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66화 (66/234)

66화 항구도시 아말레이 (1)

“진정하고 똑바로 말해 봐.”

카엘이 혀를 빼고 헥헥거리는 브로칸을 타일렀다.

브로칸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관문에서부터 누가 누워 있길래 자는 건가? 하고 다가가 보니, 이미 죽어 있었어요.”

“죽어 있었다고?”

“네! 그 너머에도 사람이 여럿 죽어 있었어요. 옆에 검은 피를 토한 흔적도 보이고요. 아, 목에 커다란 혹이 달린 사람도 봤는데 관계 있을까요?”

“검은 피와 목에 혹이라… 설마.”

“카엘 님, 혹시 짚이시는 거라도 있나요?”

“있긴 한데,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아, 잠깐만.”

항구도시 아말레이로 향하려던 카엘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혹시 도시 안에 들어갔어?”

“아니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멀리서 살펴만 보고 일단 돌아왔습니다.”

“그래? 잘했다.”

“헤헷!”

카엘은 기뻐하는 브로칸을 데리고 항구도시로 향했다.

저 멀리서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시체를 태우는 건가?’

관문 가까이 가니 브로칸의 말대로 웬 사내가 쓰러져 있었는데, 얼핏 봐도 병색이 짙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겠어.’

카엘은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가리게 묶고 브로칸에게도 하나 건넸다.

“너도 나처럼 가려……. 아인종은 안 걸리지만, 옮을 수도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도시 안에 들어갔는지 물어보신 거네요.”

“응.”

카엘은 대꾸하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시체인 걸 감안 하더라도 피부가 거무튀튀했다. 팔을 들어 보니 겨드랑이 쪽에 멍울이 올라와 있었다.

‘역시나.’

“어, 저 안에 아주머니 목에도 이런 혹이 달려 있었어요.”

“그래? 가 보자.”

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브로칸의 말대로 곳곳에는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검은 피를 토하고,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한 듯 보였다.

그야말로 현실에 펼쳐진 지옥.

그나마 다행인 건 카엘이 어떤 병인지 바로 파악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건 틀림없이 부보넨병이군.’

부보넨병은 벼룩에 의해 전파되는 전염병!

감염된 부위 중 목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가 부어오르면서 혹이 생긴다.

그게 더욱 악화하면 구역질과 복통에 시달리다가 병이 폐까지 퍼지면 숨쉬기가 힘들어지며 심각한 경우 검은 피를 토하기도 한다.

치사율도 높지만, 전염력도 매우 강력한 병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빨리 퍼졌지? 아직 몇 년은 더 남았을 텐데.’

카엘이 기억하기로는 몬스터 대침공이 일어나기 2, 3년 전쯤에 제국 일부와 왕국에서 기승을 부렸다.

한창 유행할 때도 클리페우스성까지 그 여파가 미치지 않았고, 카엘도 아직 병상에 누워 있을 때라 어떻게 전파되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중요한 건 부보넨병 때문에 전체 인구의 반의반 정도가 사망하고 수십 개의 마을이 초토화됐다는 것!

‘그 탓에 농사도 제대로 못 짓는 바람에 왕국이 크게 위태로워졌었지.’

그렇게 왕국의 국력이 크게 쇠한 탓에 몬스터 대침공을 막을 여력이 더 없기도 했었다.

당연히 그걸 기억하는 카엘은 사전에 전염병이 광범위하게 퍼지는 것을 막을 생각이었다.

적절한 시기에 전염병에 대한 대책을 레오폴드를 통해 전파하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일찍 병이 퍼진 거였다.

‘근데 정말 일찍 대유행이 시작된 건가? 아니면, 이번에는 이 항구도시에만 퍼지는 전염병의 전조일 뿐인가?’

“으, 으…….”

고민하며 주위를 살펴보던 카엘은 저기에 경비병 하나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회복 포션을 먹일 수도 없고…….’

이 전염병에 회복 포션을 쓰면 오히려 병균까지 키워 병이 더욱 악화한다.

자칫하다가는 즉사할 수도 있었다.

카엘은 다가가서 아쉬운 대로 물이라도 조금 흘려 넣었다.

“흐음. 크윽.”

“정신 차려! 어떻게 된 거야?!”

“…괴, 괴로워.”

경비병은 의식이 들긴 했으나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다가 카엘을 보더니 황급히 매달렸다.

“도, 도와주십시오. 다들 시커멓게 변해서 죽었습니다.”

“영주는 어떻게 됐나? 다른 귀족들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도망쳤습니다…….”

“뭐라고?!”

카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곳을 지키고 관리해야 할 자들이 위기에 처했다고 도망쳐 버리다니.

평소에 거들먹거리지나 말든가.

