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성기사가 여섯?
왜 여섯 성기사인가?
마중 나온 파나틱 신전 기사들 다섯 모두에게서 신성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프레데릭에 비하면 아주 미미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신성력이 쌓이기 시작하면 성기사로서 한 발짝 내디딘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네스의 신성력이 생각보다 넓게 영향을 미친 모양이네.’
프레데릭이 빨리 성기사가 되도록 유도하려고 한 거였는데, 다른 신전 기사들에까지 그 영향이 미친 거였다.
그때 인파를 가르며 성녀 아네스가 나타났다.
“카엘 님, 왜 이제 오세요!”
“왜 심심했어?”
“네. 여기선 다들 맨날 기도랑 훈련만 해요.”
그러면서 울상을 짓는 게, 여간 지겨운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걸 본 프레데릭이 웃었다.
“하핫. 신전 기사의 삶은 아무래도 즐겁지는 않죠. 그래도 전 여기 파나틱 신전 기사단 분들과 의기투합해서 함께 기도하고 훈련하니 외롭지 않았습니다.”
하긴 프레데릭은 신전 기사답지 않게 재물을 밝히지 않고, 기도와 훈련에 열중했다.
그 때문에 이곳에선 외톨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비슷한 성향인 파나틱 신전 기사단들과 함께하니 즐거운 듯 보였다.
옆에서 듣던 파나틱 신전 기사들도 씩 웃었다.
아무래도 재능을 떠나 신념을 가지고 함께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이들도 신성력을 가지게 된 듯했다.
그러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루크는? 뭐 해?”
그 말에 카엘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마검 아조트가 들썩였다.
루크는 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알아보고 거둘 정도로 소드 마스터가 될 자질을 가진 소년.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냥 꽃피진 않는다.
카엘을 돌보던 시녀인 소피아만 해도 몬스터 대침공이 있기 전까지는 검에 대한 재능이 있는지조차 전혀 몰랐으니까.
그 재능을 하루라도 빨리 개화시키기 위해서는 아조트가 루크를 훈련하는 게 좋았겠지만, 만약의 일을 대비해 아조트는 최근에 카엘이 지니고 다녔다.
“아, 몰라요. 그 바보!”
아네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쏘아붙이더니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둘이 다투기라도 한 건가?’
루크의 근황은 프레데릭이 대신 알려 줬다.
“루크 님은 요즘 강해지겠다면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검술 연습 중이라 같이 안 놀아 줘서 화가 나신 것 같네요.”
“아, 그런 거였군요. 사이가 나빠진 건 아니죠?”
“네, 루크 님이 지쳐서 곯아떨어져 있으면 아네스 님이 몰래 가서 회복의 기도를 해 주고 있거든요.”
프레데릭은 그렇게 말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소년·소녀의 모습이 아무래도 귀여워 보인 모양이었다.
‘어찌 됐든 훈련을 열심히 해서라니 다행이네.’
* * *
그 시각 제국의 대사인 듀리프 후작은 길길이 날뛰는 중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된 거냐고!”
“…….”
듀리프 후작이 방금 전해 받은 보고서를 들이밀면서 호통을 쳤지만, 부하들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할 뿐이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다시 보고서를 읽었다.
“암살에 실패했을 뿐만이 아니라, 붙잡혔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말이다!”
듀리프 후작의 말대로 암살에 실패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살해 암살 지시를 감추도록 철저히 교육한 자들.
붙잡혀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후작님, 너무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맞습니다. 제국에서 사주했다는 걸 알아도 자기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부하들의 말대로 이고르와 올렉, 두 백작이 암살자가 제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걸 알아냈다고 해도 뭘 할 수 있진 않았다.
당장 두 백작도 복수는커녕 외부에 공표조차 못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듀리프 후작이 화내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누가 그걸 모르나! 이 일을 계기로 두 가문이 더욱 돈독해진 게 문제지.”
“아.”
“그래 봐야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여차하면 제국의 힘을 보여 주면 될 일입니다.”
그 말에 듀리프 후작은 속이 답답했다.
위협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지경까지 가게 만든 자신 입장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위협하더라도 최대한 은밀히 해야 했다.
‘밀정을 새로 붙여 놓고, 여차하면 암살하라고 해야겠어.’
당분간은 경계하겠지만, 제국 최고의 밀정을 붙여 놓으면 그 틈을 파고들어 암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제국 최고의 밀정은 엘프들을 말하는 거였다.
‘드워프들을 납치하는 데 동원했다고 들었으니까, 곧 부르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일이 해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또 밖에서 누군가 온 기척이 들리는 게 아닌가?
“어서 들어오라 해라.”
듀리프 후작의 말에 제국의 기사 벤이 나타나서 서신을 전했다.
그런데 방금 읽은 것과 같은 노란색 서신이 아니라, 붉은색 서신이 아닌가?
