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두 백작가의 골칫덩이들 (2)
장기.
동방에서 건너온 판 위에서 상대방의 말을 잡는 놀이다.
칸칸이 그어 놓은 정사각형 판을 전장으로, 왕부터 병사까지 각자 다른 특성을 가진 말을 사용해 상대의 왕을 잡으면 승리했다.
무엇보다 장기판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략 전술과 심리전은 전략가들이 서로의 지략을 겨루는 데 쓰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전투의 전략 전술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전쟁을 형상화한 덕분에 지휘관이나 기사의 교양으로 여겨졌다.
회귀 전 카엘은 몸이 약했던 만큼, 눈앞의 리온보다 장기에 관심이 많았다.
아파서 누워 있던 카엘이 할 수 있던 거라고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스승한테는 전혀 상대가 안 됐지.’
수백 년 장기를 둔 스승에게 배운 만큼, 리온이 머리를 좀 쓴다고 해도 어떤 수를 두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카엘은 좌측 전장에 혼란을 유도하면서 우측에 기사가 파고들게 해 왕을 쳤다.
“제가 이겼습니다.”
“어? 음.”
자신만만하게 두던 리온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한 판만 더 두죠.”
“그러시죠.”
리온은 이번에는 절대로 찌르기에 당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장기를 뒀다.
그래 봐야 자신의 말들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져, 졌습니다.”
말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안색이 나빠지던 리온이 항복 선언을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야, 정말 어마어마한 실력이십니다. 이토록 옴짝달싹 못 하고 당한 건 처음입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때 뒤에서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리온! 또 장기를 뒀느냐? 장기 좀 둔다고 손님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이고르 백작이었다.
기다란 수염에 가는 눈매가 딱 봐도 올렉 백작과 반대로 깐깐한 성격 같았다.
“못난 아들이 내세울 게 저것밖에 없어 저런 거니, 너무 불쾌해하지 말게.”
이고르 백작의 말에 리온이 볼멘소리를 냈다.
“제가 졌는데 어떻게 잘난 체합니까?”
“뭐라고?!”
이고르 백작은 놀란 눈으로 카엘을 쳐다봤다.
자기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리온의 장기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근방의 강자들도 모두 꺾어서 왕국 내에서는 상대가 없다고 할 정도.
‘그런 리온을 꺾다니, 검술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좋나 보군.’
“프리지를 검술로 꺾었다길래, 저는 장기로 이겨 볼까 했는데 실패해 버렸지 뭡니까.”
“쯧, 역시 잘난 체하려 한 건 맞구나. 가서 근신하고 있거라.”
혀를 찬 이고르 백작은 리온을 쫓아냈다.
“네, 네.”
건들거리며 대답한 리온은 나가면서도 카엘에게 나중에 장기 한 판 더 두자고 했다.
리온이 나간 뒤에도 이고르 백작은 카엘을 칭찬했다.
“그간 활약상으로 검술에 재능이 있는 건 알았다만 장기마저 잘 두다니, 문무겸비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군. 브리온 공작님이 부럽구나.”
“과찬이십니다. 잡기를 좀 배운 것뿐이죠.”
“허허, 겸손하기까지. 그래, 나한테 전해 줄 게 있지?”
“네.”
카엘은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건넸다.
이고르 백작은 올렉 백작과 마찬가지로 서신을 빠르게 읽더니 흔적이 남지 않도록 서신을 불에 태웠다.
여전히 내용을 알려 주진 않았지만, 속은 후련했다.
‘심부름은 끝났고, 이제 독살과 암살을 어떻게 막으면 좋을지 고민해야겠네.’
문제는 시점이었다.
카엘이 아파 누워 있을 때 소식을 전해 들은 거라, 정확한 시점을 알 수가 없었다.
짐작할 수 있는 건, 두 가문의 자식들이 좋은 분위기에서 한자리에 모일 때라는 정도?
그래야 양쪽 모두 암살을 시도할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그게 언제냐는 거지. 차라리 그런 자리를 강제로 만들어야 하나?’
카엘이 고민할 때, 이고르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바로 올렉 백작을 만나러 갈 테니, 따라오게. 마침 올렉 백작과 비밀리에 회동하는 날이니까.”
“저도 말입니까?”
“레오폴드 저하께 아무 소리도 못 들었나? 자네와 함께 앞으로의 일을 논하라고 하셨는데.”
“못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짚이는 게 있었다.
‘아, 병력을 지원해 주기로 한 이야기인가?’
제국을 치기 전에 클리페우스성으로 병력을 보내기로 했으니, 언제 어떻게 할지는 자신과 상의하는 게 맞긴 했다.
정작 만나서 나온 이야기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 * *
카엘은 이고르 백작을 따라 고로드성에서 밖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를 걸었다.
소수의 인원밖에 공유하지 않는 이곳을 알려 준다는 건 그만큼 카엘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성 밖을 나와 닐바성으로 향하는 산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작은 호수와 낡은 오두막이 나왔다.
