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85화 (85/234)

85화 카엘의 스승

카엘의 스승은 회귀 전 봤던 그대로였다.

왜소한 소녀의 몸에 자기 몸보다 큰 가방을 멘 게 영락없는 탐험가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온갖 약재를 찾아다니는 탐험가기도 했지만.’

그런 스승이 갑자기 나타나 장난기 어린 얼굴로 카엘을 놀렸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고 해도 그렇게 표식을 남겨 두면, 이렇게 추적당한다고. 덕분에 쉽게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일부러 남겨 둔 겁니다만.”

“흠, 그래?”

카엘이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하자 스승의 목소리가 묘해졌다.

열받으라고 한 소린데, 원하는 반응이 안 나온 거였다.

막상 카엘도 그토록 만나고 싶던 스승을 앞에 두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너무 갑작스레 나타난 거였다.

‘분명 여기 오는 건 한참 뒤일 텐데.’

최소로 봐도 1년, 최대로 보면 2~3년은 더 남았다.

그 때문에 현자의 돌을 찾은 뒤, 쪽지를 남겨 클리페우스성으로 찾아오게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나타나다니.

그사이 스승은 카엘 일행 중 모르타가 있는 걸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어, 엘프잖아. 이야, 귀가 멀쩡한 엘프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

“마, 만지지 마세요.”

“아, 미안.”

모르타의 귀를 만져 보던 스승은 순순히 사과하고 물러났다.

그러더니 돌변해 카엘을 쏘아붙였다.

“어쨌든 현자의 돌은 양보 못 하니까 여기서 꺼져.”

“꺼지라니, 같이 찾으면 되지 않습니까?”

카엘의 말에 스승이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마검을 들고 다니고, 언데드 몬스터를 이용하는 녀석은 못 미더운데?”

금방 풀어 놓은 데비하이드는 물론, 허리춤의 검도 마검 아조트라는 걸 바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런 지적은 어이없긴 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가르친 건 자기면서.

“어차피 현자의 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귀를 재생하는 약을 만들려는 거죠.”

카엘의 말에 스승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넌 뭐야?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알지?”

‘역시나.’

블렌트 때도 느꼈지만. 회귀 전의 기억으로 친근감을 가져도 상대는 모른다. 괜히 친근하게 굴거나 아는 체해 봐야 방금처럼 경계심만 샀다.

‘그렇다고 해 봐야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지만.’

심지어 스승은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스승이 회색산맥을 뚫고 나오다 죽을 뻔한 걸 레인저들이 구조해서 목숨을 빚지지 않았으면 카엘을 떠맡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찌 됐든 스승에게는 받은 게 많았고, 지금이 그걸 돌려줄 기회였다.

카엘은 모르는 척 말했다.

“귀 때문에 정령의 소리를 못 듣는 엘프들을 많이 봐서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흥, 네가 어떻게 도와준다고.”

“맞아요. 카엘 님이 저희를 제국의 마수에서 구해 줬을 뿐만 아니라. 귀를 재생해 주셨습니다.”

“정말? 어떻게?”

처음에는 경계하던 스승도 같은 엘프인 모르타까지 옹호하자 관심을 보였다.

그때였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어느새 카엘의 어깨 위에는 데비하이드가 앉아 있었다. 전보다 훨씬 작아진 채로.

“엥? 여기 왜 있어?”

브로칸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카엘은 곧바로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저렇게 작아진 걸 봐서는 분명 소멸했다가 재생한 거였다.

그렇다는 건.

“다들 조심해!”

카엘이 아조트를 뽑으며 외치자마자 보물 창고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카엘을 공격했다.

아조트로 막고 보니 용아병이었다.

-침입자. 제거한다.

“젠장,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사고라니 섭섭하게, 현자의 돌을 찾으러 들어갔더니 너무 넓잖아. 근데 스켈레톤이 있길래 좀 쓰려고 했더니 용아병이 공격했어.

데비하이드가 겁도 없이 드래곤이 부리던 스켈레톤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용아병이 반응하지. 그냥 스켈레톤인 척하면서 찾았으면 됐잖아.”

“오호. 제법 힘이 센데. 그럼 수고해.”

카엘이 용아병의 공격을 막아 낸 걸 본 스승이 감탄하면서도 그 틈을 이용해 보물 창고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용아병은 그리 만만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침입자. 제거한다.

용아병은 카엘을 내버려 두고 스승을 쫓아가 공격했다.

“치, 역시 안 통하나.”

스승도 예상한 듯 가느다란 검을 꺼내 용아병의 공격을 흘리더니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카엘 일행에게 소리쳤다.

“야! 너희 잘못이니까, 이거 너희가 책임져.”

“싫은데요. 자, 도망가자.”