매우 안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었다.
‘방금 받은 보고보다 더 나쁜 소식이라니.’
긴장하고 서신을 읽던 듀리프 후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엘프들이 대량으로 탈출했으니 브레프니 왕국에 엘프가 보이면 보고하라고?! 거기다가 엘프 밀정들의 행방이 묘연한 거로 봐서는 배신한 거 같다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제국에 웬 태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듯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무엇보다 황제가 진노할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브레프니 왕국의 상황을 보고한다?
목을 날려 달라고 애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듀리프 후작은 서신을 내려놨다.
‘이렇게 된 이상 이곳 일은 당분간 비밀로 부쳐 놓고 조용히 지내야겠군.’
왠지 모르게 불안했지만, 여전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면 이걸 쓰는 수밖에.’
듀리프 후작은 자신의 품 안에 넣어 둔 걸 슬쩍 만졌다.
이걸 쓰면 이곳에서 더 지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황제가 자신을 책망할 리 없었다.
이곳이 황폐화되긴 하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모두 묻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 * *
카엘은 재회한 일행이 모인 자리에서 내일 바로 클리페우스성으로 출발하겠다고 알렸다.
그러자 레오폴드 왕자의 호위 기사인 제롬이 걱정했다.
“바로요? 안 피곤하시겠습니까? 며칠만 쉬다 출발하죠.”
“저는 괜찮습니다. 브로칸은 어때?”
“자야 항상 문제없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해도 됩니다.”
브로칸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 무엇보다 엘프분들이 계속 마차 안에서 지내고 계시니까,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죠.”
“아, 그렇죠. 어서 출발하는 게 좋겠네요.”
제롬이 맞장구쳤다.
제국을 탈출한 엘프들은 계속해서 숨어 지냈을 뿐만 아니라, 클리페우스성으로 향하는 내내 마차에서 지내고 있었다.
최대한 큰 마차를 쓰긴 했지만, 들키지 않도록 밖으로 모습을 못 드러내니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조심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엘프가 브레프니 왕국에서 목격됐다는 소문이 돌면 제국의 귀에 바로 들어간다고 봐야 했다.
그럼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던 엘프들이 아닐까 하고 조사해 올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프들의 대표로 나와 있던 노아나가 카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나마 노아나를 비롯한 엘프 자매들은 제국의 밀정으로 활동했기에 위장한 채 조심스레 다닐 수 있었다.
“그럼 다들 출발 준비해 주세요.”
“미리 말씀해 두신 대로 다 해 뒀습니다. 사실 오늘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출발하죠.”
카엘은 그렇게 마무리하고,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프레데릭을 찾았다.
“내일 떠나신다고요? 음…….”
“왜 그러십니까?”
“사실 허락만 하신다면, 클리페우스성으로 함께 가고 싶습니다만. 아네스 님과 파나틱 신전 기사분들이랑 함께 지내니 뭔가 깨달음이 느껴져서요.”
안 그래도 파나틱 기사단이 신성력을 얻기도 했고, 프레데릭을 조금이라도 빨리 성기사로 만들기 위해 아네스를 남기는 게 좋을까 하고 잠깐 고민했었다.
다른 일 때문에 일단 데리고 갔다가 상황을 봐서 다시 이곳으로 보낼까 했는데, 따라오겠다니!
카엘은 웃으며 말했다.
“프레데릭 님이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출발 준비를 해야겠네요.”
“바쁘시면 하루 이틀 정도는 늦춰도 상관없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딱히 챙겨갈 건 없으니까요.”
신전 기사답지 않게 검소한 프레데릭다운 대답이었다.
* * *
프레데릭과 헤어진 카엘은 신전 기사들이 쓴다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지금도 루크가 혼자서 열심히 훈련 중이라는 말을 들어서였다.
‘오, 정말 열심히 하고 있군.’
루크는 연습용 검이 아닌 날이 선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잔뜩 흘린 땀이 달라붙은 옷 아래로 근육이 선명했다.
못 본 사이에 정말 열심히 단련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카엘이 왔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흐트러짐이 없었다.
‘저 멀리서 아네스가 쳐다보는 것도 전혀 모르는 거 같고.’
아네스는 루크가 저러다 지쳐 쓰러지면 회복시켜 주려고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특하네.’
-야! 내가 그렇게 휘두르지 말랬지?
그때 아조트가 휙 하고 루크에게 날아가며 버럭 화냈다.
그제야 루크는 카엘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엘 님?!”
-야! 난 안 보여?! 그보다 나쁜 버릇 들면 골치 아프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아조트 님, 죄송합니다.”
“아니! 왜 구박해요!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때 아네스가 달려와 루크 편을 드는 게 아닌가?
루크가 훈련만 한다고 투덜대 놓고는 혼나니까 냉큼 달려온 거였다.
