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놀과 오크 내전 (2)
새 라이프 베슬을 손에 넣은 데비하이드는 슬슬 카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로도 힘들 거 같은데. 조금 더 컸으면 좋겠지만.
“그래? 혹시나 해서 하나 더 준비했지.”
카엘이 새로 꺼낸 라이프 베슬은 두 뼘 정도로 길었다.
-아니,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주지.
“원래라면 말 잘 들으면 주려고 했는데 지금 필요하겠군. 이거면 되겠어?”
-응! 할 수 있어.
“그럼, 마력부터 채우자.”
카엘이 현자의 돌까지 꺼내자 모르타가 눈을 크게 떴다.
“어, 그것까지 주면…….”
모르타가 말을 마치기 전에 데비하이드는 바로 현자의 돌을 낚아챘다.
한 손에는 현자의 돌, 다른 한 손에는 더 큰 크기의 새 라이프 베슬을 들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카엘이 가지고 있던 기존 라이프 베슬이 깨지더니 새로운 라이프 베슬에 생명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데비하이드의 체형도 커지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오랜만에 느껴 보는 힘이군. 내게 이 힘을 넘겨 준 걸 후회하게 해 주마!
데비하이드가 사악한 기운을 방출하며 위협하는 걸 보고 카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매번 그러는 거 지겹지도 않아?”
-음?
데비하이드가 카엘의 여유로운 태도에 위기감을 느끼는 순간, 카엘이 중얼거렸다.
“에미시오.”
꿀렁.
라이프 베슬 안이 출렁이더니 생명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데비하이드의 신체도 조금씩 작아져 갔다.
-엇?! 뭘 한 거야?
“블렌트가 드워프들한테 몇 가지 룬을 배워 왔거든. 그중 하나인 발산의 룬을 새겨 놨지.”
-크윽. 어쩐지 순순히 준다고 했다.
“누가 할 말인데.”
-흥!
데비하이드는 할 말이 없는지 뒤돌아 쭈그려 앉았다.
카엘은 생명력이 그만 줄어들게 했지만, 데비하이드는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됐어! 이대로 목줄 잡혀 사느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지. 소멸시킬 테면 소멸시키든가!
생에 대한 집착으로 리치가 된 주제에 저런 말까지 하다니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내가 풀어 준다고 했잖아. 그 전에 틈만 나면 이러니까 안전장치를 달아 둘 수밖에 없지.”
-몰라. 안 해!
“정말 안 해? 이번 일을 잘하면 메라자이드에게 엿 먹일 수 있을 텐데.”
-…정말?
데비하이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메라자이드는 데비하이드의 사제인 리치, 예전에 마주쳤을 때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빠 보였다.
그걸 기억한 카엘이 데비하이드가 솔깃해할 걸 알고 꺼낸 말이었다.
-근데 이번 일로 어떻게 메라자이드를 엿 먹일 수 있어?
“이렇게?”
카엘은 조용히 설명했다.
그걸 들은 데비하이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안광을 깜빡거렸다.
-헐. 정말이야?
“그래. 이제 할 마음이 생겼어?”
-흐흐흐, 그렇게만 된다면 안 할 이유가 없지.
데비하이드는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듯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데비하이드는 다시 라이프 베슬을 가득 채운 뒤, 가까이 있는 놀 사체를 언데드 몬스터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걸 본 브로칸이 걱정했다.
“근데 아무래도 저 언데드 몬스터로는 힘들 거 같은데요?”
확실히 새로 나타난 오크 워리어 덕분에 오크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어지간한 언데드 몬스터로는 오크들을 이기기는커녕 흔들기도 힘들어 보이긴 했다.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조금 모자라려나? 그래서 더 준비해 둔 게 있지.”
카엘은 포션 하나를 꺼냈다.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색깔의 포션이었다.
모르타와 브로칸이 곧바로 호기심을 보였다.
“이건 뭔가요?”
“킁킁. 설마 독약?!”
냄새를 맡은 브로칸이 화들짝 놀랐다.
“독약 성분이 들어가긴 했지만, 독약은 아니야. 굳이 이름 붙이자면 놀 강화제? 이거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미친 듯이 싸울걸.”
환각 성분으로 정신이상을 유발하는 짐노필러스라는 약재에 콕클러블이라는 광견병 치료제로 필요 이상으로 광증이 나타나지 않도록 만든 거였다.
“아, 그렇군요. 근데 이걸 어떻게 먹이죠?”
“조금만 마셔도 효과가 있으니까, 놀이 쓰는 우물이나 물웅덩이에 뿌려 두면 돼.”
