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피로 증명하다 (1)
‘다행히 아직 멀쩡하구나……. 당연하지만.’
카엘은 저 멀리서 보이는 클리페우스성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회귀 전, 몬스터 대침공이 벌어지고 도망치듯 떠났을 때 바라본 모습은 끔찍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곳곳에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성을 유린하는 몬스터의 악취가 진동하고 기괴한 울음이 고막을 터트릴 듯 사방에서 메아리쳤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반드시 막아 낼 거야.’
카엘은 새삼 다짐하며 행렬을 끌고 성에 접근했다.
“봐 봐. 저기 다들 나와 계신다.”
카엘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한 큰형 브란이 성문을 가리켰다.
아들 귀환 소식을 들은 아버지 티겔 브리운이 마중 나가라고 큰형을 보낸 거였다.
브란의 말대로 열린 성문 너머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부터 셋째 형 막시마 브리운.
카엘의 시녀이자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 중인 소피아.
머지않은 미래에 레인저 중대장이 될 레인저 조장 옥스와 그 단짝인 교관이자 백인대장인 네먼 등.
그리운 얼굴들이 잔뜩 보였다.
심지어 여행 중에 여러 전설적인 활약을 한 공작가의 막내 도련님의 귀환을 환영하는 주민들도 잔뜩 나와 있었다.
“어서 가서 인사드리려무나.”
브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엘은 말을 달려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단숨에 부모님 앞까지 간 카엘은 말에서 내려 인사를 올렸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무심한 듯 담담해 보이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냈다.
“너는 얼마나 이 어미를 걱정시킬 작정이냐. 왕국의 수도로 가면서도 여기저기를 들르는 것까지는 이해했다만, 거기서 또 제국으로 가다니……. 어린것이 이리 오래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으면 절대로 안 내보냈다.”
“죄송합니다.”
카엘은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카엘을 어머니가 와락 껴안았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어머니도 건강해 보이셔서 안심입니다.”
사실 어머니를 보자마자 상태가 어떤지 살짝 살펴봤는데, 아직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걸 보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회귀 전의 기억에 따르면 아프시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만에 하나 일찍 발병할 우려가 전혀 없진 않았다.
카엘이 일찍 회복해서 돌아다닌 탓에 소피아가 몬스터 역병에 걸리기도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병색이 보이면 바로 치료해 드려야지.’
그전에 아예 아프시지 않도록, 아네스에게 축복의 기도를 올려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기도 했다.
망나니 황자 탈프의 엉망인 신체를 유지할 정도로 기도의 효력이 좋다는 걸 확인했으니 안 쓸 이유가 없었다.
운이 좋으면 아예 병에 안 걸릴지도 몰랐다.
‘병에 걸린 뒤 고쳐 드리는 것보다, 아예 병마에 안 시달리는 게 좋지.’
그때 아버지 티겔이 말했다.
“자, 자. 얼굴도 보고 무사히 돌아온 거 확인했으니 다들 그만 들어가지. 카엘도 많이 피곤할 텐데, 어서 정리하고 쉬어야지.”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어머니 마리안은 그제야 떨어지면서 소피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소피아는 아쉬운 듯 눈인사만 하고 그 뒤를 따랐다.
사실 티겔이 재회의 시간을 금방 끝낸 건 카엘이 사전에 말해 둔 것 때문이었다.
보물은 둘째 치고, 당분간 엘프들의 행방을 감춰야 했기 때문이다.
마리안과 소피아가 돌아가자, 주민들이 뒤늦게 환호하며 카엘을 환영했다.
“와아아아아아!”
“막내 도련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나중에 제국에서 있었던 일 이야기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다들 고마워! 나중에 보자.”
카엘은 손을 들어 화답했다.
만족한 주민들이 어느 정도 돌아간 걸 본 티겔이 말했다.
“이제 가자꾸나.”
“네.”
카엘은 앞장선 티겔의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여러 명의 측근과 수십 대의 마차가 줄줄이 따라왔다.
도착한 곳은 클리페우스성의 창고 중 제일 외딴곳에 있는 창고.
안타깝게도 늘 식량이며 물품이 부족한 탓에 지어 놓고 거의 쓰이지 않은 대형 창고였다.
창고 안으로 들어간 카엘은 따라 들어온 마차 중에 제일 앞에 있는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이제 괜찮으니 나오세요.”
“네.”
마차 안에서 엘프 자매들이 내렸다.
“헉! 저거, 저거, 엘프 맞지?”
“쉿, 조용히 해.”
옥스가 호들갑 떨자, 네먼이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고는 티겔의 눈치를 봤다.
사실 티겔도 믿기지 않았다.
‘허, 정말 엘프로군.’
서신에 엘프를 데려온다고 적혀 있긴 했으나 정말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
티겔도 수련한다며 한창 대륙의 온갖 곳을 모험할 때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였다.