“괜찮아. 내가 잘못한 건데. 죄송합니다, 스승님.”
-헤헤헷. 봤지?
“이 바보, 멍청이가!”
루크가 순순히 승복하자 아조트가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그러자 아네스는 또 소리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네스…….”
루크는 그런 아네스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아조트에게 부탁했다.
“아조트 님, 뭐가 잘못됐는지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좋아, 그런 마음가짐! 바로 훈련에 들어가자. 절대로 소피아라는 계집애보다 늦게 소드 마스터가 되면 안 돼!
“아, 넵!”
아조트는 예전에 했던 말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빨리 훈련해 주면야 나야 좋지.’
어린 만큼 본격적인 전장에 투입하긴 꺼려지지만, 후방에 있을 아네스의 곁을 지켜 주기만 해도 그만큼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계속 친하게 지내야 할 텐데.’
카엘은 그런 걱정이 기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다음 날. 루크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채 마차에 탑승해 출발했는데, 아네스는 투덜거리면서도 거기에 탑승해 루크가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회복의 기도를 읊조렸던 거였다.
루크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 * *
그사이 카엘의 귀환 소식도 클리페우스성에 알려졌다.
주민들은 카엘의 귀환을 고대하면서 모이기만 하면 그걸 화제로 떠들었다.
제국의 소드 엑스퍼트를 쓰러트렸다는 소식에도 놀라면서도 통쾌해했는데, 이번에는 제국에서 어마어마한 황금을 가지고 온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지 마차가 수십 대가 동원됐다는 소문이 돌 정도니 기대가 안 될 수가 없었다.
사실과도 조금 다르고, 그간의 모험에 비하면 별거 아닌 측에 속했지만, 북쪽 끝의 주민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몇 년 동안 회자할 이야깃거리였다.
당연히 카엘의 친지들도 들뜬 마음으로 카엘의 귀환을 기다렸다.
“아버님, 카엘이 이제 며칠 내로 도착한다 합니다!”
카엘의 큰형이자, 브리운 가문의 첫째인 브란이 전령의 보고를 받고 기쁜 마음에 알렸다.
“다 와 간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아니 얘는 왕국의 수도에 간다더니, 제국까지 가서 이 어미를 걱정시키고 이제야 돌아오는구나.”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그동안 못 움직였던 만큼, 이곳저곳을 가 보고 싶었던 게 아니겠소.”
티겔 브리운 공작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아들이 제국의 소드 엑스퍼트 파프닐을 꺾었다는 소식에 내심 뿌듯해하던 참이었다.
곧바로 제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는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무사히 돌아오는 마당에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허허, 은인이 돌아오시면 브로칸 녀석도 곧 돌아오겠군요. 얼마나 많은 냄새를 맡고 와서 자랑할지 기대됩니다.”
옆에 앉은 노인이 흐뭇한 얼굴로 턱수염을 만졌다.
그 노인은 라이칸스로프 마을의 촌장.
일족과 함께 먼저 클리페우스성에 도착해서 외곽에 비어 있는 집에서 지냈다.
티겔은 그런 노인을 바라봤다.
카엘이 쓴 서신에는 이들이 라이칸스로프라고 했지만, 처음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수련을 위해 대륙을 휩쓸고 다녔을 때도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니까.’
티겔이 못 믿는 걸 보고, 대표로 몇 명이 본모습으로 변신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다른 성내 주민에게는 라이칸스로프의 정체를 알리지 않았다.
카엘이 당부한 것 때문이었다.
라이칸스로프는 대개 몬스터로 취급됐다.
몬스터와 싸우는 게 일상인 클리페우스성의 주민이라면 거부감이 들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러니 전투 때 활약해서 라이칸스로프들이 도움이 되는 이웃이며 신뢰할 만한 전우라는 걸 증명하기 전까지는 정체를 숨기자고 했다.
티겔 공작도 일리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러기로 했다.
반대로 옆 테이블에서 코를 골며 누워 있는 드워프는 정반대였다.
정체를 감추기 힘드니 대놓고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외부인의 눈에는 최대한 안 띄게 했지만.’
게다가 성에 오자마자 제 몫을 톡톡히 했다.
병사들의 장비를 정비해서 새것같이 만들어 줬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아예 무기를 새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드워프들에게 이런 도움을 다 받아 보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맥킨더라는 상인은 카엘의 도움을 받았다면서 식량을 비롯해 평소 구하기 힘든 물건들을 잔뜩 싣고 오기도 했다.
그 와중에 제국에서 떼돈을 벌어서 금화를 실은 마차만 해도 수십 대에 이른다고 하는데, 도저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카엘이 미리 보내온 서신을 읽어 본 티겔 공작은 그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다 사실이라면?!
‘아들아, 대체 그동안 어떤 모험을 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