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피로 증명하다 (3)
전투 후.
엘프 자매들이 카엘을 은밀히 찾아왔다.
“어, 잘 왔어! 안 그래도 거주 구역이 어떤지 보러 갈랬는데… 음?”
웃으며 반기던 카엘은 이상함을 느꼈다.
엘프 자매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혹시 불편한 거 있어?”
“그게 아니라… 다음에는 저희도 출전시켜 주십시오!”
“…우리도 싸울 거야!”
“다들 열심히 싸우는데 놀고먹을 수만은 없어요!”
아무래도 멀리서 드워프들과 라이칸스로프가 싸우는 걸 본 모양이었다.
게다가 드워프와 라이칸스로프 모두, 이번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엘프라는 것만으로 대부분 우호적일 테지만, 이곳에 온 외부 세력 중 하나로서 자기들도 거기에 끼어 인정받고 싶은 건 당연했다.
“저희 말고 다른 엘프들도 함께 싸우겠다고 합니다. 정령술을 못 쓴다고 해도 검과 활만으로도 잘 싸울 수 있어요.”
“…맞아.”
“저희가 엘프라는 것도 철저히 숨길게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간절하게 전장에 내보내 달라고 하다니.
그래도 지금 나서게 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초조해할 필요 없어. 너희는 비장의 수니까.”
“비장의 수?!”
“…우리가?”
“설마 위기의 순간 전황을 반전시키는 역할을 맡기시려는 건가요?”
“그래. 그때를 위해서 최대한 전력 노출을 안 시키려고 해.”
정말이었다.
제국의 눈을 피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몬스터들에게 이쪽의 전력을 다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아예 넘보지 못할 정도의 전력을 갖춘다면 모를까.’
그전에는 모르타의 말처럼 적의 허점을 찔러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쓸 예정이었다.
“그렇군요.”
“…이해했어.”
“하긴 저희를 이대로 두고 안 쓰실 리가 없죠. 아깝게.”
엘프 자매들은 곧바로 납득했다.
문제는.
“그럼, 모두에게 알리러 가겠습니다. 그때를 대비해 준비해야죠.”
‘엘프치고는 다들 성격이 너무 급한 거 아니야?’
노아나의 말에 카엘은 당황했다.
“아니, 당장 그럴 필요는 없는데. 다들 피곤할 텐데 일단 좀 쉬어.”
“괜찮아요. 지금까지 카엘 님께 받은 것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맞아.”
“저희가 뭐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카엘 님의 수명을 고려하면 하루라도 빨리…….”
“모르타!”
모르타의 말을 노아나가 목소리를 높여 끊었다.
‘아, 나 때문이었나?’
엘프들의 성격이 급한 게 아니라, 카엘에게 뭔가를 보답할 시간이 길지 않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수백 년을 사는 엘프의 수명과 비교하면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도 짧으니까.
‘어차피 도와줄 시간은 금방 다가올 텐데.’
카엘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일단은 다들 쉬세요.”
“알겠습니다. 쉬엄쉬엄할게요.”
엘프 자매들은 그렇게 대답하며 돌아갔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그럴 거 같지 않았다.
‘뭐라도 준비해 주면 나야 좋지만. 그래도 경쟁하기 이전에 서로 친해져야 할 텐데 말이지. 아.’
카엘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방을 나섰다.
* * *
카엘이 티겔 공작을 찾아가니, 마침 같이 있던 큰형 브란이 웃으며 맞아 줬다.
“피곤할 텐데 좀 쉬지. 왜 또 나왔느냐.”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그보다 형님, 라이칸스로프들의 정체를 안 병사들과 주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 모두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
“신뢰할 만한 전우라는 걸 피로 증명했으니 당연하지.”
티겔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보탰다.
그 말에 카엘이 제안했다.
“아버지, 대대적으로 축제를 여는 게 어떻겠습니까? 클리페우스성에 새로운 가족들이 온 걸 환영하는 의미로요.”
“안 그래도 네 말대로 연회를 열면 좋겠다 싶었는데, 네가 먼저 말을 꺼내 주니 고맙구나.”
카엘은 티겔 공작이 왜 말을 꺼내 줘서 고맙다고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동안은 축하할 일이 있어도 쉽게 기분 낼 수 없었다.
병사들의 임금을 주고 전투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자금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귀한 오거 가죽을 팔아서 운영자금에 보탰을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카엘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쓰고도 남을 금화를 들고 왔으니까.