그 앞에는 올렉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오늘 달이 밝아 안 오는 줄 알았네.”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 친우를 보는 날을 빼먹을 수 없지.”
원수지간인 두 가문 수장의 인사치고는 너무 친근해 보였다.
“…….”
카엘이 어이없어하고 있으니, 올렉 백작이 웃으며 설명했다.
“사실 우리는 오랜 친구라네. 이곳은 어렸을 때 둘이서 놀던 은신처지.”
“아.”
“어렸을 때는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친구라기보다는 경쟁 관계였다고 할까.”
“그러다 제국에 유학 갔다가 깨달았다.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그러자마자 레오폴드 저하가 방문해서 우리를 떠보더군. 그제야 레오폴드 저하의 참모습과 그 큰 뜻에 감명받고 서로 화해하고 힘을 합치기로 했지.”
“그런데도 평소처럼 가끔 전투를 벌이는 건, 병력을 유지하고 훈련하기 위해서였군요.”
부유한 두 백작가의 오랜 다툼 덕분에, 이곳에는 전투와 관련된 모든 것이 대호황이었다.
무기나 방어구는 물론, 군마에 용병들까지.
심지어 이곳에서 공을 세워 한자리하기 위해 찾아온 떠돌이 기사들도 제법 됐다.
카엘이 중얼거린 소리에 두 백작은 감탄했다.
“바로 거기까지 파악했나? 과연 레오폴드 저하께서 중책을 맡기실 만해.”
“비상한 재능을 가진 이가 도와준다니 든든하지 않나?”
“얼굴에 금칠은 그만하시죠. 제 능력껏 도와드릴 테니까요.”
카엘의 말에 두 백작은 서로 마주 보고는 쓴웃음 지었다.
“우리 두 가문이 갑자기 화해한다고 해도 다들 납득하기 어렵지 않겠나? 때마침 우리 둘 다 장성한 자식도 있겠다. 혼인을 핑계로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다네.”
“그런데 둘 다 서로를 어찌나 질색하던지…….”
“확실히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더군요.”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서로 사이좋게 만들 방법이 없겠나?”
난감한 주문이었다.
그 둘을 사이좋게 만들라니.
‘차라리 오거와 싸우는 게 쉽겠다. 그나저나 형식상 결혼을 시켜도 될 텐데 설득해서 혼인시키려고 하다니.’
그것만으로 두 백작이 이번 일에 그만큼 진지하게 접근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결혼시키고 말 수도 있었지만, 두 가문이 과거의 갈등을 종식하고 힘을 합치려면 진심으로 결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카엘은 안도했다.
‘둘이 사이좋게는 못 하더라도, 자식들이 회귀 전처럼 죽지만 않으면 전처럼 죽어라 싸우진 않겠네.’
그때였다.
“백작님.”
“올렉 백작님.”
두 백작의 심복이 동시에 나타나 귓속말로 알렸다.
두 백작의 반응은 그런 귓속말을 의미 없게 만들었지만.
“뭐? 반란?”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심복들에게 병력을 준비시키라고 지시한 두 백작은 자리를 떠날 채비를 했다.
“무슨 일입니까?”
“몇몇 떠돌이 기사와 용병들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는군. 토스노산맥의 버려진 요새를 점거했다네.”
카엘은 대충 무슨 영문인지 짐작이 갔다.
‘아직 화해하기 전이라고 해도, 두 가문의 혼담이 오가고 전투가 뜸해진 상황이라 이거지.’
그렇게 전투가 끝나면 제일 필요가 없어지는 게 용병들이었다.
그 용병들이 이곳에서 공을 세워 자리를 잡으려던 떠돌이 기사들과 작당을 한 게 틀림없었다.
“어떡하실 겁니까?”
“당연히 응징해야지. 토스노산맥의 광산이 목적일 테니까.”
“다만, 요새를 차지한 게 골치 아프게 됐어.”
그렇게 운을 뗀 이고르 백작이 카엘에게 요새에 관해 설명했다.
두 가문의 다툼이 절정에 달할 때 서로 토스노산맥의 요지를 차지하려고, 요새를 건설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상대는 필사적으로 요새 건설을 방해했다.
그 탓에 양측 모두 사상자가 급증했다.
안 되겠다 싶었던 두 백작가는 거의 다 지은 요새를 폐쇄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내버려 둔 걸, 반란군이 거길 점령한 거였다.
최소한의 병력으로 경계하고 있었다지만, 외부도 아니고 내부에서 작정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막긴 어려웠다.
‘상대도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일을 저지를 정도로 무모하지 않다는 거군.’
“이거 피해가 막심할 텐데.”
“그래도 가만히 둘 순 없지.”
백작들이 한마음으로 다짐하는 걸 본 카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일을 기회로 두 가문이 힘을 합쳐 보는 게 어떻습니까? 프리지와 리온이 함께 처리하라고 하죠.”
세력을 끌어모으면서 두 가문을 배신해 명분도 충분한 데다가, 자리 잡은 곳도 두 가문의 경계선이라 함께 움직이기 좋은 위치였다.