더 큰 문제는 이 도망자들이 다른 마을과 도시에 점령병을 퍼트릴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것부터 막아야 해.’

“크윽, 컥!”

경비병은 검은 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뒤늦게 다가온 브로칸이 깜짝 놀랐다.

“어?! 죽은 건가요? 살아난 거 같더니…….”

“아무래도 죽기 직전이었던 모양이야. 일단 돌아가자.”

카엘이 일행에게 돌아가니 노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브로칸이 말한 대로 마을에 전염병이 퍼졌다. 매우 심각하더군.”

“아…….”

“미안하지만, 이곳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저희는 괜찮습니다. 카엘 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노아나가 공손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카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냉정하게 말했다.

“전염병이 대륙에 퍼지지 않는 걸 우선으로 한다. 항구도시를 봉쇄하고 여기서 더 퍼져 나가지 않도록 한다. 생존자들을 확인하는 건 그다음이다.”

전염병에 생명이 죽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당장 눈앞의 생명을 구한다고 수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트릴 생각도 없었다.

“브로칸은 서신을 새로 써 줄 테니 레오폴드 님에게 달려가서 전해다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서신을 새로 쓰는 사이에 깨끗이 씻고 옷도 갈아입어라. 병이 옮을지 모른다.”

“네, 바로 씻고 오겠습니다.”

브로칸이 대답하고 뛰어가자 노아나가 나섰다.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마음은 고맙다만, 동족부터 챙겨야지.”

“다들 그동안 많이 회복해서 가만히 쉬고 있는 건 괜찮을 거예요.”

확실히 카엘이 여기서 당분간 머무는 데 엘프들이 갈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 한 명은 여기서 동족을 돌보고, 둘이서 항구도시 근처에서 더 빠져나가는 인원이 있으면 찾아서 막아 줘.”

“알겠습니다.”

“…문제없어.”

노아나와 데키마가 먼저 대답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앗! 나만 빼놓고.”

“모르타는 있다가 교대해 줘.”

“네, 알았어요.”

모르타가 납득하자, 어인족 이쿤도 말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뭘 하면 좋겠습니까?”

안 그래도 어인족에게는 따로 부탁할 게 있었다.

“그럼 너희는 물품 좀 구해다 줘. 필요한 물건이 좀 있거든.”

항구에서 물품을 못 구하면 인근 지역에서도 구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인족이라면 바다를 건너서 제국에서부터 충분히 물건을 구해 올 수 있었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좋아. 잠시만 기다려 줘.”

카엘은 먼저 이쿤에게 현재 필요한 물품을 자세히 써 줬다.

“이것만 구해 오면 됩니까?”

“어. 여기 금화 줄 테니까, 최대한 넉넉히 사 와.”

“알겠습니다. 얘들아, 가자!”

이쿤은 엘프들을 돌봐 줄 어인족을 몇 남기고 바다로 사라졌다.

카엘은 곧바로 레오폴드에게 보낼 서신도 썼다.

현재 항구도시 아말레이에 전염병이 퍼졌다고 알리고 전염병이 왕국을 휩쓸지 않도록 전파를 막는 방법을 담았다.

레오폴드가 뭘 해야 하고,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지까지 포함해서.

“무사히 전해 줘.”

“맡겨 주십시오!”

브로칸은 가슴을 두드리고는 빠르게 달려갔다.

* * *

카엘은 다시 아말레이로 향했다.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구해야 하지.’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올라오는 것만 봐도 남은 사람도 적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영주를 비롯해 유력자들이야 재산을 챙겨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산다고 해도, 대다수는 삶의 기반을 버리고 떠나기 힘들었다.

‘그중에는 아직 전염병에 안 걸린 사람도 있겠지.’

관문을 지나 도시 내부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카엘은 먼저 신전을 찾았다.

평소에도 아프면 신전을 찾듯이, 전염병이 돌면 신의 저주라며 기도하러 사람들이 많이 찾기 마련이었다.

신전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체로 마을 중앙에 있는 데다가 어디서든 보이게 신전의 표식을 높이 매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역시 여기에는 사람들이 좀 모여 있군.’

신전 근처로 가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다른 목소리들을 누르고, 사제가 외쳤다.

“다들 조용! 이건 신께서 노한 겁니다! 그냥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께서 자비를 베풀길 원하면 가진 건 모조리 신께 바쳐야 합니다!”

‘쯧, 이 난리 속에 불안해하는 신도들을 신의 이름으로 착취하다니…….’

카엘은 혀를 찼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동조하며 기도했다.

“다 바치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아이고, 이 지옥에서만 꺼내 주십시오!”

“신이시여! 모든 걸 내놓을 테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처절하게 울부짖는 게 모두 진심인 듯했다.

그만큼 불안한 거였다.

카엘이 슬쩍 위에서 살펴보니 하나같이 옷차림이 좋은 게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 같았다.