‘엘프 하나가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하다고 하고, 정령술을 잘 다루는 엘프는 소드 엑스퍼트만큼 강하다고 했지.’
심지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엘프는 그 강함이 소드 마스터에 버금갈 정도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 강한지 알 수 없지만, 이 셋 말고도 그 수가 서른이 넘는다니 무시무시한 전력이 될지도 몰랐다.
‘당분간은 정체를 숨기고 지내야 한다는 게 아쉽군.’
제국에서 데려온 엘프들인 만큼, 여기에 엘프들이 있다는 게 제국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했다.
엘프 자매 중 맏이인 노아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나머지 자매들도 따라 무릎을 꿇었다.
“브레프니 왕국의 방패인 클리페우스성의 정당한 주인이시자, 검의 진리에 도달한 소드 마스터 티겔 브리운 공작님을 뵙습니다.”
“환영하오! 인간의 관습에 너무 목맬 필요 없네. 이렇게 얼굴 보고 인사했으니 이제 쉬면서 여독을 푸시게나.”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때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다들 오셨네. 늦어서 미안합니다.”
드워프 칼스벅이 나타난 거였다.
“칼스벅 님, 오랜만입니다.”
“무사히 도착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카엘과 칼스벅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을 때, 옥스는 칼스벅과 엘프 자매를 번갈아 보며 걱정했다.
“야, 엘프와 드워프를 만나게 해도 되는 건가?!”
“그러게…….”
네먼마저 걱정이 됐다.
둘 다 어렸을 때부터 엘프와 드워프가 만나서 싸우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엘 님 때문에 모인 거라니 대놓고 싸우진 않겠지만. 이거 분위기 험악하겠네.”
“그럴 리가 없기를 바라자고.”
옥스와 네먼은 긴장하며 지켜보는데,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엘프 자매들이 드워프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 거였다.
“칼스벅 님,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자네들도 그동안 고초가 많았네. 그래도 동족까지 구출해서 무사히 여기까지 와서 다행이야.”
심지어 드워프마저 따뜻하게 응대했다.
“음?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는데?”
“그냥 음유시인이 지어낸 건가?”
엘프와 드워프들 간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옥스와 네먼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카엘 님 덕분이죠. 다만, 다른 드워프분들을 못 구해서…….”
“이야기는 들었네. 어쩌겠나, 드워프 옹고집을 어떻게 이기겠어? 그보다 엘프들이 지낼 곳도 우리가 신경 써서 만들어 뒀으니 한번 가 보게나.”
“아, 정말 감사합니다. 너희도 인사해야지.”
노아나의 채근에 둘째 데키마와 셋째 모르타도 진심으로 인사했다.
옥스와 네먼은 기가 막혔다.
어쩐지 드워프들이 자신의 거주지를 마련하고 나서도 밤낮으로 고층 건물을 짓는다 했다.
그게 엘프의 거주지였다니.
“그래, 가서 보고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
카엘의 말에 엘프 자매들은 고개를 숙인 뒤 창고를 빠져나갔다.
그걸 본 칼스벅이 손바닥을 비비며 마차로 향했다.
“그럼. 어디 얼마나 대단한 걸 가져왔는지 볼까?”
가지고 온 금은보화를 감정해서 정리하기 위해 광물과 보석에 정통한 드워프인 칼스벅을 부른 거였다.
참고로 창고에 들여놓은 마차에는 모두 심해왕 메르 8세에게 받은 금은보화가 실려 있고, 엘프들이 탑승한 나머지 마차는 이미 엘프들의 거주지 쪽으로 가 있었다.
카엘은 마차로 다가가서 커다란 상자를 번쩍 들어 옮겼다.
“우와! 저걸 저렇게 가볍게.”
“힘이 장사라고 들었는데, 정말 어마어마하시구나.”
여럿이서 붙어서 낑낑대며 옮기고 있던 시종들은 카엘을 보곤 입을 벌리고 깜짝 놀랐다.
더 놀란 건 카엘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였다.
안에 금화와 보석이 잔뜩 들어 있으니 뚜껑을 열었을 때 눈부신 빛이 새어 나왔다.
“우와! 이건 최상급 사파이어군. 아니, 이런 크기의 진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칼스벅이 눈을 반짝이더니 상자에 얼굴을 처박으며 중얼거렸다.
“칼스벅 님이 잘 보시고 괜찮은 것들을 분류 좀 해 주세요. 다른 마차에도 전부 이만큼씩은 들어 있습니다.”
“허, 정말인가? 이건 나 혼자서는 안 되겠군. 다른 녀석들도 불러서 해야겠어. 이게 다 어디서 난 건가? 드래곤의 둥지에서 훔쳐 온 것도 아닐 테고.”
“심해성의 왕을 치료하고 사례로 받아 온 겁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난파선에서 건져 낸 것들이라더군요.”