“옳거니. 괜찮은 제안이군.”
“근데 둘이서 힘을 합치려고 할까?”
“그건 그래, 서로 싸우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고르 백작의 불안에 올렉 백작도 불안해했다.
그러더니 카엘을 붙잡고 부탁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이 가서 좀 도와주게.”
“그래, 둘 다 자네에게 호감을 보이는 거 같던데 자네 말이라면 좀 통하지 않겠나?”
그건 카엘이 보기에도 그랬다.
“알겠습니다.”
카엘이 승낙하자 두 백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맙네. 일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특별히 클리페우스성에 철광을 저렴하게 공급하겠네.”
“이 사람이 그건 당연히 그래야지. 레오폴드 저하께서 몬스터랑 싸울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많이 필요하실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대로 돈이 많더라도 필요한 철광을 마음껏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제국은 물론, 인근 왕국에서도 타국으로 철광을 반출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이 광물을 가지고 오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테고, 회색산맥에서 채굴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광물을 지원해 준다니, 안 도와줄 수가 없지.’
* * *
항상 전투를 벌이던 가문답게 병력 소집은 금방 이뤄졌다.
두 가문의 합동 토벌대는 순식간에 요새 앞까지 진군했다.
문제는 토벌대를 지휘하기로 한 프리지와 리온이 시작부터 티격태격했다.
“요새를 무리하게 공격할 필요가 있습니까? 고립시켜 두면 먹을 게 없어서 항복할 겁니다.”
“아아, 하품 나오는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기다릴 필요 있나요? 그냥 공격해서 무너트리면 되죠.”
리온의 제안에 프리지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빈정댔다.
당연히 리온은 발끈했다.
“이대로 공성이요? 애꿎은 병사들의 피해만 늘어날 겁니다. 바보도 아니고.”
“바보?!”
프리지가 눈을 치켜뜨고 노려봤지만, 리온은 모르는 척했다.
뜻밖에도 프리지는 얼굴이 뻘게지면서도 침착하게 자기 의견의 이유를 설명했다.
“기다릴 수야 있는데, 이제 농번기라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지금도 농사짓던 병사들은 걱정하느라 경계도 제대로 못 설 거예요.”
“음. 그래도…….”
예상외의 정론에 리온은 순간 놀랐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프리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누가 옳은지 한번 해 보죠. 제 휘하의 병사들만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더니 정말로 병사를 이끌고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벽을 끼고 세워진 요새를 제대로 된 공성 병기도 없이 공격하기 쉽지 않았다.
“이 겁쟁이들!”
결국, 프리지는 요새 안에서 버티는 반란군에게 소리친 뒤 피해만 본 채 철수했다.
“아쉽게 됐군요. 그럼 포위하며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죠.”
리온이 비웃으면서 병사들에게 숙영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새벽.
진지 근처가 소란스럽더니 반란군이 공격해 왔다.
놀란 리온이 허겁지겁 일어나 대응하려 했지만, 반란군은 놀라게 한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곧바로 요새 안으로 도망쳤다.
“경계를 이렇게 느슨하게 하면 어떡합니까?”
“죄송합니다. 적이 이렇게 빨리 공격해 올 줄은… 또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프리지의 큰소리에 리온이 굳은 얼굴로 약속했다.
언제 또 적이 야습해 올지 몰랐던 리온와 그 휘하 병사들은 뜬눈으로 지새웠다.
덕분에 토벌군의 사기가 급격히 낮아졌다.
그만큼 두 토벌군 지휘관의 걱정은 커졌다.
“이대로 실패하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는데.”
“프리지 님, 차라리 카엘 님께 지혜를 구해 보죠. 아버지께서도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아, 그렇죠.”
둘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카엘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카엘 님, 좀 도와주우세요.”
“이대로 토벌에 실패할 수는 없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나설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적당히 공격하면서 장기전으로 가면 절대로 질 리가 없었다.
요새라고 해 봐야 고립된 곳이라 오래 버틸 식량부터가 모자랄 테니까. 평소에 장기전을 대비해서 비축해 둔 식량은 전혀 없었다.
‘그게 싫으면 다른 작전을 써야지.’
이 두 어린 지휘관은 어느 쪽을 선택하면 좋을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공성 준비를 해 주세요.”
“역시 요새를 공격해서 무너트리는 게 맞죠?”
프리지는 리온에게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너트리긴 힘들 겁니다.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당히 공격하다가 후퇴하십시오.”
“앗! 적이 방심하고 또 야습하도록 유도하시는 거군요.”
리온은 카엘의 의도를 곧바로 파악했지만, 이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런데 또 제대로 방비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하룻밤은 모르겠지만요.”
리온의 말대로 토벌군은 뜻밖에도 군기가 매우 나빴다.
첫날 밤이야 당한 게 있으니 밤새 정신을 차리고 지키겠지만, 이게 이틀 사흘이 되면 장담하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카엘에게는 아주 유용한 경보기가 있었다.
카엘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브로칸을 슬쩍 보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