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불사의 뱀을 쉽게 잡는 방법 (1)
성 밖으로 나가던 카엘은 레오폴드와 마주쳤다.
“카엘, 들었나? 거인이 나타났다는군!”
레오폴드는 상기된 얼굴이었다.
저럴 법도 한 게 거인은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존재로 실제로 본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몬스터가 날뛰던 고대에는 거인들도 대륙에 널리 퍼져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드래곤에게 많이 살해당하고, 인간들과 몬스터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다 못해 대륙을 떠난 거였다.
‘지금은 외딴 섬에 모여서 살지.’
카엘은 회귀 전에 바닷가에서 거인을 본 적이 있었다.
오거만큼 강하진 않지만, 덩치가 큰 만큼 보통 사람보다는 힘이 셌다.
무엇보다 다소 무식하긴 해도 아예 말이 안 통하는 상대는 아니었다.
“들었습니다. 일단 가서 이야기해 보려고요.”
“거인이랑 대화를 한다고? 그게 가능한가?”
“시도는 해 봐야죠. 거인과 대화한 사람에 대한 책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대화해 본 적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댔다.
항구로 가고 있으니, 한창 경비병에게 명령을 내리던 프리츠가 이쪽을 보고 소리쳤다.
“레오폴드 저하! 카엘 님! 여긴 위험합니다! 거인들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대화하기 전에 이미 한바탕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그 말에 레오폴드가 카엘을 쳐다봤다.
카엘은 모르는 척하며 프리츠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예전에도 거인이 쳐들어온 적이 있나?”
“아뇨. 간혹 주정쟁이의 목격담은 들은 적 있지만, 실제로 나타난 건 처음입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이 근방에 거인의 섬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저하는 위험하니 여기 계시죠. 브로칸, 우리는 가 보자!”
“네!”
카엘이 앞으로 달려 나가자 브로칸이 힘차게 대답하고 쫓아왔다.
그걸 본 프리츠가 기겁했다.
“위험합니다. 저하, 카엘 님 좀 말려 주십시오!”
“왜 말려? 소드 엑스퍼트도 꺾을 정도로 강한데, 해볼 만하니까 덤비겠지.”
“소드 엑스퍼트를 꺾었다고요?! 약제사 아니었나요?”
프리츠가 화들짝 놀라는 걸 본 레오폴드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카엘이 뛰어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싸우는지 구경이나 하자고.”
* * *
카엘이 항구에 도착하니 정말로 거인과 한창 싸우고 있었다.
부두에 올라온 거인은 보통 남자의 서너 배는 컸다.
그 덩치에 걸맞게 나무 기둥을 봉처럼 잡고 휘둘러 주변을 마구잡이로 부수고 있었다.
하지만 카엘로서는 분통 터지는 장면이었다.
‘이 자식이 한창 공사 중인 곳을 부숴?! 저기에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카엘 님, 저기에도 있습니다.”
브로칸의 말대로 저 거인 말고도 항구 근처 바닷속에서 선박을 공격하는 거인들이 잔뜩 있었다.
‘이렇게 많이 보는 건 처음인데.’
그래도 경비병들과 어인족들이 물 안팎에서 필사적으로 거인들을 막고 있었다.
어인족도 잘 싸우고 있지만, 경비병들도 거인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카엘은 내심 감탄했다.
‘대단한데? 확실히 프리츠 경이 제대로 뽑고 훈련했나 보군.’
거대한 적 앞에서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어지간한 강병에게도 힘든 일인데 그걸 해낸 거였다.
쾅! 와르르르.
거인이 휘두른 철근에 부두의 접안 시설이 무너져 내렸다.
그걸 본 카엘이 인상 쓰며 브로칸에게 말했다.
“브로칸, 변신해! 저것들 같이 쓸어 버리자.”
“어? 괜찮습니까?”
“이미 어인족도 있는 마당에 라이칸스로프 하나 더 나온다고 대수겠어?”
“아, 알겠습니다. 흐흣.”
카엘이 허락하자마자 브로칸은 신이 나는지 웃으며 본모습을 드러냈다.
“어이쿠, 저게 뭐야?”
“느, 늑대다. 늑대 인간이 나타났다.”
브로칸의 정체를 아는 어인족은 괜찮았지만, 경비병들은 깜짝 놀랐다.
“어?”
다행히 부두 위의 거인도 브로칸을 보고 놀랐는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카엘은 그 틈에 거인화 포션을 브로칸에게 건넸다.
“이거 마셔.”
“저 아픈 곳 없는데, 무슨 약인가요?”
“강해지는 약이야.”
“앗! 감사합니다.”
그 말에 브로칸이 냉큼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기세 좋게 마신 브로칸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음? 별로 달리진 게 없는데요?”
