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제국 마법사의 음모 (1)
“정말 회색산맥의 드래곤을 깨울 거라고 했다고?”
카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마법사의 제자라고 하는 사내에게 물었다.
“네, 네. 정말입니다. 제게 흔적을 지우고 동해로 와서 도우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북쪽으로 향하지 않고 동해로 가는 거죠?”
이해가 안 간다며 묻는 루크에게 카엘이 뻔하다는 듯 답했다.
“아마 해룡을 화나게 하려는 거겠지.”
“그렇군. 하긴 오크들이 준동하는 거로 시끄럽다고 드래곤이 깨는 것도 이상하지.”
“하긴 같은 드래곤인 심해왕이 날뛰면 회색산맥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을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하겠군요.”
그 말에 디오네와 모르타가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별문제 없겠네요? 카엘 님은 심해왕과 친하지 않습니까?”
“맞아. 카엘 님이 부탁하면 조용히 넘어갈지도요.”
브로칸과 소피아가 맞장구쳤지만, 카엘은 마냥 쉽게 풀릴 것만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마법사가 무슨 짓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현재 항구 아말레이에서 어인들이 여러모로 도와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유가 브리운가의 카엘이 심해왕을 도와줘서라는 것 또한 대부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인간과 우호적인 관계인 심해왕을 화나게 하려면 보통 짓으로는 안 된다는 걸 마법사도 충분히 알고 있을 터였다.
“무슨 짓을 저지를 거라는 소리는 들었나?”
“모, 모릅니다. 저한테는 이야기해 주질 않아서…….”
마법사의 제자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 자식이 그렇게 말하면 끝나는 줄 알아? 확! 씹어먹어 버린다.”
브로칸이 화를 내며 으르렁거리자 마법사의 제자가 카엘을 보며 애원했다.
“저, 정말입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그래. 믿어 주지.”
너 나 할 거 없이 음흉하기로 유명한 마법사가 자신의 계획을 아는 자를 남겨 두고 움직였을 거 같진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다만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짐작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야.”
카엘이 경고하자 프리지가 마법사의 제자 목에 검을 겨눴다.
그러면서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자 마법사의 제자가 오줌을 지렸다.
“히익!”
복수심에 눈이 뒤집힌 프리지는 너무나도 살벌했다.
카엘은 프리지가 위협하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마법사의 제자에게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드리웠다.
“쓸 만한 이야기를 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그게……. 어, 음. 잠시만요. 맞다!”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기억을 더듬던 마법사의 제자가 이거다 싶은 일을 떠올렸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사님이 가지고 다니시던 몬스터의 알이 깨어났다고 좋아하신 게 기억납니다.”
“몬스터의 알? 설마 우리 성을 점령한 아라흐네도 그런 식이었나?”
“아, 네…….”
마법사의 제자는 프리지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주눅이 든 채 간신히 대답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걸 본 카엘이 달래듯 말했다.
“좋아. 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그래서 무슨 몬스터의 알이지?”
“레비아… 뭐라는 이름이었는데요. 주둥이가 기다란 도마뱀처럼 생겼었습니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마법사의 제자가 혼나기 전에 먼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 말을 듣던 디오네가 화들짝 놀랐다.
“혹시 레비아탄?!”
“아, 네. 맞습니다, 레비아탄!”
마법사의 제자가 확인해 주자 디오네는 물론, 카엘의 표정도 굳었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브로칸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뭔가요? 처음 들어 보는데…….”
“전설로만 내려오는 바닷속 몬스터다.”
그렇게 운을 뗀 디오네가 친절히 설명해 줬다.
레비아탄은 뱀처럼 기다란 몸통에 걸맞은 기다란 입을 가졌는데, 입속에는 흉측한 이빨이 촘촘히 박힌 게 무시무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입에서는 바닷속에서도 타오르는 불꽃을, 콧속에서는 시커먼 연기를 내뿜었다.
‘그게 문제지.’
그 설명을 듣던 카엘이 속으로 혀를 찼다.
기름 섞인 시커먼 연기는 그 자체로도 독성이 있어서 물고기가 폐사할 뿐만 아니라, 햇빛을 가려 바다를 오염시켰다.
그렇게 되면 심해왕이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하기가 어려울 게 분명했다.
게다가 레비아탄의 성체는 매우 강력하고 흉포해 심해왕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처리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바닷속에서 상대하면 괜찮은데, 마법사는 밖으로 유인하겠지.’
레비아탄은 바다 안팎을 돌아다니는 탓에 심해왕 메르 8세가 레비아탄과 끝장을 보겠다고, 육지로 올라오기라도 하면 심해왕을 느낀 드래곤이 깨어날 게 분명했다.
“…그러니 레비아탄이면 심해왕이 움직일 수밖에 없어.”
“그, 그렇군요. 그럼 어떡하죠?”
