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귀환 성공
“오크가 잔뜩 있네요. 우리 잡으려고 저렇게 몰려왔다니.”
브로칸이 혀를 내둘렀다.
그 말대로 드래곤 둥지 입구인 동굴 바깥에는 오크들이 새카맣게 몰려 있었다.
그 수만 어림잡아도 수백!
아니, 잘 안 보이는 곳에도 오크가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허, 저걸 다 해치우려면 도끼를 일주일 내내 휘둘러도 모자라겠구먼.”
아무리 오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도끼를 휘두른다는 드워프라도 이 정도 숫자의 오크에는 질린 듯했다.
“어떡하면 좋죠? 나중에 다시 기회를 봐서 나오는 게 나을까요?”
“글쎄. 우리가 무사히 나온 것까지 봤으니까 계속 기다릴걸?”
모르타의 말에 디오네가 고개를 저었다.
카엘도 디오네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곳에서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몰래 빠져나온 게 성내에 퍼지면 난리가 날 테니까.’
다행히 생각보다 빨리 일을 끝냈다.
이제 하루가 지났으니까 잘만 하면 큰 소란이 되기 전에 클리페우스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어쩔 생각이야?”
“뚫고 갈 겁니다.”
“정말? 자신 있어?”
정작 카엘을 보채던 디오네는 카엘이 자신 있게 말하니까 되레 우려했다.
실제로 회귀 전 스승은 드래곤 둥지에서 나와 오크들의 포위를 뚫고 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죽기 직전까지 갔다.
디오네가 아무리 강해도 많은 수의 오크에게 둘러싸이면 답이 없었다.
징집한 인간 병사라면 옆의 전우가 죽어 나가는 걸 보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라도 하겠지만.
오크들에게서는 죽음의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전장에서 강한 자에게 죽는 건 영광.
전사의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고 생각하기에 미친 듯이 덤볐다.
붙는 녀석들 말고도 투척용 도끼를 서슴없이 던져 댔다.
정령술이라도 쓸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다 피하거나 막는 건 불가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승 혼자가 아니니까.’
자신과 여러 동료와 함께 싸우면 충분히 뚫고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자신 있습니다.”
“카엘 님이 된다면 되는 거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긴 저 친구가 그렇다면 별문제 없겠지.”
그러자 브로칸부터 모르타, 블렌트까지 카엘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걸 본 디오네가 피식 웃었다.
“다들 신뢰하는 거 보니 믿는 구석이 있는 건 확실한가 보네. 좋아. 나도 거들어 줄 테니까, 한번 해 보자고.”
* * *
“크취익. 이게 전부인가?”
오크 워리어가 동굴 앞에 몰려 있는 오크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부하 오크가 되물었다.
오크 로드에게 금지로 들어간 드워프와 그 일행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어떻게든 죽이거나 잡아 오라는 오크 로드의 명령에 인근에 있는 모든 오크 부대에 연락했더니 이만큼 몰려온 거였다.
1개 부대가 100마리 전후, 그 부대가 십여 개가 넘게 모였으니 숫자는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부대를 통솔하는 오크 워리어는 없이 부하들만 보내온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몰려온 오크들도 구시렁댔다.
“뭐야? 오크 로드의 명령이라 해서 모였더니만, 겨우 모험가 몇을 잡는다고 불렀어?”
“저 겁쟁이가 쓸데없이 일을 키운 거 같은데.”
“난 또 놀 녀석들을 쓸어 버리려는 줄 알았지.”
“안 그래도 놀들이 저쪽 편에 잔뜩 모여 있던데, 저것들이나 쓸어 버릴까?”
“조용! 오크 로드의 명령을 무시할 작정이냐?”
오크 워리어가 소리치자 오크들이 겨우 조용해졌다.
‘차라리 통제하기에는 이 편이 나을지도.’
“…근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나올 때까지! 오크 로드께서 반드시 죽이거나 잡아 오라고 하셨으니까. 일단 놀 녀석들이 끼어들면 또 난장판이 될 테니까, 최대한 멀리 밀어내.”
오크 워리어의 말에 외곽의 오크들이 신이 나서 달려갔다.
심심한 차에 그나마 힘쓸 일이 생긴 거였다.
그때였다.
“어, 저기 누가 있는데. 이제 나오나 봐!”
오크의 말대로 동굴 입구 쪽에 인간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됐다! 당장 잡으러 가자!”
혈기 넘치는 오크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가려는 걸 오크 워리어가 막았다.
“안 돼. 나올 때까지 기다려! 금지에 들어갔다가는 다 저주받는다. 놀 녀석들도 들어가자마자 다 죽었어!”