앞으로는 돈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버지 성격상 카엘의 소유라 생각해서 먼저 돈을 건들지 않은 거였다.
‘아마 내가 출가해 독립한다고 저걸 그대로 다 들고 가 버려도 욕심내지 않으시겠지.’
그런 와중에 카엘이 먼저 큰돈이 들어갈 축제를 열자고 말해 주니 고마울 수밖에.
카엘은 거기에 한술 더 떴다.
“안 그래도 창고의 금화 일부를 내성의 금고에 옮기라 할 테니, 운영자금으로 쓰십시오.”
“그래, 고맙다.”
티겔 공작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기특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병상에 누워만 있던 아들이 건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큰 근심이었던 자금 문제도 해결한 거였다.
대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란도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연회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이후 며칠 동안 클리페우스성은 축제로 떠들썩했다.
그 중심에는 라이칸스로프와 드워프들이 있었다.
엘프들도 정체를 감추느라 어울리진 못했지만, 넉넉하게 먹고 마시며 푹 쉬도록 했다.
그 와중에도 일전에 말한 것처럼 정말 뭔가를 준비하는 듯했지만.
‘의욕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니까.’
한편 카엘은 모두의 주목이 자신보다는 라이칸스로프와 드워프에게 쏠려서 편하다 싶었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에게는 그간 겪었던 모험담을 풀어내야 했다.
다행히 브로칸이 대신 신나게 떠들어 줬다.
카엘은 어머니가 걱정할 만한 부분만 끼어들어서 순화했다.
덕분에 다들 손에 땀을 쥐면서도 적당히 이야기를 즐길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여기저기 많이 다녀 본 자신도 이런 모험을 한 적이 없다며 감탄했고.
어머니는 아들이 한 일에 뿌듯해하면서도 큰 사고가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이런 데 내가 또 드래곤 둥지로 간다고 하면 난리 나겠지.’
클리페우스성의 살림을 도맡은 큰형 브란은 심해성과 항구도시 아말레이에 관심을.
셋째 형 막시마는 자신도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해서 어머니가 기겁하며 말렸다.
“아직 수련도 마치지 않았는데 어딜 간단 말이냐.”
“앞으로 금방이에요, 금방.”
막시마는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듯 제법 몸이 단단했다.
‘그러고 보니 소피아는? 그동안 검술 연습 많이 했으려나.’
카엘은 어머니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소피아를 바라봤다.
소피아는 잠자코 카엘의 모험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카엘이 클리페우스성을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카엘은 경험상 저렇게 기운을 감출 수 있는 거야말로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걸 눈치챈 건 카엘만이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가르친다는 게 저 계집애야?
“계집애가 아니라 소피아.”
-아무튼, 제법 강한데? 루크 녀석, 훈련 강도를 좀 더 높여야겠네.
카엘은 속으로 루크에게 애도를 표했다.
-카엘, 저 둘을 대련시켜 보자.
“대련?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먼저 소드 마스터를 만들 거라며.”
-지금 둘 실력이 비슷해 보이니 딱 좋아.
“그런 거라면야, 알았어.”
-그리고 확인해 볼 것도 있어.
“확인해 볼 거?”
-나중에 말해 줄게.
“그러든가.”
식사 후 카엘은 소피아에게 훈련장에서 잠깐 보자고 전했다.
그 말에 소피아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카엘 님이 오자마자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정신없었고, 전투 후에는 연회를 여느라 바빴다.
그런데 겨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긴 거였다.
훈련장으로 부르는 것도 아쉽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검술을 보여 드리고 싶기도 했으니까.
‘검술을 보면 다음에는 함께 데려가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런 기대를 하며 훈련장으로 갔더니 카엘의 옆에 못 보던 소년이 같이 있는 게 아닌가?
의아해하는데 카엘이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 걸음걸이부터 범상치 않은데 그동안 훈련 많이 했나 봐.”
“…약속했으니까요.”
카엘의 칭찬에 소피아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난 카엘이 소년을 소개했다.
“참, 여긴 루크. 이쪽이 소피아야.”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한 루크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작 소피아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안녕하세요.”
“이 친구도 한창 검술을 배우고 있거든. 그래서 소피아와 대련해 봤으면 해서 데려왔어.”
“저랑요?”
“안 되겠어? 이 친구도 소드 마스터를 목표로 하고 있어.”
카엘의 말에 소피아는 화들짝 놀랐다.
‘소, 소드 마스터라니.’
엄청나게 재능 있는 소년인 모양이었다.