“내가 보기에는 약효가 나타나는 거 같은데?”
“벌써요? 근데 왜 카엘 님이 점점 작아지는 거죠?”
“네가 커지는 거야.”
“네? 우왓!”
브로칸이 주위를 둘러보고 화들짝 놀랐다.
정말 카엘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게 작아져 버린 거였다.
실제로 브로칸은 보통 사람의 두 배로 커졌다.
‘저 정도면 별 탈 없이 약효가 나올 줄 알았지.’
드래곤 하트의 함량을 더 높이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는데. 당장 써먹어 본다고 안전을 위해 최소화한 거였다.
그래도 예전보다 서너 배는 강해졌을 게 분명했다.
카엘이 브로칸에게 소리쳤다.
“브로칸! 가서 해치워!”
“네!”
힘차게 대답한 브로칸은 카엘의 지시에 힘차게 대답하고는 멍하게 있는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거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철근을 휘둘렀다.
브로칸이 거대화됐다고 해도 여전히 거인보다는 작았지만, 원래도 보통 인간보다 훨씬 민첩하고 힘도 셌다.
가볍게 거인의 공격을 피한 브로칸은 앞발을 휘둘러 거인의 허벅지를 할퀴었다.
“크억!”
거인이 괴로워하며 몸을 웅크리는 순간, 브로칸은 등 뒤로 뛰어올라 목덜미를 깨물었다.
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린 뒤, 거인이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엎어졌다.
브로칸이 단번에 숨을 끊은 거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경비병들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함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아아!”
“수호신이다! 수호신님이 우리를 지켜 주셨다!”
“왜 항구 도시의 수호신이 늑대야?”
“알 게 뭐야? 우리를 지켜 주면 수호신이지. 와아아아!”
한편, 무참하게 동족이 죽는 모습을 본 거인들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난동을 부렸다.
바닷속에서 작은 배를 집어던지며 뭍으로 올라오려 했다.
다만 사기충천한 경비병들도 지지 않고 막으려고 했다.
그 와중에 거인 중 하나가 빈틈을 뚫고 부두로 올라왔다.
“어딜 올라와!”
브로칸은 그 거인을 향해 곧바로 덤벼들었다.
거인은 앞서 거인처럼 당하지 않겠다는 듯 목 뒤를 조심했지만, 거기에 신경 쓰느라 브로칸의 발톱에 무방비로 당했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거인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됐다.
그 와중에 항구로 올라온 거인 하나가 카엘을 보고 중얼거렸다.
“화려한 옷! 높은 인간이다! 죽인다!”
“위험합니다, 카엘 님.”
거인의 거대한 주먹이 날아오는 걸 보고 프리츠가 비명을 질렀다.
퍽!
프리츠는 카엘이 그대로 얻어맞고 날아가는 장면을 예상했으나 정작 카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통만 한, 주먹이 날아오는 걸 그대로 막아 낸 거였다.
“어?”
거인이 얼빠진 소리를 내는 사이, 카엘은 거인을 주먹째로 옆으로 내팽개쳤다.
와장창!
“크억!”
옆의 건물에 엎어진 거인이 피를 토했다.
“다들 멍하니 있지 말고 찔러라! 죽여 버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입 벌리며 보던 프리츠가 다른 경비병들의 손이 멈춰 있는 걸 보곤 소리쳤다.
경비병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쓰러진 거인을 창으로 찔렀다.
거인들은 그 모습에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 와중에 한 거인이 소리쳤다.
“일단 후퇴한다. 후퇴!”
그 말에 거인들은 일제히 항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바닷속에서 헤엄치면서 눈치만 볼 뿐 돌아갈 기미는 전혀 없었다.
어인족을 지휘하던 이쿤이 물었다.
“카엘 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기다려 봐.”
카엘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후퇴하라고 소리친 거인에게 물었다.
그 거인은 다른 거인보다 머리 하나는 큰 게 아무래도 우두머리인 듯했다.
“여긴 무슨 이유로 쳐들어왔냐.”
“우리 땅이다!”
“누가 그래?”
“코그가 그랬다. 코그가 약속한 땅이다!”
“코그?!”
코그는 심해성의 왕좌를 노리다가 죽은 해룡 제피슈의 후예였다.
문제는.
“코그라면 죽었는데?”
카엘의 말에 거인들이 수군거렸다.
“죽었다고? 정말?”
“아니다. 분명 난파당한 해적 인간이 말했다.”
“맞다. 코그가 해룡이 됐다고 했다.”
거인들의 대화를 들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이 갔다.