그 말에 오크들이 멈칫했다.
죽음이 두렵다기보다는 싸우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죽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가는 전사의 천국에 한 걸음도 못 디딜 테니까.
“근데 드워프와 인간들은 저기에서 어떻게 멀쩡한 거지?”
“무슨 치사한 술수를 썼겠지.”
“기다리고 있는 걸 봤으니까 안 나올 거 같은데…….”
오크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였다.
“으악!”
“컥!”
동굴 바로 앞을 지키고 있던 오크들이 쓰러지더니.
드워프와 그 일당이 뛰쳐나왔다.
“이렇게 빨리?”
“젠장!”
오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오크 워리어가 소리쳤다.
“우리 숫자가 많으니 몰아붙이면 된다! 다 죽여도 되고, 팔다리가 없어도 되니까, 일단 막아!”
외침에 정신을 차린 오크들이 드워프 일당 앞을 가로막아 상대의 돌격을 멈췄다.
그러는 사이 주위에 있던 오크들이 공성전 때 쓰는 대형 방패로 벽을 세웠다.
“오! 됐다!”
오크 워리어가 쾌재를 불렀다.
방패 너머가 잘 안 보이긴 해도 드워프 일당을 몰아넣는 데 성공한 거였다.
그러나.
휙. 휙. 휙.
“크취익.”
“으어억.”
“나, 날아간다!”
방패를 든 오크들이 허공으로 새처럼 날아가는 게 아닌가?
그러나 방패는 날개가 아니기에 그대로 추락해서 다른 오크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인간이 오크를 방패째로 들어 집어 던지는 거였다.
믿기지 않는 괴력이었다.
‘설마 클리페우스성에 괴력을 가진 인간이 있다던데 그자인가?’
오크 워리어는 도리어 잘됐다 싶었다.
‘안 그래도 오크 로드께서 한번 언급하신 적이 있지. 저 인간까지 해치우면 기뻐하실 거야!’
문제는 오크 워리어의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거였다.
드워프만 해도 만만찮은 상대가 아닌 데다가 라이칸스로프도 짐승처럼 날뛰는데 공격을 해도 금방 자연 치유가 되니 까다로웠다.
더욱 상대하기 힘든 건 엘프 둘.
정령술을 부리는 엘프 때문에 투척 무기가 통하지 않고, 가방 멘 엘프가 휘두르는 가는 검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오크들의 눈을 찌르고 목을 벴다.
‘이대로 밀리면 놓칠 거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오크 워리어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오크 워리어들더러 오라고 해! 부하들만 보내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야.”
그렇게 소리치고 얼마 안 되어서 오크 워리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여기까지 와 놓고 외곽에서 딴청을 피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거면 충분히 저것들을 이길 수 있어.’
혼자서 오크 100마리를 상대할 수 있는 오크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오크 워리어.
그 오크 워리어 수십 마리가 온 이상 오크 로드가 맡긴 임무를 완수하고도 남았다.
“나 참, 이게 우리 손까지 필요한 일이야?”
“나 같으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혼자 해결한다.”
“지금 비아냥댈 때가 아니야. 오크 로드께서 말한 인간도 나타났다.”
그 말에 오크 워리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저 성의 우두머리처럼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될 인간이?”
“이 기회에 해치우는 게 좋겠군!
“모두 한꺼번에 덤비자!”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진 오크 워리어들이 뭉쳐서 드워프와 그 일당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이 가세하자 오크 워리어의 피해가 좀 생겼어도 드워프 일당도 주춤했다.
거기다 오크들까지 거들자 상대는 꼼짝달싹하기 어려워 보였다.
‘크흐흐, 이대로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다.’
전황을 파악한 오크 워리어가 소리쳤다.
“근처에 오크 워리어가 있다면 모조리 오라고 해!”
크르릉!
갑자기 천둥이 친 듯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라이칸스로프가 나타난 거였다.
“어, 저거 뭐야?”
오크들이 놀라는 사이, 거대 라이칸스로프는 순식간에 오크 워리어 둘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
마치 괴력을 가진 인간이 하나 더 있는 것만 같았다.
“젠장! 물러서지 말고 다 달라붙어!”
오크 워리어의 지시대로 오크들이 거대 라이칸스로프에게 덤벼들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
오크들에게 움직임이 봉쇄된 거대 라이칸스로프가 괴로운지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회색산맥을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울부짖어 봐라. 우리가 물러나는지! 이대로 증원만 오면…….’
오크 워리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증원이 오는 걸 기다렸다.