“오호. 어쩐지.”
칼스벅이 흥미를 보였다.
“심해성이 그렇게 멋지게 지어졌다는데 한번 보고 싶구먼.”
“다시 찾아오면 반겨 준다고 했으니, 가 볼 기회가 생길 겁니다.”
“좋아. 그때를 기대해야겠군.”
그때 엘프에 이어, 금은보화를 보고 놀랐다가 겨우 진정한 티겔이 말했다.
“실제로 보니 엄청나군. 그런데 이것들을 그냥 놔두기에는 걱정이 되는구나.”
“저도 우려가 됩니다. 이 정도면 꽤 많은 병력이 지켜야 할 거 같습니다만.”
티겔의 말을 받아 네먼까지 우려를 표했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잠자코 있던 라이칸스로프 촌장이 나섰다.
“그건 우리에게 맡겨 주시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은인의 보물을 지킬 테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거 뭐라도 해야지. 가만히 놀고먹으려니 눈치가 보여서.”
그 말대로 현재 라이칸스로프들은 클리페우스성 내에서 별다른 일을 하고 있진 않았다.
이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주민들 틈에서 팔 만한 특출 난 기술도 없었다.
대부분 라이칸스로프는 허드렛일꾼으로 드워프들을 도와주는 게 전부였다.
임시로 머물고 떠날 손님이 아니라, 제국의 손길을 피해 여기에 정착하려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눈치가 보일 수 없었다.
카엘이 봤을 때는 괜한 걱정이었지만.
‘어차피 활약할 때가 곧 올 텐데.’
그래도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라이칸스로프가 지켜 준다면 그보다 안전한 곳은 없으리라.
“그래도 저희 병사들이 기본적인 경비는 설 테니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허허. 맡겨 두라고. 음?”
카엘의 부탁에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촌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러십니까?”
“오크의 더러운 냄새가 아주 진동하는군.”
‘오크가 쳐들어왔다고?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닌데?’
그렇다고 촌장님의 코가 잘못 포착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티겔을 보니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눈치였다.
“음…….”
“혹시 짚이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 듀리프 후작을 골탕 먹이느라 오크들의 공격을 일부러 유도했거든. 그 여파가 아닌가 싶군.”
그 말에 카엘은 뿜을 뻔했다.
그랬다면 듀리프 후작이 이곳에 있는 동안 계속 전투의 소음에 시달리며 불안해했다는 건가.
고소하다 싶으면서도 진중한 아버지가 그런 꾀를 낼 줄은 상상도 못한 거였다.
“그래서 오크들이 또 쳐들어온 걸까요?”
“글쎄. 듀리프 후작을 보내고 나서는 계속 조용했으니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
그때 촌장과 같이 킁킁대며 냄새를 맡던 브로칸이 말했다.
“음? 촌장님, 이건 또 무슨 냄새죠? 저희와 비슷하지만, 훨씬 구린내가 나는데.”
“…이건 놀의 냄새다.”
‘오크에 놀까지?! 설마?!’
그때 병사가 달려와서 보고했다.
“공작님! 몬스터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알고 있다. 얼마나 왔느냐?”
“그, 그게… 오크와 놀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합니다.”
“같이?!”
병사의 말에 티겔의 눈이 커졌다.
‘정말 몬스터 대침공이 일찍 시작된 건가?’
“음,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티겔은 그렇게 말하며 창고 밖으로 나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카엘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런데 정말로 오크와 놀이 같이 보였다.
정작 그걸 목격한 카엘은 내심 안도했다.
‘다행히 몬스터 대침공은 아닌가 보군.’
오크의 대부대와 놀의 대규모 집단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때와 달리 서로 힘을 합친 게 아니라 구분되어 있었다.
당장 두 병력이 접하는 부분에서는 간헐적으로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로 영역 다툼을 하는 사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몬스터 대침공 때는 오크가 완전히 놀을 부하로 부리는 듯했지.’
덕분에 훨씬 일사불란하고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무작정 안도할 수만도 없었다.
오크와 놀이 까맣게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평시에도 작전 수행할 정도로 부대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대응하기 어려운 역대급 규모의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티겔은 자신에게 황급히 다가온 브란에게 물었다.
“전투 준비는?”
“이미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돕겠소. 아니, 당연히 나서야지.”
“감사하오.”
칼스벅의 말에 티겔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오크들의 피를 보겠군!”
칼스벅은 신나는지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카엘은 티겔에게 제안했다.
“아버지, 라이칸스로프들에게도 활약할 기회를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본모습을 드러내고요.”
“음, 도움을 가릴 상황은 아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말고요. 허락만 해 주면 저놈들을 죄다 찢어발겨 버리겠소!”
라이칸스로프 촌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라이칸스로프의 활약을 본 카엘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예상보다 훨씬 도움이 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