겁을 먹은 모르타에게 디오네가 웃으며 대답했다.
말했다.
“그러기 전에 막아야지. 내가 말한 건 수백 년을 산 성체를 말한 거고, 우리가 막아야 할 레비아탄은 태어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할 만할 거야.”
이번만은 카엘도 그리 낙관적이진 않았다.
“그래도 모릅니다. 몬스터를 다루는 마법사들은 빨리 성장시키는 비법도 알고 있으니까요. 성체까진 아니더라도 제법 강할 겁니다.”
“하긴 그 말도 맞지.”
디오네는 순순히 인정했다.
갓 태어난 레비아탄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자신이 있으니까 계략을 꾸미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었으니까.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일단 찾고 나서 고민하죠.”
카엘이 그렇게 정리할 때, 프리지가 나섰다.
“저도 따라가겠어요.”
“그래야지.”
언제 우울했었냐는 듯 프리지의 눈빛은 복수심에 반짝였다.
카엘은 거대 거미 잔당의 퇴치를 큰형 브란에게 맡기고, 마법사의 뒤를 쫓기로 했다.
그렇게 향한 곳은 마법사가 제자더러 찾아오라고 한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속의 작은 마을이었다.
* * *
“결국, 발설했나 보군. 못난 녀석.”
마법사 푸글리니는 자신이 저주해 몬스터로 만든 까마귀를 통해 카엘 일행이 다가오는 걸 지켜보며 혀를 찼다.
그 와중에 낯익은 얼굴을 보며 더욱 경계의 눈초리를 했다.
‘카엘이라고 했나. 범상치 않은 자라고 듣긴 했지만, 아라흐네를 혼자서 해치우다니.’
아라흐네와 대규모의 거대 거미는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 이기기 불가능한 존재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가 아닌데도 혼자 해치운 거였다.
소드 엑스퍼트를 꺾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예상 이상으로 강했다.
심지어 엘프들과 손을 잡았는지 마법으로만 불태울 수 있다는 아라흐네의 거미줄까지 태워 버렸다.
‘저러니 제국에서 견제할 만도 해.’
결국, 아라흐네를 이용해 브레프리 왕국을 혼란에 빠트린다는 작전은 실패했다.
그래도 아직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황제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포기했다가는 죽음만이 기다릴 뿐인 데다가, 황제는 그 일이 실패할 걸 대비해 레비아탄의 알까지 줬으니까.
레비아탄.
드래곤과도 필적한다는 전설적인 몬스터였지만, 그만큼 육성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도 힘들 정도로.
하지만 심해왕이 불쾌해할 정도로 키우는 건 함께 받은 현자의 돌에 더해 충분한 먹이만 준다면 문제없었다.
심지어 마을을 습격해서 레비아탄에게 어느 정도 먹인 상황.
‘저 카엘이라는 인간에 엘프까지 먹인다면 충분히 심해왕과도 싸워 볼 만하겠지.’
레비아탄은 아라흐네와 달리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몬스터였으니까.
그때였다.
“큭.”
순간 푸글리니의 시야가 까매졌다.
카엘 일행을 감시하던 까마귀가 당한 거였다.
“흥! 눈치챈 건가? 예민하기는.”
불쾌하긴 해도 상관없었다.
이쪽에서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전세가 역전될 리가 없으니까.
푸글리니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적이 오고 있으니 싸울 준비를 하라!”
“네, 마법사님.”
문밖에서 고용한 용병들이 겁먹은 목소리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곳까지 함께하면서 마법사가 사람을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 주는 걸 본 이상, 아무리 거친 용병이라도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명령에 순순한 용병들을 보니 푸글리니는 웃음이 나왔다.
‘그간 마법사임에도 얼마나 무시를 당해 왔던가.’
보통 마법사는 한두 가지 마법밖에 못 배운다.
자신이 깨우친 마법은 몬스터를 조종하는 것.
하지만 다른 마법사와 달리 위력적인 존재가 되기가 훨씬 까다로웠다.
동물을 저주해서 몬스터를 만드는 게 아닌 이상.
강한 몬스터를 부하로 부리기 위해서는 힘으로 굴복시켜야 했는데, 마법만 연구하던 마법사가 몬스터를 이길 리 만무했다.
운 좋게 몬스터의 새끼나 알을 구해야 하는데, 다행히 자신의 재능을 알아챈 황제가 전격적으로 지원해 준 거였다.
평생에 하나 손에 넣기도 힘든 아라흐네의 알이나 레비아탄의 알을 두 개나 얻은 거였다.
그 덕분에 다들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설설 기는 거였다.
‘앞으로도 이러려면 더욱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길러 내야 해.’
푸글리니는 마음을 다잡으며 밖으로 나갔다.
자신이 머물던 허름한 오두막집 옆에는 조용하고 잔잔한 게 나름대로 운치 있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거기에 서 있으려니 카엘 일행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제일 선두에는 복수심에 눈먼 프리지가 서 있었다.
