾅! 펑!
소피아가 움직일 때마다 폭발음이 터졌다.
소피아는 이제 폭발의 오러를 검 외에 자신의 신체로도 자유자재로 쓰고 있어서 나는 소리였다.
발에 폭발을 일으켜 지면을 박차고 화살처럼 날아가 오크 로드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검을 휘두를 때도 폭발을 일으켜 휘두르는 속도를 높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피할 때도 작게 폭발을 일으켜 몸의 방향을 바꿨다.
‘순식간에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고 써먹다니, 확실히 재능이 뛰어나긴 해.’
문제는 너무 과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거였다.
처음 느껴 보는 강력한 힘에 취해 공격을 퍼부으며 오크 로드를 밀어붙이고 있지만 아무래도 체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앗! 왜?”
퍽!
그때 오크의 창을 피하려던 소피아가 폭발이 안 일어나는 걸 보고 당황하는 순간, 창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저런.”
카엘은 벌떡 일어나서 소피아에게 달려가서 회복 포션을 먹였다.
그러는 사이 오크 로드는 상대를 끝장을 내기보다는 도망치려고 했다.
“큭.”
몇 발자국 뛰던 오크 로드는 급하게 멈췄다.
그러자 그 앞에 거센 불길이 일어났다.
오크 로드는 순간 당황한 듯 보이더니 갑자기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뒤늦게 쐐액! 하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그걸 다 피하다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네.”
회귀 전 카엘의 스승인 엘프 디오네가 나타나며 중얼거렸다.
“비켜라!”
오크 로드는 놀라긴 했지만 디오네 정도면 상대할 만하다 여겼는지 창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찮은 상대도 아니었다.
화르륵.
불 정령이 달려들며 오크 로드를 휘감았다.
“크아아아악!”
안 그래도 소피아에게 입은 타격에 불까지 붙자 오크 로드는 괴성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디오네를 노렸다.
이대로 발목을 잡히면 정말 끝장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칫.”
디오네는 하는 수 없이 피하면서도 세검으로 순식간에 여러 개의 상처를 남겼다.
이내 정신을 차린 소피아와 루크까지 협공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카엘도 합류했다.
결국, 손이 어지러워진 오크 로드는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맞상대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그러자 오크 로드는 기가 찼다.
카엘이라는 우두머리를 공략하는 작전이 성공했나 했더니 그 부하가 화내면서 각성해 버리다니.
그 탓에 도망치는 데도 실패하고 포위당했다.
이대로라면 지진 않겠지만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
아직 저쪽에는 엘프들이며 거인이며 남은 전력도 있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무리해서라도 몇 명은 해치우고 후퇴해야겠다.’
오크 로드는 품고 있던 마석의 기운을 해방했다.
파앗!
마석은 오크 로드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인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의식이 아득해지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긴 해도, 저번 결투 때도 이걸 이용해 톡톡히 재미를 본 참이었다.
그 마석의 기운을 눈치챈 카엘은 그대로 흡수해 버렸다.
데비하이드의 라이프 베슬로 만든 약물로 얻은 능력이 빛을 발한 거였다.
완전히 마력을 흡수하진 못했지만 덕분에 체력도 충분히 회복한 데다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못 미칠 정도로 마력을 옅게 만들 수 있었다.
‘젠장! 어떻게 된 거지?’
막상 오크 로드는 영문도 모른 채 마석이 통하지 않자 가슴이 갑갑했다.
마석의 힘으로 강해진 탓에 조금 여유는 생겼지만 적들을 뿌리치기에는 또 모자랐다.
“다들 뭐 해? 이 녀석들 해치워!”
오크 로드가 다른 오크들한테 소리쳤다.
그러자 공격할 틈도 없는데 프레데릭만 바라보며 달려들던 오크들이 정신을 차리고 오크 로드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돼, 됐다. 이 틈에…….’
오크 로드가 도망칠 틈을 보고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어딜 꽁무니를 내빼느냐!”
우렁찬 호통과 함께 주위를 압박하는 존재감을 발휘하며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클리페우스성의 주인이자 소드 마스터인 티겔 공작이었다.
‘아, 아니. 벌써 회복했나?’
