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2차전 (3)
“사악한 것들이여, 사라져라!”
프레데릭이 신성력으로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검을 휘둘렀다.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이전과 달리 닿지도 않았는데도 오크 주술병이나 좀비가 소멸했다.
옆에서 싸우던 브로칸이 그걸 보고 감탄했다.
“우와! 정말 멋져요!”
“…감사합니다.”
프레데릭이 직설적인 칭찬에 쑥스러워하는 걸 보고 카엘이 물었다.
“기분이 어때?”
“제 몸속에 성령이 충만한 느낌입니다! 검에도 신의 뜻이 담길 뿐만 아니라 숨 쉬는 것마저 신의 뜻 같습니다!”
흥분해서 말하는 걸 보니 신성력이 희미할 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 모양이었다.
고행 끝에 이제 신성력을 간신히 다루는 수준인 파나틱 기사단은 그걸 보며 매우 부러워했다.
“프레데릭 형제, 신앙이 경지에 오르신 걸 축하합니다.”
“여러분도 곧 도달하실 겁니다! 전투가 끝나면 또 함께 고행하고 기도하시죠!”
“그럽시다!”
프레데릭의 제안에 파나틱 기사단은 훈훈하게 받아들였다.
그걸 본 브로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투 후에 또 기도할 생각을 하다니, 지겹지도 않나.”
카엘도 동감했다.
‘성기사가 되는 건 정말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어쨌든 프데레릭을 보고 자극받은 파나틱 기사단은 더욱 열심히 적들과 싸웠다.
너무나 적극적이어서 데비하이드가 아군 근처로 좀비들이 가지 않도록 했는데도, 날뛰는 파나틱 기사단에게 여러 좀비가 소멸당했다.
-뭐 어때? 또 소환하면 되는데.
그런 와중에도 데비하이드는 기분이 좋았다.
아조트가 마력을 잔뜩 먹은 걸 보고, 왜 아조트한테만 주냐고 구시렁댔더니 카엘이 아예 현자의 돌을 쥐여 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제없었다.
리치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프 베슬은 카엘의 손에 있는 데다가 여차하면 룬으로 힘을 약화할 수도 있었다.
“카엘 님! 오크 로드가 다가옵니다.”
냄새를 맡았는지 브로칸이 보고했다.
그 말에 한창 오크 주술병과 오크 좀비를 해치우던 카엘 일행은 긴장했다.
소피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카엘 님, 어떡할까요?”
후퇴할 거냐고 묻는 거였다.
오크 로드는 소드 마스터 티겔마저 꺾은 강자.
피한다는 선택을 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피할 수만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오히려 나와 주길 기대하며 이렇게 싸우는 중이었다.
“아니, 이대로 싸울 거야. 겁나는 사람은 돌아가도 좋아!”
“돌아가다니요! 함께 싸워야죠!”
“끝까지 카엘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카엘 님을 지킬 거예요!”
브로칸에 이어 루크와 소피아까지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나저나 소피아는 꼭 극단적으로 말한단 말이야.’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인 건 확실했다.
“저희도 함께할 겁니다!”
성기사의 힘을 얻게 된 프레데릭이 소리쳤다.
그러자.
빛이 터져 나오며 사방에 따스한 기운이 은은하게 퍼졌다.
“오오오오!”
그 신성력을 느낀 파나틱 기사단의 신전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카엘도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샘솟는 느낌을 받았다.
신성력의 영향으로 신의 가호를 자연스럽게 받게 된 거였다.
“프레데릭은 기사단과 함께 최대한 오크들을 막아 줘.”
“네! 맡겨 주십시오.”
프데데릭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파나틱 기사단과 함께 서서히 움직여 방어망을 구축하려 했다.
성기사가 된 프레데릭이 가운데 서서 중심을 잡고 좌우로 조금이나마 신성력을 깨우친 신전 기사단이 서서 진형을 만들었다.
그러자 언데드 몬스터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심지어 평범한 오크나 오크 워리어도 마찬가지로 먼저 공격해 왔다.
마치 지금 상황이 어떻든 저것부터 없애야 한다고 정한 것만 같았다.
‘몬스터의 주의를 끄는 효과는 듣던 대로군.’
회귀 전 카엘의 기억에 따르면 성기사가 나타나면 몬스터가 성기사만을 집요하게 노린다는 거였다.
다만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는 그런 욕망이 들더라도 의지로 끊어 내는 듯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크 로드를 상대할 때 다른 오크들이 방해하기 어렵겠지.’
때마침 다가오는 오크 로드를 쳐다보던 카엘은 그 뒤를 따라오는 오크를 보고 미간을 모았다.