카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브로칸과 모르타를 데리고 그대로 뒤돌아 비밀 통로로 숨었다.

블렌트도 드워프들과 함께 있는 이상 걱정할 거 없었다.

혼자 용아병과 싸우게 된 스승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이기긴 힘들어도 지진 않는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용아병이 저게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장시간 싸우다 보면 다른 용아병이 더 튀어나오기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만 싸우고 이리 도망쳐 오세요. 그러고 있다가는 다른 용아병들이 더 나올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군.”

순순히 인정한 스승이 용아병을 뿌리치고 비밀 통로로 들어왔다.

그러자 용아병도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유인돼서 각개격파당하지 않도록 명령을 해 뒀겠지.’

용아병이 돌아간 걸 확인한 스승이 투덜댔다.

“저 스켈레톤 때문에 무슨 고생이야.”

-스켈레톤이라니! 이 리치님한테 무례한 말을!

데비하이드가 발끈했지만, 스승은 대꾸도 하지 않고 모르타를 가리켰다.

“그보다 저 녀석의 귀는 재생시킨 건가?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제가 만든 약을 먹였습니다.”

“약?! 설마 마계 벌레를 이용한 건가?”

“네. 거기에 있는 소르다리오를 추출해서 현자의 돌을 사용해 약재로 변환했습니다.”

“앗, 그건 내가 생각한 조제법인데.”

카엘의 설명에 스승은 손으로 턱을 짚고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카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생 약, 한 병만 줘.”

“네?”

“그냥 달라는 건 아니고… 이거 줄게.”

스승은 그러면서 가방에서 시커먼 뿔 하나를 꺼냈다.

“싱싱한 미노타우르스의 뿔이야. 소르다리오를 알 정도라면 이거의 가치도 잘 알겠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걸 첨가하면 지금 먹는 강화제보다 훨씬 수준 높은 강화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보다 미노타우로스를 잡고 왔나? 통로로 왔으면 안 마주치고 우회해서 왔을 텐데?’

어쨌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줄 생각이었는데, 본인이 선물까지 준다고 하니 안 받을 이유가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어? 지금 들고 있어?”

카엘이 허리춤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주자 스승이 깜짝 놀랐다.

만에 하나 스승을 만날까 싶어 미리 만들어 들고 다닌 거였다.

스승은 재생 포션을 이래저래 살펴보며 감탄했다.

“이야. 여기에 보존의 룬을 새겨 둔 거군. 이러면 약물의 변질을 걱정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지. 이거 생각만 했었는데 실제로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대단한데?”

사실 스승이 고안한 방법이 맞았다.

“색을 보니 침전물도 없고, 조합도 깔끔해. 실력이 아주 뛰어나군.”

‘그래도 스승에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군.’

내심 기뻐하던 카엘은 스승의 행동을 보고 의아했다.

자신이 준 재생 포션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 버린 거였다.

“안 드십니까?”

“분석부터 해야지. 위험한 게 있을지도 모르고.”

아직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게 스승다웠다.

“자, 받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카엘도 스승이 건네주는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받아서 챙겼다.

그걸 본 스승이 물었다.

“근데 현자의 돌은 왜 찾아? 이 약을 만들었다는 건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 아니야?”

“지금 가진 건 빌린 거라서요. 드래곤이 가진 것보다 하급이기도 하고요.”

“흠, 하긴. 그럼 아까 들었는데 세계수의 열매도 찾는다면서.”

“그건 엘프들을 위해서 쓸 겁니다.”

그 말에 스승이 제안했다.

“그래? 그럼 이러면 어때? 현자의 돌은 내가 가지고, 세계수의 씨앗은 너희가 가지는 거로.”

“아니, 방금 이야기 못 들었어요?”

모르타가 펄쩍 뛰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자의 돌은 자기가 가지고 엘프를 위해서 쓰는 세계수의 열매를 주겠다니.

본인도 엘프인데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스승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대신 현자의 돌이 필요하면 쓰게 해 주지.”

카엘로서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스승을 묶어 두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필요한 만큼 현자의 돌도 쓸 수 있었다.

“근데 그게 재생 포션이 맞으면 현자의 돌은 필요 없지 않습니까?”

“다른 데 쓸데가 있어.”

그건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하긴 계속 목걸이로 만들어서 가지고 다녔지. 나중에 나한테 주긴 했지만.’

“그래서 어쩔 거야? 내 제안을 받을 거야? 말 거야?”

“제안대로 하죠.”

“좋아.”

스승이 웃으며 말했지만, 아직 자신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수백 년 동안 이곳저곳 떠돌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으니까.

‘그래도 아예 마음을 안 여는 분은 아니니까.’

