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항구도시 아말레이 (2)
항구도시 아말레이의 광장은 신음으로 가득했다.
앓는 소리를 내는 병자 수백 명이 광장 곳곳에 제멋대로 늘어져 있고, 드물게 울상으로 병자를 돌보는 이가 붙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짚으로 덮어 둔 시체들이 가득했다.
“크흐흑. 아버지! 이렇게 가시면 어찌합니까.”
“아들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누가 좀 도와주시오! 제발 좀!”
“아이고. 아이고…….”
통곡하는 이들을 지나가며 병자들을 살펴보는데, 한 사내가 카엘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약제사입니다. 도시에 전염병이 돈다길래 레오폴드 저하께서 도와주라 하셔서 왔습니다.”
“약제사?! 제발 좀 우리 딸아이 좀 살려 주시오!”
사내가 카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그만큼 절실한 거였다.
“진정하세요.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치료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아줌마들이 수군거렸다.
“약? 이 병에 약이 있어?”
“의원님도 없다고 하지 않았어? 더 퍼지기 전에 아픈 사람들 밖에 내놓고 병이 낫길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광장에 이리 모여 있던 건 죽은 의원이 지시한 대로 따른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시를 잘 따르는 편인가? 그러면 좀 편하겠는데?’
“근데 레오폴드 저하라고 하면 그 망나니…….”
“이크, 말조심해! 경을 칠지도 몰라.”
옆의 아줌마는 등짝을 치면서도 수군거리는 걸 멈추진 않았다.
“그분이 그냥 도와주라고 할 거 같지는 않은데, 치료약이라고 엄청 큰돈을 요구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효과도 있는지 모르는데 돈을 줘? 그럴 돈 있으면 진작 신전에 바치고 기도했겠다.”
아무래도 레오폴드 왕자가 쌓아 둔 악명 때문에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카엘은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돈은 안 받습니다.”
“이크. 다 들으셨나…….”
“제발 용서해 주세요.”
“네? 뭔 용서요? 전 치료약을 비싸게 받을 거라는 말밖에 못 들었는데요?”
카엘이 모르는 척하자 그제야 아줌마들이 안도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근데 돈을 안 받겠다고 하셨는데.”
“정말 공짜인가요?”
“네.”
카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돈이야 제국에서 번 것에 심해왕에게 받은 것까지 하면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게다가 돈을 받고 싶어도 정말 돈이 있다면 저 사람들이 이렇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아줌마 말대로 신전에 바치고 기도하고 있었겠지.’
무엇보다 지금은 돈보다 더 중요한 걸 얻을 기회였다.
그건 바로 이곳 항구도시 아말레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이곳을 정상화하면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회귀 전에 전염병이 유행할 때도 웬 용병단 하나가 이곳을 재건하고 차지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브레프니 왕실에서 그 용병대장을 새로운 영주로 공식 임명까지 해 줬다.
‘기존 영주도 죽고, 용병단을 몰아낼 만한 핏줄도 없던 탓이 컸지만.’
무엇보다 괜찮은 위치의 항구임에도 불구하고 해적이 횡행해 상선은 거의 못 와서 어업으로 연명하던 곳이었기에 그 가치를 낮게 본 거였다.
‘그런 골칫덩이니 레오폴드가 이곳을 정리하고 자리 잡으면, 정말로 잘했든 운이든 맡기겠지.’
왕국의 골칫거리를 왕성에서 멀리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반면에 지금 레오폴드가 이곳을 차지하면 이점이 많았다.
우선 위협이 되는 해적은 코그가 박살 내 버린 데다, 우호적으로 변한 메르 8세의 도움을 받으면 배를 움직이기도 매우 편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제국뿐만 아니라, 주위 왕국과 교역을 할 수 있고, 클리페우스성에서 필요한 물자도 손쉽게 마련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때 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프리츠 님!”
“프리츠 올슨 님이 오셨어!”
아까 치료소에서 마주쳤던 늙은 경비병이 나타난 거였다.
‘프리츠 올슨이라,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아!’
분명 회귀 전에 여기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용병단을 불러들인 사람이었다.
용병대장이 항구도시의 영주로 임명된 후에는 서기관이 되었다.
카엘이 기억하는 건, 용병 출신인 영주와 그 부하들의 횡포를 막다가 죽어서였다.
소영웅의 비극적인 이야기라며 대륙에 널리 퍼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프리츠 올슨은 확실히 주민들에게 신뢰받는 인물인지 등장하자마자 분위기가 밝아졌다.
“올슨 님, 망나니… 아니 레오폴드 저하께서 보낸 약제사랍니다.”
“나도 들었어. 진작 말해 주지.”
프리츠는 카엘에게 다가와서 투덜대더니 사람들에게 말했다.
“돈도 안 받는다는데 따라 줘도 손해는 없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요.”
“지금 우리가 찬물 더운물 가릴 때는 아니니…….”
다들 납득하는 와중에 한 명이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믿으라고 해도.”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야?”
프리츠가 버럭 화를 내자 볼멘소리를 낸 사내가 움찔했다.