오크 워리어 정도의 체격에 지팡이를 든 오크는 하나밖에 없었다.
‘오크 제사장이로군.’
제사장이라고 해도 방심하면 안 됐다. 주술을 쓸 뿐만 아니라 단순 전투력만 따지더라도 오크 워리어보다 훨씬 강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오크 제사장까지 나타날 줄이야. 예상 밖인데.’
오크 로드와 오크 제사장은 서로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아서, 오크 로드만 상대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크 제사장 정도면 성기사가 주의를 끄는 게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크취익! 크췩! 죽어라!”
오크 제사장이 그대로 프레데릭 쪽으로 뛰어가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자신의 주술을 방해한 원한 때문인가 보네.’
카엘은 다행이라 여기고 오크 로드를 향해 태세를 갖췄다.
그때였다.
“이 녀석은 제가 해치워 버리겠습니다.”
브로칸은 언제 거대화 포션을 마셨는지 거대화하면서 대형 월도까지 휘둘렀다.
상대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선공으로 주도권까지 잡을 수 있는, 절묘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오크 로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대형 월도를 가볍게 피한 오크 로드는 브로칸이 무기를 회수하기 전에 기다란 창으로 찔렀다.
푹.
“으악!”
브로칸이 비명을 지르며 대형 월도를 놓쳤다.
거대화가 되면 힘도 세지지만 그만큼 둔해졌다.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거나 약한 녀석들을 여럿 상대할 때는 이점이 있지만, 자기보다 강자를 상대하는 데는 빈틈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거대화를 쓰면 안 되겠군.’
“쓸데없는 재주로 날뛰다니. 어디 거인들을 아무리 불러 봐라, 이 오크 로드님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나!”
투기도 사용하지 않고 단번에 브로칸을 쓰러트린 오크 로드는 득의양양해졌다.
그러면서 브로칸에게 덤비려는 걸 카엘이 가로막았다.
“브로칸, 괜찮아?”
“죄송합니다. 금방 회복할 겁니다.”
그사이 카엘을 마주한 오크 로드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왠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지?”
오크 로드는 어제 거대화한 카엘을 봤지만 거인이라 생각한 데다가 인간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해 눈치채지 못했다.
반면에 카엘은 오크 로드를 잘 알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오크 로드와는 회귀 전에 몇 번이나 부딪쳤다.
거의 매번 패배했다가 종국에는 오크 로드의 창에 살해당했다.
‘이번은 다를 거야.’
오크 로드를 상대할 자신이 있어서 나온 거였다.
반면에 오크 로드는 카엘을 보며 비웃기 바빴다.
“오러도 못 쓰는 거 같은데, 그 검 하나 믿고 나랑 싸우려고? 크흐흐,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카엘 님, 도와드릴게요.”
“저도 돕겠습니다.”
카엘의 좌우로 소피아와 루크가 섰다.
둘 다 검에 오러를 두른 게 듬직했다.
그걸 본 오크 로드는 순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셋이 덤비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마음대로 덤벼도 좋다.”
셋을 합쳐도 어제 싸웠던 소드 마스터보다 약해 보이니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오크 로드도 미처 모르는 게 있었다.
첫 번째로 카엘이 오러는 못 쓰지만 그만큼 괴력을 가졌고, 그의 몸으로 소드 마스터를 육성해 낸 검의 달인 아조트가 검술을 펼칠 거라는 거였다.
두 번째로 소피아와 루크, 이 두 사람 모두 아조트에게 검술을 배워 합동 공격에 능숙했다.
세 번째로는 다친다고 해도 카엘의 포션으로 금방 회복해서 오래 싸울 수 있다는 거였다.
‘더 중요한 건…….’
카엘은 문득 소피아와 클리페우스성을 돌아봤다.
그때 오크 로드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언제까지 우물쭈물하면서 시간을 끌 거냐!”
오크 로드는 창을 크게 휘둘렀다.
카엘은 고개를 숙여 피하고, 소피아는 위로 점프해서 피했다.
루크는 피하는 대신 검을 들어 막았다.
쾅!
굉음과 함께 멀리 떨어졌다.
“루크!”
-저 녀석은 괜찮아. 그보다 다음 공격에 대비해야지.
아조트의 지적에 소피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크 로드는 카엘을 향해 연속 찌르기를 펼쳤다.
저 육중한 몸으로 어찌나 빠른지 창 여러 개가 동시에 찔러 오는 듯했다.
하지만 아조트는 그걸 다 막아 냈다.
“아니, 어떻게.”
오크 로드가 놀라워할 때 아조트가 말했다.