“참, 내 이름은 디오네라고 해.”

“전 카엘 브리운, 이쪽은 브로칸과 모르타라고 합니다.”

카엘이 소개하는데 디오네가 아는 체하는 게 아닌가?

“카엘 브리운이라면? 요즘 대륙에서 제일 유명한 그 카엘 브리운?”

카엘은 새삼 감격스러웠다.

스승이 소드 마스터인 브리운 공작의 아들이 아니라, 카엘 개인을 알아봐 준 거였다.

“근데 어떻게 유명한가요?”

“제국의 소드 엑스퍼트를 쓰러트린 뒤에 겁도 없이 망나니 왕자와 함께 제국을 쏘다녔잖아. 겁 없는 풍운아로 유명하지.”

“아, 그렇군요.”

“심지어 거기서 망나니 황자와 어울리기도 했으니. 겁 없단 소리를 들을 만하지. 안 그래도 망나니 황자에게 접근할까 했는데, 그 소문 듣고 그냥 여기로 온 거야.”

‘아, 그래서 이곳에 일찍 온 모양이구나.’

“어쨌든 이제 현자의 돌을 찾을 준비나 하자.”

디오네는 그러면서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뚜껑을 여니 안에는 진흙 같은 게 들어 있었는데 디오네가 손뼉을 치자 꾸물거리면서 작은 아이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고대 마법사가 만들었다는 진흙 골렘이었다.

용아병이 생명체만 공격하는 걸 이용해 진흙 골렘으로 보물 창고를 뒤질 생각이었다.

“어차피 얘가 현자의 돌 찾으려면 한참 걸릴 테니까, 같이 찾으면 조금은 빠르겠지.”

그 말대로 드래곤의 보물 창고는 매우 커서 처음부터 뒤지면 아주 오래 걸렸다.

회귀 전 스승도 이렇게 진흙 골렘으로 거의 1년 가까이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카엘은 회귀 전 스승에게 대략적인 위치를 전해 들었다.

“제가 대충 어딨는지 알아요.”

그 소리에 데비하이드가 투덜댔다.

-아니, 알면 미리 말해 주지!

“말하기 전에 네가 먼저 들어가 버렸잖아.”

-그야 저 엘프가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소란 속에 현자의 돌을 얻으면 네가 먹고? 내가 저 엘프에게 쓰러지면 라이프 베슬을 회수할 작정이었겠지.”

-어, 어떻게 알았지?

콩!

카엘이 놀라는 데비하이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음모를 꾸몄으면 좀 숨기기라도 해라!”

-칫.

“현자의 돌은 중앙에 있는 여러 제단 중에서 아무런 문양이 없는 제단을 찾아보면 있을 거야. 이번에는 귀찮다고 스켈레톤 건들지 말고 똑바로 찾아야 해.”

-아, 알았어.

“이번에 찾아오면 라이프 베슬을 두 배는 큰 거로 옮겨 줄 테니까, 잘 찾아오기나 해.”

-정말?! 바로 찾아올게.

데비하이드는 신이 나서 보물 창고로 들어갔다.

“골렘아, 내가 말한 거 저 해골이랑 같이 찾아와.”

디오네의 말에 진흙 골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데비하이드의 뒤를 따라갔다.

“그럼,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

“전 세계수의 열매를 찾으러 갈 겁니다.”

카엘의 말에 모르타가 물었다.

“어, 보물 창고에는 없나요?”

“응.”

회귀 전 스승은 보물 창고에서 도저히 세계수와 관련된 건 못 찾았다고 했다.

애당초 드래곤 둥지가 세계수를 무너트리고 만든 거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어쨌든 보물 창고에 없다는 건 이 지하에 답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땅에 대한 거라면 땅의 정령을 부리는 노아나를 데려오는 게 나았을 수도 있지만, 예상대로 드래곤 때문에 정령이 소용없었다.

다행히 땅 전문가는 저쪽에 잔뜩 있었다.

“그래도 저기 있는 드워프들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

드워프들도 모른다면 드래곤이 깨어난 뒤에 샅샅이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카엘의 말에 디오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드워프들한테 물어본다고? 술만 처마시는 뚱뚱보들이 뭘 알겠어?”

그때였다.

“어이쿠! 나 죽네!”

드워프들이 일하는 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놀라운 건.

“뭐야? 누가 다쳤어?”

드워프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디오네가 곧바로 드워프 구역으로 달려간 거였다.

다친 드워프를 치료해 주러 간 거였다.

‘스승님답네.’

회귀 전에도 스승은 아무리 못마땅한 인간이라도 아파하는 게 보이면 고쳐 놓고 봤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사고라도 났나?’

카엘은 얼른 그녀의 뒤를 따라 드워프의 구역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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