“앗. 그러면 근처에 가서 제가 바람으로 날려 보내면 되겠네요.”
“그래. 부탁할게.”
“네. 저희한테 맡겨 주세요.”
자신 있게 대답한 브로칸은 모르타와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둘을 보낸 카엘은 데비하이드를 찾아갔다.
데비하이드는 오랜만에 신났는지 그사이에 놀의 사체로 언데드 몬스터를 잔뜩 만들어 놓은 채였다.
어림잡아도 십여 마리는 됐다.
“순식간에 만들었네?”
-이 정도쯤이야 별거 아니지. 그래도 이거로는 저 오크 워리어들을 이기긴 힘들걸.
데비하이드마저 브로칸과 같은 걱정을 했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아무리 오크라고 해도 언데드 몬스터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테니까.”
브로칸과 모르타는 언데드 몬스터에 익숙했지만, 오크들은 아니었다.
몬스터 대침공 때 처음 대규모 언데드 몬스터를 맞닥뜨린 오크 군단이 대패한 적도 있었으니까.
마침 얼마 안 지나 근처에서 오크 순찰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 어디 상대해 봐.”
-안 될 거 같은데.
“왜 이리 자신이 없어? 그럼 길목에 숨어 있다가 기습해!”
-아, 알았어.
카엘의 지시에 데비하이드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런 데비하이드에게 카엘이 다시 조언했다.
“한 녀석을 쓰러트리면 바로 언데드 몬스터로 만들어 버리면 돼.”
-…알았다니까. 실패해도 뭐라고 하지만 마.
데비하이드는 힘없이 놀 스켈레톤과 좀비들을 움직였다.
* * *
“크취익.”
주변을 순찰하던 오크가 투덜거렸다.
“놀 녀석들을 다 처바르고 있는데 귀찮게 순찰은 웬 순찰.”
“맞아! 우리도 전투 참여하고 싶은데.”
그러자 오크 워리어가 소리쳤다.
“시끄럽다, 이것들아! 놀 새끼들은 더럽고 치사한 놈들이라 무슨 수를 쓸 줄 모른다. 기습당하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해!”
“…….”
“…그래도 최근에 이곳에서 싸웠는데, 뭐가 더 있겠어?”
“그러게.”
“쉿.”
오크 워리어가 다른 오크를 조용히 시키며 좌측 편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지저분한 놀의 털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앗.”
“아직 우릴 눈치 못 챈 거 같은데, 바로 해치워 버려.”
그 말에 가까이 있던 오크가 살금살금 다가가 도끼를 냅다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통에 도끼가 제대로 파고들었다.
“크취익! 한 방이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도끼를 회수하던 오크가 이상함을 느끼다가 이내 멈칫했다.
머리통이 쪼개진 놀이 그대로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을 쳐다봤기 때문이다.
혀를 기다랗게 내민 얼굴, 튀어나온 눈알과 시선을 마주치자 놀라 몸이 굳은 거였다.
그 순간, 달려든 놀의 이빨이 오크의 목덜미에 박혔다.
“크아아아악!”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비명을 들은 다른 오크들이 다가오려던 차에 사방에서 놀 좀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크에에에에.”
사체가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에 다들 주춤하며 뒷걸음질했다.
“뭐야? 저것들.”
“상태가 이상한데?”
“죽은 거 아니야?”
“야! 겁먹지 말고 싸워. 미친 놀이라고 해 봐야 놀이다!”
오크 워리어가 부하들을 독려하는 순간이었다.
저 앞에서 놀에게 물렸던 오크가 몸을 일으켰다.
“저 녀석 봐! 벌써 놀 쓰러트리고 일어났잖아!”
오크 워리어가 신나서 소리쳤지만, 정작 일어난 오크의 상태는 이상했다.
눈이 뒤집혀 크르릉거리는 게 분명 눈앞의 놀처럼 괴물이 되어 있었다.
“오크도 저렇게 되다니.”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
“시, 싫어!”
크르릉!
오크들이 충격을 받은 사이, 어느새 제법 거리를 좁힌 놀 좀비들이 오크들에게 덤볐다.
“크아악.”
오크는 물론, 오크 워리어마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뒤에 있던 오크 두 마리도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걸 본 데비하이드가 기막혀했다.
-아니, 무슨 오크가 저렇게 겁이 많아?
“오크는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어야 전사의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그런 그들에겐 흉측한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겠지.”
-그, 그렇군.
실제로 어마어마한 수의 오크들이 오크가 언데드 몬스터가 된 걸 보고 정신착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마저도 오크 로드가 나서면 소용없지만, 당분간은 통하겠지.’