-저렇게 지껄일 때 공격해야지!
그 말대로 소피아가 오크 로드의 빈틈을 노려 검을 내찔렀다.
“어딜!”
쾅!
오크 로드는 그사이 창을 회수해 소피아의 검을 막는다고 막았지만 소피아의 오러가 폭발했다.
“크윽!”
오크 로드가 괴로워했지만 거리가 먼 탓에 제대로 타격을 주진 못했다.
“좋아. 루크, 협공하자!”
“네.”
어느새 복귀한 루크가 대답하며 공격을 펼쳤고, 카엘도 아조트를 휘둘렀다.
이번에야말로 적중하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어 보였다.
그러나.
퍽!
오크 로드가 휘두르는 창에 얻어맞고 둘 다 나가떨어졌다.
“어디서 잔재주를 부리는 거냐? 가만 놔두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는 오크 로드의 얼굴부터 전신이 뻘게지기 시작했다.
투기를 사용한 거였다.
‘지금 전력으로도 투기까지는 끌어낼 수 있나?’
여기까지는 상정 내,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투기를 사용하는 오크는 몇 배나 강해진다.
소드 마스터인 티겔도 투기를 쓰는 오크 로드를 상대하기 위해 생명력을 오러로 변환시켜야 했다.
오크 로드가 투기를 사용하자마자 소피아나 루크는 물론 카엘마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밀리는 정도로 끝나는 게 다행이지.’
아조트가 조종해 검술을 펼쳐 주지 않았다면 바로 당했을 게 분명했다.
“카엘 님!”
그사이 상처를 회복한 브로칸이 기세 좋게 합류했지만 여전히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됐다.
한편 오크 로드는 한창 싸우면서 상대를 파악했다.
‘카엘이라고 매번 부르는 걸 보니 저 카엘이라는 인간이 우두머리인가?’
어려 보이는 데 반해 검술이 노련해서 위협적이긴 했다.
그러고 오크 제사장 쪽을 힐끗 보니 상대와 호각을 이루며 싸우고 있었다.
‘저대로 시간을 끌면 불리해, 승기를 잡으려면 저 우두머리 인간부터 해치워야 한다!’
오크 로드는 계속 공방을 벌이면서 은근히 카엘을 몰아 나머지와 분리하려고 했다.
서로 돕기 어려운 정도로 떨어트린 다음, 카엘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투기를 발현한 상태로 펼친 전력을 다한 찌르기!
여러 개의 창이 동시에 찌르는 것처럼 보여서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카엘은 찌르기를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창이 여러 개처럼 보여도 붙잡으면 결국 하나지.”
-네가 붙들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럼 할 수 있는지 볼까?”
-뭐? 무리야.
가볍게 대꾸하던 아조트가 놀라 만류했다.
“무리인 줄 알아!”
카엘은 그러면서 자신을 노리는 창을 정면에서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거센 공세를 꺾지 못해 창은 그대로 가슴팍에 꽂혔다.
푹!
어찌나 강한지 최근에 새로 맞춘 레비아탄 갑옷마저 뚫은 거였다.
“헉.”
“카엘 님!”
다들 비명을 질렀다.
그걸 보며 오크 로드는 카엘을 발로 누른 채 창을 회수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반응을 보니 자신의 노림수가 맞았다는 확신이 든 거였다.
하지만 오크 로드가 하나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펑!
바닥에서 터지는 굉음과 함께 소피아가 화살처럼 날아가 오크 로드를 덮쳤다.
“카엘 님을 죽이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해!”
그러면서 검으로 내려치는데, 오크 로드가 반사적으로 막자 다시 쾅! 하고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전보다 훨씬 크고 강력했다.
소드 마스터로 각성한 소피아의 오러가 한층 강해져서였다.
오러를 단순하게 사용하는 소드 엑스퍼트에서 오러에 특성을 담아 낼 수 있으면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거기에서 깨달음이나 충격을 받아야 한계를 깨고 소드 마스터가 된다.
그렇게 소드 마스터가 되면 오러가 강해진다.
단순히 무기에 오러를 두를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라 신체에서도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였다.
한편 카엘은 소피아에게 어떤 충격을 줘야 각성할지 잘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 몬스터들이 클리페우스성을 점령하고 카엘이 있던 곳까지 쳐들어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소피아가 검을 들고 떨면서 수많은 몬스터를 베어 버린 것을 본 덕분이다.
덕분에 효과는 확실했다.
카엘을 살해했다고 분노해 소드 마스터로 각성한 거였다.
‘나는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카엘은 오크 로드를 몰아붙이는 소피아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