‘그래도 아직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은 안 보이는군.’

신전에서는 신의 축복이라며 신전의 물로 씻겨 주었다. 그게 성수는 아니지만 깨끗한 물이라 그것만으로도 제법 효과를 발휘한 거였다.

‘그래도 이렇게 모여 있다가는 언제 발병할지 모르지.’

한 명이라도 감염되면 단체로 줄초상을 치를 게 분명했다.

그 와중에 몇 명이 수군거리는 게 들렀다.

“그나저나 지금 신의 분노가 아니라, 황제의 분노를 더 걱정해야 할 상황 아니오?”

“하긴 제국의 기사가 여기 오자마자 전염병으로 죽어 버렸으니…….”

“엘프를 찾으러 왔다는데 어떻게든 엘프를 구해서 보내야 하지 않겠소.”

제국의 소드 마스터 파이슨이 왕국의 항구에까지 사람을 보낸 모양이었다.

‘끈질긴 녀석.’

그렇다는 건, 기사들이 전염병을 옮겼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이들은 내버려 두고, 치료제를 만들 만한 약재가 있는지부터 봐야겠네.’

이쿤에게 부탁했지만, 가져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신전을 나온 카엘은 병원이나 약재상을 찾기 위해 시장 구역으로 향했다.

가게들은 대부분 엉망이었다.

문은 부서지고, 물건들이 사방에 어지러이 흩어져 나뒹굴었다.

‘경비대장도 도망칠 정도니까 난장판 속에 다들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쓸어 갔나 보군.’

그나마 멀쩡한 몇몇 가게 안은 검을 든 용병들이 눈을 부라리며 지키고 있었다.

카엘은 옷 가게를 지키고 있는 용병에게 물었다.

“여기 치료소나 약재상은 없습니까? 분명 한두 개는 있을 텐데요.”

“저 왼쪽 골목 끝에 하나 있다. 거기 가 봐야 소용없을 거다. 의원은 진작에 죽었으니까.”

“음, 고맙습니다.”

카엘은 용병이 안내해 준 곳으로 향했다.

치료소 앞에 도착하니 다른 곳처럼 털려 있었는데, 심지어 시체까지 쌓여 있는 게 아닌가?

명색이 치료소니 여기다가 병자를 두고 가면 치료해 줄 거라고 기대한 거 같았다.

보는 대로 전혀 소용이 없었지만.

‘그나저나 정말 쓸 만한 건 거의 안 남았군.’

각종 약재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채 엉망으로 밟혀 있었다.

아마 잘 모르는 약이라도 전염병에 효과 있길 바라면서 훔쳐 간 모양이었다.

의원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지? 뭐야? 도둑이야? 아직 훔쳐 갈 게 남았나?”

돌아보니 머리가 하얀 늙은 경비병이 카엘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걸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경비병들은 다 도망갔다고 들었습니다만.”

“다 도망간 거나 마찬가지지. 보아하니 외지인 같은데, 전염병 옮기 전에 돌아가.”

“도망가 봐야 전염병이 대륙에 퍼지면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퍼지는 걸 막고 사람들을 치료해야죠.”

“설마 의원인가?”

“약제사입니다.”

“어쨌든 사람들 고칠 생각이 있으면, 저쪽 광장에 병자들이 많으니 좀 봐 주게. 난 이것부터 처리해야 하거든.”

늙은 경비병은 그렇게 말하면서 시체를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보다 시체가 없다 했더니, 처리하는 사람이 있어서였군.’

다행이었다. 시체가 썩도록 방치하면 새로운 병균이 자라날 테니까.

“시체를 만질 거면 저처럼 얼굴을 깨끗이 닦고 코와 입을 가리십시오.”

“그러면 안 걸리나?”

“덜 걸립니다. 이미 감염됐을 수도 있겠지만요. 조금이라도 아프시면 찾아오세요. 일할 사람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니까.”

“…그러지. 확실히 약제사는 맞는 거 같군.”

늙은 경비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체를 잔뜩 쌓아 둔 수레를 끌고 사라졌다.

노인인데도 어지간한 장정보다 힘이 세 보였다.

‘여기서 가져갈 만한 게…….’

카엘은 치료소를 뒤져 물품을 최대한 챙겼다.

그러고 나오는데, 아까 경비병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약제사라…….”

제국의 기사가 이곳에 엘프를 찾아온 만큼, 제국에 있어야 할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숨기려고 둘러댄 거였지만.

타인에게 약제사라고 불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카엘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스승에게 약제술을 열심히 익힌 덕분이었으니까.

“그럼,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해 볼까?”

카엘은 경비병이 알려준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병자들이 가득한 그곳에서부터 지옥이나 다름없던 항구도시를 구원해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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