오크 로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티겔 공작을 바라봤다.
동시에 정말 위급한 상황이 됐다는 걸 깨달았다.
소드 마스터 두 명에 정령술을 쓰는 엘프와 그 외에도 하나같이 제법 강한 적들에게 둘러싸인 거였다.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내 힘만으로는 안 돼.’
오크 로드는 적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오크 제사장 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전력을 끌어내 사방에 공격을 퍼부은 뒤, 겨우 틈을 내 오크 제사장 옆으로 갔다.
오크 제사장에게 등을 맞댄 오크 로드가 물었다.
“어이, 괜찮나.”
“젠장! 이게 괜찮은 거로 보여?”
오크 제사장이 상대하던 신전 기사들도 만만찮았는지 전신이 상처로 엉망이었다.
거기다가 추종자들까지 자신의 말을 안 듣고 신성한 빛을 뽐내는 인간에게 덤볐다가 모조리 당해 혼자였다.
한편 오크 제사장은 평소 그리 밉던 오크 로드라 투덜대긴 했지만 다가와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주니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어쨌든, 무사하다.”
“여기를 뚫고 나가려면 우리도 힘을 합쳐야 한다.”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군. 안 그래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아! 내가 길을 열어 줄 테니 가서 병력을 더 이끌고 와라! 난 여기서 시간을 끌겠다.”
“뭐, 정말인가?”
오크 로드의 제안에 오크 제사장은 감격했다.
저 막무가내가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하는 말을 듣는 날이 오다니.
‘내 반드시 오크들을 이끌고 돌아와서 구하겠네. 앞으로도 잘 협력해 주고.’
그사이 오크 로드는 마석을 다시 개방하며 창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카엘은 마석이 뿜어내는 마력을 다시 흡수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 손실이 없었다.
그 탓에 이번에는 다들 마석의 영향을 받아 흐트러졌고 오크 로드가 휘두른 창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자, 됐다. 어서 도망쳐!”
“그, 그래.”
오크 제사장은 오크 로드의 채근에 빈틈이 생긴 곳을 향해 뛰었다.
그 순간.
“어, 도망친다.”
“골치 아픈 녀석이다! 놓치면 안 돼!”
“제가 쫓을게요!”
브로칸의 말에 디오네가 소리치고, 루크가 몸을 뺐다.
본격적으로 추격당하기 전에 오크 제사장이 오크 로드에게 소리쳤다.
“고맙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 너도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
“고맙기는 내가 고맙지.”
“응?”
오크 제사장이 의아해하는 순간, 오크 로드는 반대편으로 뛰었다.
오크들의 사체 수천 구가 잔뜩 쌓여 있는 곳이었다.
오크 로드는 오크 제사장을 미끼로 쓰고, 사체를 방패 삼아 도망칠 작정이었다.
“저렇게 치졸할 수가. 어떻게 오크 전사 중의 전사라고 할 수 있는 오크 로드가 저럴 수가 있나.”
오크 제사장은 허탈한 마음에 도망칠 힘을 잃었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오크 로드는 그대로 오크들의 사체 안으로 파고들었다.
‘뒈지는 것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낫지.’
뒤늦게 티겔과 디오네가 쫓았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놓쳤다.
“이런 실수를.”
“어차피 저기서 기어 나오면 끝이야. 그전에 불태워 버려도 되고.”
디오네는 그러면서 불의 정령을 불렀다.
사체는 썩는 와중에 불타오르며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오크의 사체 사이에서 죽은 척하고 있던 오크 로드는 숨 쉬기도 괴로웠지만 꾹 참고 사체를 헤집어 가면서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면서 탈출할 수 있는 빈틈을 찾으려고 외부로 눈을 굴렸다.
다행히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크들은 여전히 대치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동쪽 끝에서 빈틈을 발견했다.
‘저기로 나가서 숲속으로 뛰어들어 가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겠어.’
오크 로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투기를 모아 다리에 집중했다.
쫓아오는 적들이 강자인 걸 고려하면 단번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
‘이 틈이다. 나가자!’
“저기다!”
기회를 엿보던 오크 로드가 뛰쳐나오자마자 브로칸이 소리치며 가리켰다.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소피아가 날아왔다.
