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96화 (96/234)

96화 거대 거미의 침공 (2)

크르르르릉!

대지가 뒤흔들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브로칸이 당황했다.

“어?! 설마 지금 화산이 터지는 건가요?”

“아니, 화산은 아직이야.”

“그렇다는 건 불의 정령이 나타났나 보군요.”

디오네가 고개를 가로젓자 모르타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불의 정령이 나타난다는 건 분명 자신의 친구를 괴롭힌 일로 화가 나서 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특히 드래곤의 둥지에서 폭주한 불의 정령과 마주쳤던 모르타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섬을 빠져나가기 전에 한번은 부딪쳤을 일이지.’

아무리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해도 샐러맨더들이 꼬리를 잃고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당연히 불의 정령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렀을 테고, 자신이 준 불을 약탈해 간 걸 알게 된 불의 정령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화르르르륵.

시커멓던 사방이 붉어지면서 카엘 일행 주위로 위협하듯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죠? 정말 많이 화났어요.”

정령의 분노를 들은 모르타의 안색이 사색이 됐다.

“괜찮아.”

카엘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가방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꺼냈다.

그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나뭇가지였다.

“이거 줄 테니까, 받고 돌아가라고 해.”

“어, 그건 세계수의 나뭇가지 아니야?”

“네. 생명력이 가득 찬 이걸 선물로 주면 화를 풀겠죠.”

“이걸 왜 챙기라고 하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으셨군요.”

카엘의 지시에 따라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챙겨 놨던 모르타가 감탄했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내밀자 끝에서부터 천천히 타오르더니 어느 순간 말끔하게 사라졌다.

불의 정령이 받아 간 거였다.

동시에 사방에 치솟던 불길도 가라앉았다. 다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주위에서 맴돌았다.

“혹시 그것만으로 안 되는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니야…….”

브로칸의 우려에 모르타가 고개를 저으며 디오네를 바라봤다.

디오네는 불의 정령이 나타난 뒤로 조용했다. 잠자코 아련한 눈빛으로 불길을 바라볼 뿐이었다.

폭주한 정령이 아닌, 제정신의 불 정령을 오랜만에 마주해서였다.

불의 정령도 위협하기는커녕 디오네의 곁을 서성이는 것처럼 보였다.

“디오네 님은 왜 저러셔?”

“그게…….”

브로칸의 물음에 모르타가 조용히 설명했다.

카엘도 미리 원로 엘프 모이라에게 사정을 들어서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제국에 잡혀가서 귀가 잘린 엘프들과 달리, 디오네와 모이라는 이미 귀가 잘린 상태.

그 이유는 드래곤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나타난 드래곤은 세계수를 깔아뭉개고 그 자리에 둥지를 만들었다.

근처에 있던 정령들은 세계수가 소멸함에 따라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끼며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댔다.

정령과 교감하던 엘프들은 그 비명에 괴로워하다가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갔다.

몇몇 엘프들만이 정령들의 비명을 피하고자 스스로 귀를 잘라 내 겨우 살아남았다.

모이라도 디오네도 그런 엘프 중 하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카엘은 디오네가 왜 망설이는지 이해가 갔다.

‘정령을 볼 면목이 없다는 거겠지.’

디오네는 다시 정령과 소통하기 위해 귀를 재생하는 방법을 찾으려 그토록 헤맸었다.

그러나 막상 귀를 재생할 약을 얻고 나니 용기가 안 난 거였다.

아무리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괴로워하는 정령들을 버리고 외면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이번 일이 그 아픈 과거를 극복할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

그러나 디오네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불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꿀꺽.

“디오네 님…….”

내막을 들은 브로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내막을 아는 모르타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한참을 망설이던 디오네가 겨우 입 밖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안해.”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반응했는지 화염이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게 아닌가?

마치 괜찮다고, 울지 말라고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도 애틋한 광경이었다.

디오네는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뒤에야 눈물을 닦고서 카엘을 돌아봤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겠어? 나 여기서 재생 포션 먹을게.”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기다려 드릴 수 있어요.”