프리지는 검을 내밀어 푸글리니를 겨누며 소리쳤다.
“몬스터를 푼 사악한 마법사! 내 아버지와 가문의 복수를 하겠다!”
“크흐흐, 네 아비의 뒤를 얌전히 따라가거라.”
푸글리니가 웃으며 대꾸하자, 그의 뒤편 그림자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그건 핏빛 체구의 대형견으로 마계의 파수꾼, 헬하운드들이었다.
헬하운드들은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프리지에게 덤벼들었다.
그때 카엘이 외쳤다.
“브로칸!”
그러자 뭔가가 뛰어들더니 프리지 앞에 서는 게 아닌가?
분명 라이칸스로프였다.
푸글리니는 저 강인한 라이칸스로프를 보자마자 갖고 싶었다.
‘이미 성체라 무리겠지만…….’
헬하운드에 비하면 라이칸스로프가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1:1이었을 때의 일.
푸글리니가 부리는 헬하운드는 무려 십여 마리에 달했다.
한 번에 달려들어서 물어뜯으면 라이칸스로프의 재생 능력이라고 해도 별수 없을 게 분명했다.
“저 개새끼부터 해치워라!”
헬하운드들은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르르르르르!
컹컹!
십여 마리의 헬하운드들이 한 번에 라이칸스로프를 덮친 거였다.
라이칸스로프는 당황했는지 피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팟!
헬하운드들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어서 나가떨어졌다.
브로칸이 입고 있던 월도 갑옷의 칼날에 당한 거였다.
브로칸은 씩 웃으며 카엘을 돌아봤다.
“카엘 님, 거대화는 할 필요도 없네요.”
‘거대화? 무슨 소리지?’
푸글리니는 의아했지만, 지금 그걸 궁금해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프리지가 헬하운드를 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자이언트 뱃이여! 내 적들을 막아라!”
그러자 오두막의 천장에 빼곡히 붙어 있던 대형 박쥐 수백 마리가 날아왔다.
하나하나가 사람 몸통만 하다 보니 순식간에 하늘을 시커멓게 가려 버렸다.
그 시커먼 하늘은 그대로 프리지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때 세찬 바람이 몰아치며 시커먼 하늘을 막아 내더니 갑자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르타와 디오네가 정령술을 부려 협공한 거였다.
‘역시 이거로는 안 되나?’
푸글리니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카엘뿐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하나같이 만만찮은 상대였던 탓이다.
“도망친다. 나를 지키도록.”
“네! 모시겠습니다!”
마법사도 무서웠지만, 상대의 강함에 질린 용병들은 후퇴 명령에 안도하며 즉시 움직였다.
“어딜 도망가!”
프리지가 화를 내며 속도를 높였다.
정작 푸글리니는 오두막 뒤편이 아니라, 호수 쪽으로 도망치는 게 아닌가?
용병들은 마법사 푸글리니의 의도를 눈치챘다.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먹은 호수 속의 몬스터에게 유인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마법사야. 그 몬스터라면 저 괴물 같은 적들을 상대할 수 있겠지.’
그런 기대를 하며 호수까지 곧바로 내달렸다.
그때였다.
“레비아탄이여! 새로운 먹이를 받아라!”
철썩.
푸글리니의 외침에 고요했던 호수의 표면을 뚫고 레비아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어엉.
납작하고 긴 몸통을 가진 레비아탄은 기다란 주둥이를 벌리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 사이사이로 흉측한 이빨이 보였다.
“나왔다.”
“이제 살았어.”
용병들은 저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아군이라는 데 새삼스레 안도했다.
문제는.
텁썩.
용병들의 생각이 무색하게 레비아탄이 그대로 기다란 입을 벌려 용병 하나를 집어삼켜 버린 거였다.
“어, 어.”
“마법사님? 어떻게 된 겁니까?”
“저 녀석들이 생각보다 만만찮아서 어쩔 수 없다. 얌전히 먹이가 되거라!”
“으아아악”
푸글리니의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용병들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레비아탄이 내뿜는 불꽃에 당해 쓰러졌다.
레비아탄은 호수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와 쓰러진 용병들을 하나둘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걸 본 브로칸이 투덜댔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다면서 왜 저리 커요?”
그 말대로 레비아탄은 사람이 몇 명이나 오가도 될 동굴만큼 크고 길었다.
레비아탄이 완전히 뭍으로 나오자 호수의 물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위세에 놀란 브로칸이 물었다.
“카엘 님, 어떡하죠?”
“전력을 다해 싸울 수밖에.”
카엘은 그러면서 품 속에서 슬쩍 포션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여차하면 이걸 쓰면 되니까.”
“어, 그건!”
익숙한 색깔의 포션을 본 브로칸이 아는 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