회귀 전에 왜 거인이 나타났다는 말조차 못 들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회귀 전에는 드래곤 하트를 얻은 코그가 바닷속에서 죽어 버려 거인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해적들이 전투에 휘말린 탓에 우연히 코그가 드래곤 하트를 얻은 소식이 거인들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코그가 힘을 얻었으니, 거인들도 자신감을 가지고 움직인 거군. 그나저나 코그 녀석, 심해성을 손에 넣으면 대륙까지 넘보려 한 건가?’
“…정말 죽은 게 맞나?”
거인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어인족들에게 물었다.
“정말 죽었다. 우리의 왕이 쓰러트렸다.”
이쿤이 자랑스레 말했다.
사실과는 좀 달랐지만, 어인족까지 코그가 죽었다고 하자 거인들은 납득하는 듯했다.
그런데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정말 죽은 거 같다.”
“큰일이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는 싫다.”
그 말을 듣던 카엘이 물었다.
“왜 돌아가기 싫은데?”
“우리가 살던 섬에 괴물이 나타났다.”
“많은 거인이 죽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나온 거다.”
‘거인들이 당할 정도라니, 드래곤이라도 나타났나?’
아니, 드래곤이라고 하면 버티지 않고 진작 도망치고도 남았다.
“무슨 괴물인데?”
“거대한 뱀이다. 그것도 머리가 여럿 달린 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어서 한번 물리면 죽는다.”
“한번은 싸워서 머리를 잡아 뜯었는데 새 머리가 났다. 끝이 없다.”
거인들이 앞다퉈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떠오르는 몬스터가 있었다.
‘히드라가 나타났나 보군.’
확실히 히드라라면 거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도 했다.
물리면 바로 사망할 정도로 치사율 높은 맹독에다가, 끊임없이 부활하는 재생력까지.
단순히 힘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카엘은 퇴치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카엘은 거인들에게 물었다.
“내가 히드라를 해치우면 너희들의 섬으로 돌아갈 건가?”
어인족과 힘을 합치면 당장에는 거인들을 쉽게 쫓아낼 수도 있겠지만, 카엘이 없을 때나 이곳을 오가는 선박을 거인이 공격하면 앞으로의 일에 차질이 생기는 게 걱정됐다.
수십 수백 개는 넘는 섬을 뒤져 거인을 모조리 때려잡기보다는 회유하는 게 나았다.
‘무엇보다 전설급 약재가 될 히드라한테 안내도 해 줄 테고.’
“인간이 히드라를 해치울 수 있다고?”
“말도 안 된다!”
“믿기지 않는다.”
“안 믿으면 상관없고. 너희들만 손해지.”
카엘의 대꾸에 거인들이 움찔했다.
“우리가 손해라고? 정말인가?”
“손해 보긴 싫다.”
“잠깐만 기다려라. 계산해 보겠다.”
“…….”
다들 거인들의 대화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잠시 후 거인들이 결론을 내리고 말했다.
“히드라만 해치워 준다면 다시는 섬 밖에 나오지 않겠다.”
“약속한다.”
다들 안도했지만, 카엘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난장판을 쳐 놓고 안 오는 정도로는 안 되지! 보상해야지.”
“보상? 뭘 원하나?”
“우리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반짝이는 거 없다.”
“가진 건 몸뿐이다.”
“그럼 몸으로 때워야지.”
“……?!”
이해가 안 간다는 거인들에게 카엘이 차분히 설명했다.
“내가 히드라를 해치우면 대신 앞으로 항구도시를 지켜라. 그리고 내가 부르면 나와서 싸워라.”
“항구도시를 지키는 건 괜찮지만, 싸우는 건 싫은데…….”
“싫으면 없던 일로 하든가.”
거인의 투정에 카엘이 냉정하게 대꾸하자.
거인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이내 합의하고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겠다. 다만, 계속 싸울 수는 없고 딱 세 번만 명령에 응하겠다.”
‘음? 3번이나? 한 번 부를 생각이었는데.’
카엘은 내심 잘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양보하는 듯 생색을 냈다.
“그러지. 세 번만 부르겠다.”
“좋다.”
“약속했다. 그럼 어서 히드라를 해치워 다오.”
“우리가 데려다주겠다.”
마음이 조급한지 곧바로 다가오는 거인들을 카엘이 제지했다.
“아니, 싸우려면 준비를 해야 한다. 조금 기다려.”
“빨리 준비해라.”
“지루한 건 못 참는다.”
“그럼 우리는 뭐 하고 있나?”
투덜대는 거인에게 카엘이 쏘아붙였다.
“뭐 하기는. 너희가 부숴 놓은 거 고쳐야지.”
“……?!”
카엘이 엉망진창이 된 항구와 선박들을 가리키자 거인들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