카엘이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디오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불길이 순간 울렁였는데, 왠지 시시덕거리며 웃는 것처럼 보였다.

디오네도 불의 정령의 말을 아직 못 들으면서도 그 분위기만은 읽었는지 더욱 고개를 숙여서 포션을 꺼내 마시는 데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잠시 후.

재생 포션을 마신 디오네는 몇백 년 만에 다시 생긴 귀를 만지작거렸다.

무사히 귀가 재생된 걸 본 카엘이 브로칸과 모르타에게 말했다.

“우리는 좀 떨어져 있자. 오랜만에 둘이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까.”

정령은 그 지역의 자연력의 크기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그 때문에 이만큼 큰 불의 정령은 다른 정령보다 만나기 힘들었다.

거리를 두고 서 있는데, 디오네가 조곤조곤 불의 정령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던 디오네는 가끔 카엘 쪽을 바라보다가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츠츠츳. 츠츠. 츠츳.

샐러맨더들이 하나둘 나타나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카엘 일행이 잘라서 꼬리가 없는 개체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샐러맨더가 주변에 가득했다.

“카엘 님, 괜찮을까요?”

“괜찮아. 봐 봐.”

걱정하는 브로칸에게 카엘이 샐러맨더를 가리켰다.

“춤추는 거 같아요. 귀여워.”

모르타의 감탄처럼 샐러맨더들은 카엘 일행을 위협하기보다는 꼬리를 씰룩거리면서 춤추듯 디오네를 맴돌고 있었다.

마치 디오네와 불의 정령의 재회를 축하하는 것처럼.

즐겁고 흥겨운 광경이었다.

카엘은 그 광경을 미소를 지으며 한참을 바라봤다.

* * *

카엘 일행이 할레마우섬을 나와 방주에 탑승을 마쳤을 때였다.

콰르르르르릉!

벼락이 치는 소리에 밖을 쳐다보니 화산 꼭대기에서 어마어마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화산재와 용암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잠잠하던 화산이 폭발한 거였다.

“와아! 큰일 날 뻔했네요.”

“이렇게 갑자기?! 전혀 낌새가 없었는데요?”

놀라는 브로칸과 모르타와 달리 카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됐다.

‘그냥 화산이 터질 리는 없고, 불의 정령이 한 짓이겠지.’

그것도 디오네를 배웅하기 위해서 한 게 틀림없었다.

디오네도 그걸 깨달았는지 난감해했다.

“저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항상 과하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내심 기쁜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카엘 일행은 무사히 샐러맨더의 화염 꼬리를 잔뜩 챙겨서 토스노산맥으로 향했다.

* * *

“브란 형님! 저 왔습니다.”

카엘은 브리운 공작기를 높이 들어 올린 부대로 달려가서 소리쳤다.

그러자 브란이 뛰쳐나오며 반갑게 맞았다.

“그래, 잘 왔다! 아주 빨리 왔구나!”

함께 있던 소드 엑스퍼트 소피아와 루크를 비롯해 옆에는 먼저 출발한 프레데릭과 파니틱 신전 기사단도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요.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거미줄이 보이는 게 저기까지 점령당한 듯하구나.”

브란이 가리키던 곳은 성 진입로에 있던 작은 마을.

곳곳에 시커먼 연기가 오르는 걸 봐서는 거미줄을 태운다고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라흐네의 거미줄은 일반적인 불로 태울 수가 없었다.

그걸 본 소피아가 안타까워했다.

“도망쳐 오는 사람도 하나 없으니 얼마나 피해가 심할지…….”

“당장 구하러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카엘 님의 당부를 기억하고 참았소.”

프레데릭도 눈을 부릅뜨고 마을을 쳐다보며 말했다.

신실한 신전 기사로서 지극히 불경한 저런 몬스터를 앞에 두고 참는다는 게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발휘한 거였다.

그만큼 카엘을 신뢰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잘하셨습니다. 곧바로 구하러 가죠.”

“오! 역시 카엘 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어서 갑시다!”