카엘은 데비하이드를 돌아봤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그래, 잘 알았으니까 이제 나한테 맡겨 둬.
데비하이드가 사악하게 웃었다.
* * *
죽은 오크가 살아나 공격해 왔다는 소문은 오크 진영 내에 삽시간에 퍼졌다.
그 소문을 들은 오크들은 겁을 집어먹었는데, 실제로 곳곳에서 오크 좀비가 나타나 공격해 오자 도망치기 바빴다.
그 용맹한 오크 워리어도 마찬가지.
덕분에 오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진영 내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오크와 맞상대하고 있던 놀들은 그 분위기를 바로 느꼈다.
“오크 녀석들 요즘 이상하지 않나?”
“맞아. 한창 유리한 상황인데도 공세가 약해졌어.”
“무슨 꿍꿍이일까?”
“싸우기 지친 걸지도 모르지.”
족장 회의에 모인 놀 치프들이 수군거릴 때, 대족장 아미르가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쪽 분위기도 좀 달라진 거 같던데?”
“그건 그래. 다들 싸우고 싶어서 난리다. 힘이 넘친다나?”
“우리 부족에도 오크들을 물어뜯고 싶다고 무작정 덤비려는 녀석들이 늘었어.”
“지금은 눌러 놓고는 있는데, 통제가 쉽지 않아. 골치 아프군.”
놀 치프들은 몰랐지만, 카엘이 브로칸과 모르타에게 뿌리게 한 놀 강화제의 효과였다.
그걸 모르는 아미르는 씩 웃었다.
단순히 아군의 전의가 높아진 줄 안 거였다.
“다들 싸우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나 본데, 이 여세를 몰아 역공에 나선다!”
“오오!”
“이번에야말로 오크 놈들을 회색산맥에서 내쫓자고.”
“아니! 깡그리 죽여 버려야지!”
아미르의 결정에 놀 치프들이 환호했다.
그동안 수세에 몰리던 놀들은 데비하이드의 언데드 몬스터와 놀 강화제에 힘입어 오크와 대등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한 전황에 대해 보고받은 오크 로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추궁했다.
“아직도냐?! 왜 아직도 놀 녀석들을 쓸어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냐?”
“그게…….”
퍽!
“답답하게 굴지 말고 또박또박 말하라.”
오크 로드가 우물쭈물하는 오크 워리어의 얼굴에 대형 도끼를 날렸다.
오크 워리어는 피하지도 못하고 얼굴에 대형 도끼가 처박혀 절명했다.
바로 옆에 무릎 꿇고 있던 오크 워리어가 순식간에 처형당하는 걸 본 오크 워리어가 빠르게 대꾸했다.
“죽은 전사들이 나타난 것 때문에 다들 겁을 집어먹어서 그렇습니다.”
“뭐?! 전사의 쉼터에 있던 오크 워리어들은 죽은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잠시 쉬고 있었을 뿐이라고!”
“쉼터의 전사들에 대한 게 아닙니다. 심지어 쉼터의 전사들이 더욱 겁을 먹고 있습니다.”
“뭐라고?”
오크들이 오해하는 게 아니라면, 죽은 오크들이 나타났다는 건 그것뿐이었다.
‘설마 언데드 몬스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오크 로드는 언데드 몬스터의 존재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춥고 척박한 이곳에 언데드 몬스터가 자연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체가 있어도 곤충과 동물들이 뜯어먹기 바빴으니까.
그렇다는 건.
‘네크로맨서가 나타났나?’
일전에 인간과 드워프가 드래곤 둥지를 헤집었으니 거기 있던 네크로맨서가 나와도 이상하진 않았다.
드래곤 둥지에는 드래곤이 붙잡아 둔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스켈레톤이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면 어쩌면 외부에서 나타난 네크로맨서일 수도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오크 로드가 호탕하게 부하들에게 외쳤다.
“다들 겁먹을 거 없다! 그건 죽은 오크가 되살아난 게 아니다! 사악한 마법사가 영광스러운 전사의 껍데기를 모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냐?”
“…….”
또 대형 도끼가 날아올까 두려웠던 오크 워리어가 움찔하며 움츠렸다.
그걸 본 오크 로드도 말문이 막혔다.
부하들이 당장 대꾸는 못 해도 여전히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게 분명해서였다.
무엇보다 그간 비축해 놨던 오크 워리어들이 더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게 더 문제였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군.’
이 상태로는 그간 공들여 비축해 왔던 전력이 계속 깎여 나갈 게 분명했다.
잠깐 고민하던 오크 로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크 제사장에게 가겠다.”
재수 없지만, 오크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그들이라면 오크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