카엘은 웃으며 프리츠를 말렸다.
“전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치료소에서 약재를 좀 챙겨 왔으니 치료제를 만들죠. 임시방편이 되겠지만.”
“그럴 텐가? 그럼 부탁하네.”
“대신 만드는 동안, 다들 손을 씻고 여기 프리츠 님처럼 안면 가리개를 해 주세요. 여기 천은 충분히 있습니다.”
카엘이 천을 내려놓자 프리츠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들었지? 이렇게 가려야 병에 전염안 된다니까, 다들 어서 씻고 와. 내가 하나씩 나눠 줄 테니!”
그 말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긴 됐고, 나는 약이나 만들어야겠다.’
카엘은 가방을 내려 가지고 온 재료를 펼쳤다.
이 전염병은 약을 먹는다고 바로 낫는 게 아니니, 최대한 효과가 있어 보이는 게 중요했다.
‘그러려면 눈에 띄는 멍울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지.’
간혹 전염병에 걸려 생긴 혹이 병의 근원이라며 억지로 잘라 내기도 하는데, 그랬다가는 즉사하기 일쑤였다.
카엘은 노란 꽃이 인상적인 포르시아의 열매를 말린 것을 그릇에 담았다.
이건 혈압을 낮추면서 지혈하는 데 주로 쓰이는데, 상처가 부어 뭉친 것을 풀어 주는 데 효과적이다.
거기에 땀이 나게 해서 열을 빼 주고, 주로 인후, 편도, 폐 부근의 해독 작용과 통증을 완화하는 시미치푸가를 넣은 다음.
여기에 몇 가지 약재를 섞고 빻았다.
‘그런 다음 정화한 마력을 흘려주면 끝.’
한창 바쁘게 부보넨 임시 치료제를 만들고 있으려니 어느새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손놀림이 범상치 않네.”
“정말 약제사인가 본데?”
“그럴싸한 게 효과가 있어 보여.”
카엘은 임시 치료제를 굳히다가 연고로 쓸 일부를 덜어 내고, 나머지를 약환으로 만들었다.
“다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돌아보는데, 사람들이 너도나도 달라며 손을 뻗었다.
“그, 그저 저한테 주세요! 저희 아버지가 위독합니다!”
“무슨 소리야! 제 아내가 더 급합니다!”
“저희 딸 좀 살려 주세요. 자식 중에 애 혼자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하나같이 처절하게 애원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걸 보고 프리츠가 나서서 말리려고 할 때, 카엘이 말했다.
“누구한테 드릴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제일 급하지만, 효과가 나타날 만한 환자에게 써야죠.”
‘호오. 아직 젊은데 강단이 대단한데?’
이 아수라장 속에서 침착하게 대처하는 카엘을 보며 프리츠가 감탄했다.
그러고 곧바로 카엘을 지원하기 위해 엄포를 놓았다.
“다들 진정하게! 이러면 누구한테도 주기 어려워! 약제사의 판단을 믿어야지.”
“하긴…….”
“약제사님이 제일 잘 알겠죠.”
“난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도 지켜볼래. 아무리 그래도 공짜 약이잖아.”
그러자 사람들이 이해하고 물러섰다.
카엘은 그 사람들 사이를 지나 병자들을 살폈다.
그러다 목 옆과 겨드랑이를 비롯해 여기저기에 혹이 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건강했는지 상태는 매우 심각해 보이는 것과 달리 아직 위중한 지경은 아니었다.
‘이 아이한테 먹이면 괜찮겠어.’
카엘의 의도를 읽었는지 소년의 옆을 지키고 있던 아주머니가 성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애는 이제 글렀습니다. 차라리 다른 분께 약을 드리세요.”
그렇게 말하는 아주머니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자식이 아파 돌보는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는지 비쩍 마른 데다가 혈색이 매우 어두운 게 곧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이대로라면 아주머니가 소년보다 먼저 죽을지도 몰랐다.
“아뇨. 괜찮으니 잠깐만 비켜 주세요.”
카엘은 소년의 곁으로 갔다.
아주머니에게 약을 먹이고 연고를 바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운이 없어 보였다.
“괜한 애를 쓰시는 게 아닌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힘을 내셔야죠.”
카엘은 그렇게 대꾸하다가 멈칫했다.
‘말로만 힘내라고 하면 뭐 해. 그 이전에 힘낸다고 흥분하면 돌아가시겠는데?’
그러면 소년이 나아도 문제였다.
소년이 낫는 걸 보면 분명 감정이 격해질 테니까.
카엘은 일단 소년에게 약환을 먹이고, 혹에 연고를 바른 뒤, 아주머니에게 회복 포션을 건넸다.
“이거 한 모금만 드세요.”
“이런 귀해 보이는 걸… 저흰 가진 게 없어 보답할 것도 없는데.”
“어여 마셔. 일단은 살고 봐야지. 그래야 이 아이가 일어나면 다시 안아 주지.”
프리츠가 설득하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복 포션을 살짝 마셨다.
꿀꺽.
그러자 곧장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머.”