카엘의 대답에 파나틱 신전 기사단이 환호하며 동조했다.

“바로 움직인다고? 여기까지 먼 길을 왔는데 괜찮겠느냐?”

“많이 피곤하실 텐데…….”

브란과 소피아가 우려했지만, 카엘은 웃으며 대꾸했다.

“문제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사람들을 구해야죠.”

“나도 도와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귀를 되찾은 디오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제 불의 정령을 부를 수 있는 디오네가 도와주면 확실히 아라흐네의 거미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샐러맨더의 불꽃 꼬리를 가져온 건 여러모로 필요해서였다.

불꽃 꼬리를 매개체로 불의 정령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데다가, 디오네 혼자 모든 거미줄을 감당하긴 어려울 테니까.

회귀 전 제국에서 아라흐네를 퇴치할 때도 화염 마법사와 마법적인 불을 담은 마법 도구를 다수 동원했었다.

카엘은 샐러맨더의 불꽃 꼬리를 브란에게 십여 개 정도 넘겼다.

“이거 가지고 계시다가 혹시 거대 거미들이 거미줄을 쏘면 쓰십시오.”

“그래, 고맙다.”

카엘은 성녀 아네스에게도 말했다.

“혹시 다친 분들이 마을 밖으로 나오면 치료 좀 부탁해.”

“맡겨 주세요!”

대답을 들은 카엘은 마을로 달려갔다.

그 뒤를 라이칸스로프 브로칸과 엘프인 디오네와 모르타.

신전 기사인 프레데릭과 소드 엑스퍼트인 소피아와 루크가 뒤를 따랐다.

일곱밖에 안 됐지만, 어지간한 기사단은 그대로 분쇄할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거미줄이 빼곡하게 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서는 거대 거미가 보였다.

거대 거미는 그 이름에 걸맞게 몸통만 해도 사람만 했는데, 기다란 다리까지 보면 몇 배나 거대해 보였다.

거대 거미들은 난데없는 인간의 등장에 이쪽을 주시하며 동향을 살피는 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디오네는 그러든 말든 거침없었다.

“불태워!”

디오네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거미줄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샤사삿.

거기에 당황했는지 거대 거미들이 빠르게 움직여 자취를 감췄다.

그걸 본 카엘이 경고했다.

“머리가 좋은 녀석들이다. 어디서 기습해 올지 모르니까 조심해!”

“네!”

다들 힘차게 대답하고 마을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저 멀리 빠르게 도망치는 거대 거미가 보이는 걸 보고 쫓아갔다.

그런데 카엘의 경고대로 지붕 위에 숨어 있던 거대 거미들이 펄쩍 뛰어 내려오며 기습해 오는 게 아닌가?

“꺅!”

“큭.”

갑자기 나타난 거대 거미에 놀란 소피아가 비명을 질렀다.

루크도 몸을 움츠리며 어떻게 할지 몰랐다.

“위험해.”

“가만히 서서 뭐 해!”

그걸 카엘과 디오네가 나서서 하나씩 해치웠다.

카엘이 괴력을 이용해 휘두른 검에 거대 거미가 몸통째로 반 토막이 나고.

디오네의 세검이 거대 거미를 꿰뚫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당황한 둘을 향해 아조트가 앙칼진 목소리로 나무랐다.

-야! 둘 다 똑바로 못 해?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자세를 못 잡았어요.”

-그따위로 싸울 거면 그냥 검을 쥐지 말든가!

소피아와 루크는 주눅이 든 채 대답했지만, 아조트는 화가 가시지 않는지 한 번 더 소리쳤다.

그걸 본 브로칸과 모르타가 한마디씩 했다.

“너무 화내는 거 아니에요? 라이칸스로프도 첫 사냥에서는 보통 실수하는데…….”

“맞아요. 그러다가 더 소심해지면 어쩌려고요.”

그런 둘에게 카엘이 말했다.

“괜찮아, 저 두 사람은 다르니까. 바로 정신 차릴 거야.”

그 말에 브로칸이 소피아와 루크를 바라보니 정말 둘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 멋지게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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