“근데 저는 소드 마스터를 목표로 하는 건 아닌데요?”
소피아도 그저 카엘을 따라다닐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소피아에게 소드 마스터의 재능이 있다고는 하셨잖아. 나도 그럴 거라고 믿어.”
“정말인가요……? 그럼 한번 해 볼 게요.”
카엘의 말에 기운이 난 소피아가 승낙하고는 훈련용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그거로는 안 돼.
“어?”
난데없이 들리는 소리에 소피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루크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까닥거리는 게 아닌가?
-여기야, 여기.
“거, 검이 말해?”
“아조트, 조용히 있겠다며?”
카엘은 그 검을 향해 핀잔을 준 뒤 소개했다.
“에고 소드라서 말하는 거야. 이름은 아조트.”
“아, 안녕하세요.”
소피아는 얼빠진 얼굴로 아조트에게 꾸벅 인사했다.
-훗, 인사성은 밝네. 그보다 장난감 말고 제대로 된 검을 들어.
“위험하지 않을까요?”
-시끄러워!
아조트의 호통에 소피아가 카엘을 쳐다봤다.
“그렇게 해. 만에 하나 다치면 내가 치료해 줄게.”
“앗! 네.”
소피아는 그제야 아조트의 눈치를 보며 병사들이 쓰는 검을 집었다.
-그거 말고,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건 장식이야?
티겔에게 받은 검을 가리키는 거였다.
하는 수 없이 소피아는 검을 뽑았다.
스릉.
동시에 소피아의 눈빛이 변했다.
-오, 꽤 호전적인데? 마음에 들어.
“우와.”
-루크, 너도 감탄하지 말고 자세 잡아야지!
“아, 네.”
루크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아조트가 없을 때 쓰던 제법 값진 검이었다.
-그럼 시작.
아조트의 신호로 대련이 시작됐다.
먼저 움직인 건 의외로 소피아였다.
파파팟.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세 곳을 한 번에 내찌르는 게 매우 매서웠다.
‘소피아가 생각보다 거칠군.’
평소 알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헛.”
놀란 루크가 검을 들어 막았다.
챙. 챙. 챙.
당황한 와중에도 하나도 빠짐없이 막아 냈다.
‘이걸 막다니.’
소피아가 주춤하는 사이, 루크의 반격이 시작됐다.
“음.”
평범한 휘두르기였지만, 소피아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단순한 궤도에 속도도 평범했으나 도저히 빈틈이 안 보여서였다.
마검 아조트가 검술의 기본만 가르쳤는데, 루크도 그 가르침을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우직하게.
‘이대로 가면 안 돼.’
루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점점 밀려나던 소피아는 마음을 다잡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루크는 아직 작은 체구임에도 소피아를 압도하는 게 아닌가?
‘으윽. 도저히 못 이길 거 같아.’
소피아는 패배를 직감했지만, 카엘 님 앞에서는 도저히 지고 싶지 않았다.
‘제게 힘을 주세요, 카엘 님.’
그러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던 순간.
우웅.
팟.
소피아의 검 끝이 푸른 빛에 휩싸이더니 루크의 검 끝을 날려 버리는 게 아닌가?
오러를 사용한 거였다.
“그만.”
카엘은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대련을 멈추게 했다.
그러고는 아조트에게 말했다.
“아조트, 고마워.”
-흥. 바로 앞에서 못 깨우치고 있길래 거들어 준 것뿐이야.
역시 소피아의 실력을 가늠하고 대련을 통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밀어붙인 거였다.
심지어.
우응.
“엇. 성공했어요.”
소피아의 검을 보던 루크도 검에 오러를 두른 거였다.
-우리 꼬맹이한테도 도움이 되겠고.
이렇게 소드 엑스퍼트가 둘이나 탄생했다.
이대로 더욱 정진해 소드 마스터가 되면 클리페우스성에 3명의 소드 마스터가 생기는 셈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네먼과 옥스는 투덜대며 드워프들의 거주지에서 나왔다.
“이게 말이 돼?!”
“그러게, 드워프들이 술을 거부할 줄이야.”
“역시 음유시인이 엉터리 이야기를 지어낸 게 틀림없어.”
일주일 내내 연회를 연다고 했는데도 드워프들은 이틀 만에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술을 들고 드워프를 찾아갔다가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실 둘은 몰랐지만, 지금 드워프들은 카엘의 의뢰를 받아 신병기를 개발하는 데 열중하는 중.
오랜만에 창작의 열정을 발휘하느라 술이 눈에 안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