아주머니는 며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기력이 회복되는 걸 느끼고는 신기해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게 아닌가?
“남편도 자식들도 다 죽고, 하나 남은 자식마저 죽어 가는데 이 어미만 건강해 봐야 무슨 소용이라고…….”
아주머니가 한참을 한탄할 때였다.
아래에서 뭔가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어느새 정신을 차린 아들이 잡아당긴 거였다.
“어, 엄마. 울지 마.”
“어?! 잭, 이제 괜찮아?”
“괜… 괜찮으니까. 울지 마.”
자식이 어미를 안심시키기 위해 온 힘을 짜내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그 모습은 어미의 눈물샘을 다시 자극할 뿐이었다.
“크흐흑.”
아주머니가 자식을 부여안고 우는 와중에 사람들은 소년이 나은 걸 보고 웅성거렸다.
“저, 정말 나았어.”
“혹도 많이 가라앉은 거 같은데? 저렇게 효과가 좋다니.”
“저 약을 먹여야 해.”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카엘의 손에 쏠렸다.
카엘이 힘으로 뺏길 리도 없겠지만, 그 전에 프리츠가 나서서 막았다.
“뭣들 하는가? 이렇게 달려들면 내가 베겠네.”
움찔.
프리츠의 으름장에 사람들이 멈칫한 틈을 타서 카엘이 말했다.
“진정하세요. 이 약을 먹는다고 무조건 낫는 것도 아니고, 이 아이도 아직 다 나은 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카엘이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이 힘을 합치면 병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
“어, 어떻게 말입니까?”
“우선 더 전염되지 않도록 안면 가리개를 하고, 손을 잘 씻어야 합니다.”
“간단하잖아.”
“집 안부터 생활하는 곳에 쥐나 벌레가 끓지 않도록 소독한 뒤, 환기도 꾸준히 하고요.”
“그거면 됩니까?”
“네! 병자들은 청소한 구역으로 옮긴 뒤, 돌보고 계시면 제가 치료제를 드릴 겁니다.”
외부에 두면 전파야 덜 되겠지만, 추운 새벽바람을 맞으면 안 그래도 쇠약해진 환자들에게 위험했다.
카엘의 말이 끝나자 프리츠가 사람들에게 호통쳤다.
“다들 들었지? 어서 움직여!”
“네,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곧바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느새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광장에 활기가 찼다.
그만큼 희망이 생긴 거였다.
그 광경을 보던 카엘이 프리츠에게 말했다.
“그럼, 일 처리 좀 부탁합니다.”
“이런 늙은이를 부려 먹을 생각인가.”
“여기 믿을 만한 분은 프리츠 님밖에 없네요. 전 약재를 좀 더 구해 오겠습니다.”
카엘은 항구도시 아말레이에서 나와 엘프들과 어인족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근데 노아나가 마중 나오는 게 아닌가?
“벌써 모르타와 교대했어?”
“도망치는 사람들을 잡았거든요. 어떡할까요?”
“한번 보자.”
“안내하겠습니다.”
“음.”
카엘은 노아나의 뒤를 따라 다가가다가 아는 얼굴인 걸 보고 멈췄다.
신전에서 봤던 귀족들이 도망친 거였다.
‘아무래도 그냥 버티기에는 제국의 후환이 두려웠던 모양이네.’
“일단 가진 거 다 뺏고, 아말레이로 돌려보내. 주변에 강도가 있다고 하면 도시 밖으로 도망치는 사람도 적겠지.”
“혹시 다시 도망쳐 나오면요?”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도록.”
“알겠습니다.”
노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나를 비롯해 엘프 자매들은 저번에 추격대를 몰살한 것도 그렇고, 이런 면에서는 가차 없었다.
“이쿤은 아직 안 왔지?”
“네. 아직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좀 더 걸리지 않을까요?”
“저 왔습니다.”
노아나가 말하는 와중에 이쿤이 불쑥 나타났다. 급하게 왔는지 아직 잔뜩 젖은 채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아, 국왕께서 전적으로 지원하라고 하셔서요. 심해성의 어인족들이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고, 말씀하신 물품 중 일부는 먼저 들고 왔습니다.”
“정말?”
“네, 그렇습니다.”
이쿤이 신나서 말하는 걸 보니,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진심인 걸 보니 건강해진 덕분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 덕분인가? 하긴 그게 아니었으면 드래곤 하트를 별말 없이 내줬을 리 만무하지’
솔직히 마지막에 말을 바꿨을 때를 대비해 두기도 했었다.
“어쨌든 고맙다고 전해 줘.”
“네!”
그 뒤로는 일이 일사천리로 풀렸다.
메르 8세의 지원으로 카엘은 약을 잔뜩 만들어서 나눠 줄 수 있었고, 다른 치료까지 병행해 병자들의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프리츠가 사람들을 이끌고,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 사망자 처리를 앞장서서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런 각고의 노력 뜻에 항구도시 아말레이는 조금씩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었다.
신전에 숨어 있던 자들은 그 달라진 분위기를 뒤늦게 깨닫고 이상함을 느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신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