‘젠장.’
오크 로드가 창을 휘둘러 사체를 던져서 겨우 가로막았다.
화르륵.
그 틈에 디오네가 불러낸 불의 정령이 오크 로드를 휘감았다.
극심한 고통에 몸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 뒤에 티겔의 검에서 나온 기다란 오러가 오크 로드를 노렸으나 아주 조금 모자랐다.
‘됐다, 됐어!’
적들의 공격을 하나둘 피하고 견뎌 내면서 달리던 오크 로드는 속으로 외쳤다.
드디어 저 지긋지긋한 녀석들을 뿌리치고 탈출하는 데 성공한 거였다.
그때.
스윽.
거대한 그림자가 오크 로드를 드리웠다.
거대화한 마검 아조트의 그림자였다.
카엘이 오크 로드를 쫓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거대화한 거였다.
부웅.
“큭, 으아아아아악!”
오크 로드는 최대한 피했지만 오른쪽 팔이 잘려 나갔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을 내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났다.
그 결과 오크 로드는 숲속으로 몸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제가 추격할까요? 냄새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브로칸이 나섰지만 티겔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둬라. 여기 있는 오크들부터 몰아내야지.”
오크 로드가 도망쳤지만 그걸 모르는 오크들은 여전히 클리페우스성을 공격 중이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숨통을 끊어야 할 텐데…….”
디오네가 안타깝다는 듯 오크 로드가 사라진 방면을 바라봤다.
그걸 본 티겔이 말했다.
“오히려 살아남는 게 저희한테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카엘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오크 로드를 해치우면 오크들끼리 경쟁해서 새로운 오크 로드를 뽑는다.
그렇게 강력한 오크 로드가 탄생하게 만드느니, 한 팔을 잃고 크게 패배한 오크 로드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힘을 제대로 못 쓸 게 분명했다.
오크들이 그런 오크 로드를 못 받아들이고 제거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이쪽의 수고를 덜 수 있는 거였다.
‘그렇게 쉽게 풀리면 좋겠지만.’
“그러니 남은 오크들을 몰아내고 클리페우스성 사상 최고의 승리를 자축하자꾸나.”
“네.”
그 말에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했던 모습이나 계획과는 달랐지만 그토록 염려했던 몬스터 대침공을 막아 낸 거였다.
회색산맥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과 아크 리치를 생각하면 아직 끝은 아니지만.
큰 산은 하나 넘은 셈이었다.
* * *
클리페우스성은 여느 때보다 훨씬 즐겁고 들뜬 분위기였다.
몬스터를 막아 내고 승리를 자축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여느 때보다 즐거워했다.
카엘이 돈을 풀어 성대한 축하 연회를 열기도 했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다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끝장이다, 하고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아서였다.
심지어 티겔 공작마저도 오크 로드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었으니까.
그런데 그 수많은 오크를 패퇴시키고 오크 로드의 팔까지 잘라 낸 거였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모두 뛸 듯이 기뻐했다.
“이게 다 네 공이다.”
티겔 공작의 상찬에 카엘이 멋쩍어하며 대꾸했다.
“클리페우스성 사람들이 합심한 덕분이죠.”
“그렇게 성내 모든 사람의 힘을 다 모으고 여러 종족의 힘까지 모은 건 네가 아니면 힘들었지. 네가 겸손하게 굴어도 다들 그렇게 생각 중이야.”
후방에서 전투를 독려했던 레오폴드도 웃으며 칭찬을 거들었다.
그 말대로 카엘이 나와서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카엘을 보며 환호하며 반갑게 맞았다.
심지어 클리페우스성에서 오크 군단을 막아 낸 이야기는 어느덧 전설이 되어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은 티겔 공작이 아니라, 공작가의 막내아들인 카엘이었다.
공작의 막내아들이 거인이 됐다는 건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 가며 과장됐다고 여겼지만 다들 브레프니 왕국에 영웅이 탄생했다고 받아들였다.
그 덕분인지 국왕이 카엘을 칭찬하며 상을 줄 것이니 수도로 초대한다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초대 소식을 들은 카엘뿐만 아니라, 티겔마저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도와주지도 않고 외면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