그때였다.
컹! 컹컹!
저 멀리서 놀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증원 대신 놀의 대부대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거대 라이칸스로프의 울음에 자극받은 놀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공격해 온 거였다.
그걸 본 오크 워리어는 아차 싶었다.
“젠장. 정말 개판이 됐잖아.”
* * *
“이대로 돌파한다. 브로칸, 앞장서!”
“네!”
카엘의 명령에 거대화된 브로칸이 힘차게 대답하며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달라붙은 오크들은 전혀 브로칸을 저지하지 못했다.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어도 금방 회복됐으니까.
그나마 골치 아픈 건 악다구니를 쓰며 덤벼드는 놀이었다.
브로칸도 놀이 싫긴 했지만, 눈깔이 뒤집혀 미친개처럼 덤벼드는 모습에 질려 버렸다.
어쨌든 브로칸이 선두에서 오크와 놀들을 뚫고, 카엘과 나머지가 따라가면서 뒤에서 붙는 몬스터들을 떨쳐 냈다.
‘가능하면 거대화하는 건 안 보여 주고 아껴 두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지.’
이대로 버티는 건 가능하겠지만, 몬스터들이 더 늘어날 판이라 어쩔 수 없이 거대화 물약을 먹으라고 했다.
그 와중에 브로칸더러 놀의 주의를 끌게 해 이전처럼 오크와 놀이 드잡이질을 하게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그 덕분에 카엘 일행은 몬스터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었다.
“자, 여기서 쉬죠.”
카엘은 일행을 데리고 레인저들이 쓰는 은신처로 향했다.
땅을 1미터 정도 파 놓은 이곳은 주위를 고약한 냄새와 자연물로 위장해 몬스터들의 감시를 피해 잠깐 쉬기 좋았다.
다들 은신처에 도착하자마자 지쳐 쓰러져 있는데 디오네가 감탄했다.
“이야. 설마 했는데 이 난리를 뚫고 무사히 탈출하다니. 대단해. 덕분에 살았어.”
“함께 힘을 합친 덕분이죠. 다들 고생했어요. 이것 좀 드세요.”
카엘은 웃으며 일행에게 회복 포션을 나눠 마시게 했다.
“으으. 실은 나도 오크 품에 둘러싸여 죽는 줄 알았네.”
앓는 소리를 하는 블렌트를 보며 다들 웃었다.
“푹 쉬면 좋겠지만, 바로 출발하는 게 좋아요. 지금 잔뜩 독이 올라 여기저기 찾고 있으니까요.”
카엘은 그렇게 말하며 출발 준비를 했다.
회복 포션을 마시고 조금 기운을 회복한 일행은 은밀히 움직여 클리페우스성에 무사히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다시 뒷구멍을 통해 들어가는데 디오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몬스터도 없는데, 꼭 이리로 들어가야 해?”
“사정이 있어서요.”
카엘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능한 한 은밀히 들어가는 게 좋았다.
꼬박 하루 만에 돌아왔으니 카엘이 회색산맥으로 향한 걸 완전히 비밀로 하지는 못해도 어머니의 귀에까지 안 들어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먼저 가 있어. 이따가 갈게.”
“네.”
“디오네 님은 저희랑 가요.”
카엘의 말에 브로칸이 대답하고, 모르타가 디오네를 잡아끌었다.
미리 말해 둔 대로 이주민 거주 구역으로 향한 거였다.
그러고 카엘은 내성으로 향하는데 분위기가 무거웠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며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면서 방에 들어갔는데 소피아가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저기 카엘 님, 마님이… 마님이…….”
“음? 어머니께 무슨 일 있어?”
“쓰러지셨어요!”
“뭐라고?!”
어머니가 쓰러졌다니!
깜짝 놀란 카엘은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채 누워 계셨는데, 미간을 모으고 전신에서 쉴 새 없이 땀을 흘리는 게 상태가 심각했다.
‘회귀 전에 아프셨을 때보다 너무 빠르잖아.’
스승을 일찍 만난 건 좋았지만, 어머니까지 아프시다니.
심지어 만약을 위해 성녀 아네스에게 기도를 부탁해 뒀는데, 신성력도 안 통한 모양이었다.
“허, 정신 차리시오.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찌 산단 말이오…….”
아버지 티겔 브리운이 어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지금도 어머니보다 안색이 나쁜데, 회귀 전처럼 돌아가시면 크게 충격을 받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카엘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회귀 전에는 허무하게 돌아가셨지만, 이번에는 치료할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 이번에는 꼭 낫게 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