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드래곤 하트 (2)
방주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호병이 물었다.
-혹시 일행 중 못 탄 인간이 있나?
“없는데? 우리 일행에 인간은 나뿐인데. 왜?”
-방주를 향해 접근하던 인간이 하나 있다. 아주 강한 인간이었다.
수호병이 아주 강하다고 강조할 만한 인간은 한 명뿐이었다.
‘소드 마스터라도 쫓아왔나 보군.’
지체 않고 출발한 게 다행이었다.
‘아니면 이 녀석이랑 대결하게 시키면…….’
카엘은 수호병을 보며 잠깐 고민했지만, 바로 포기했다.
방주 안에서 엘프들을 데리고 싸우기도 힘들뿐더러, 이 수호병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없었다.
“상관없으니까. 어서 가자.”
-알았다.
그러고 엘프들의 상태를 보고 오니까, 브로칸이 투덜댔다.
“음, 재미없네요.”
“그러네.”
카엘도 공감했다.
방주는 잠수 때문이라곤 해도 창문 하나 없는 구조, 바닷속 풍경은커녕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답답했다.
“우어엉. 으음. 으음…….”
이쿤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전처럼 카엘에게 얻어맞은 탓에 똑바로 말하기 어려운 거였다.
대신 애처로운 눈으로 카엘을 바라봤다.
“약 남은 거 없으니까 참아.”
“…….”
카엘의 말에 이쿤이 실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수호병이 말했다.
-제피슈 님의 위대한 유산, 심해성에 온 걸 환영한다.
동시에 배 입구의 문이 열렸다.
어느새 심해성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빠르네.’
밖을 보니 정말로 성안처럼 탑이며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 모습이 산호초와 조개 등을 형상화한 게 제법 바닷속 같은 분위기가 났다.
밖으로 뛰쳐나온 브로칸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 바닷속일 텐데 숨이 쉬어지네요? 바닷속이 아닌가?”
“바닷속 맞아. 해룡 제피슈가 이 성안에 마법을 걸어 둬서 그래.”
“우와! 대단하네요.”
-그렇다. 제피슈 님은 대단하지.
그때 심해성 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끼어들어 맞장구를 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방주 안 수호병과 똑같이 뼈로 된 갑주와 창을 든 수호병이 서 있었다.
‘이곳 담당인가 보네.’
“아, 으으음. 으음.”
이쿤이 나서서 말하는 걸, 새로 나타난 수호병이 제지했다.
“됐다. 이미 전달받았다. 메르 8세께 안내하겠다.”
수호병끼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된다더니, 벌써 방주의 수호병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듯했다.
카엘은 노아나와 브로칸에게 말했다.
“나는 바로 메르 8세한테 가겠다. 둘은 엘프들을 데리고 쉬고 있도록. 이쿤이 쉴 곳을 안내해 줄 거야. 안 그래?”
카엘의 말에 이쿤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하들에게 손짓·발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카엘이 밖으로 나가려 하니 방주의 수호병이 말했다.
-잘 가게. 제피슈의 후예를 부탁한다.
덩그러니 서 있는 건 방주 밖으로 못 나와서였다.
“걱정하지 마라.”
카엘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방주 밖으로 나갔다.
* * *
카엘이 수호병의 뒤를 따라가자 수많은 어인족이 카엘을 보고 놀랐다.
그만큼 이곳에 어인족 외의 존재가 온 게 드문 일이었던 탓이다.
수호병이 함께 있는 걸 보고 금방 관심을 거뒀지만.
한참을 걸어가자, 저 멀리서도 보였던 거대한 산호 모양의 성에 도달했다.
가까이서 보니 성은 왕성보다도 몇 배는 커 보였다.
그 거대한 문 앞에는 수호병 둘이 지키고 있다가 카엘이 다가오는 걸 보고 군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또 수호병? 수호병이 얼마나 있는 거지?’
카엘이 놀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성 내부도 큼직큼직했는데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접견실에서 마주한 메르 8세가 보통 성인 남성보다 2배 이상 큰, 거구였다.
-심해성의 지배자께 예를 갖춰라.
수호병의 말에 카엘은 별 불만 없이 몸을 숙였다.
“카엘 브리운이 심해성의 지배자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해룡 제피슈 님의 후예를 뵙습니다.”
“…흠.”
메르 8세는 옥좌에 앉아 카엘을 노려보다가 물었다.
“너무 멀쩡한데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혼쭐을 내고 끌고 오라고 했던 거 같은데.”
-병을 고친다 하여 제가 데려왔습니다.
수호병이 대답했다.
이 보고에 이쿤도 안도했으리라, 카엘에게 맞고 모셔왔다고 사실대로 보고했으면 처형당했을 수도 있었다.
“돌팔이가 아니었나? 엉터리 약을 보낸 주제에 도와 달라 신호를 보내는 걸 보고는 참 겁도 없는 인간이다 싶었는데.”
“그때 드린 약은 임시방편일 뿐이었거든요.”
“뭣이?! 이 하찮은 인간이 나를 능멸했던 것이냐!”
메르 8세가 노성을 터트리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며 카엘을 짓눌렀다.
‘이게 반인반용의 힘인가? 소드 마스터와는 비교도 안 되는군.’
카엘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버텼다.
점점 거세지는 압력에도 멀쩡하게 서 있자, 메르 8세는 분노하기 이전에 살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오러를 쓰는 거 같지도 않은데 내 힘을 버텨 내다니, 보통 인간이 아니군.’
메르 8세의 기운이 느슨해진 걸 눈치챈, 카엘이 입을 열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분명 제 계산으로는 아직 약효가 남았을 텐데요.”
앞으로 최소로 해도 일주일, 최대 한 달까지는 더 약효가 가도록 계산했다.
그 탓에 약속을 안 지켰을 때, 최대 한 달은 더 기다리는 걸 각오했던 참이었다.
“헛소리! 약 먹고 한 달 만에 다시 심장이 나빠졌다.”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저를 도와준다는 약속을 지켰으면 지나가는 길에 들러 추가 처방을 할 예정이었거든요.”
“…정말?”
카엘이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메르 8세가 수호병을 돌아봤다.
수호병의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 보는 능력으로 확인받으려고 한 거였다.
-진실입니다.
“끙!”
수호병이 공증까지 해 주자 메르 8세는 더 추궁하는 걸 포기했다.
그러나 카엘은 이제 시작이었다.
“혹시 몸 좀 괜찮아졌다고 무리한 건 아니시죠?”
뜨끔!
“주의하라 전달했던 음식을 마구잡이로 드셨다던가?”
뜨끔!
“절대로 피하라 했던 술을 마시진 않으셨겠지요?”
뜨끔!
메르 8세는 카엘이 말할 때마다 찔리는지 움찔했다.
카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인가 보군요…….”
“…….”
뭐라고 변명하려 했다가도 수호병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수호병이 듣고 거짓말이라고 말하면 이만저만 망신이 아니었던 거였다.
“…누구도 이 심해성의 왕에게 명령하지 못한다.”
“명령이 아니죠. 그저 환자를 위한 충고입니다.”
-진실입니다.
“그것까지 말 안 해 줘도 된다!”
괜히 수호병에게 투덜거린 메르 8세가 주눅이 든 얼굴로 카엘에게 물었다.
“그래서 난 이제 글렀나? 선대들처럼 심장병으로 요절하게 될 운명인가?”
“아뇨. 충분히 나으실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인가?!”
이번에는 확신을 얻고 싶었던 메르 8세가 수호병을 쳐다봤다.
-진실입니다.
“그럼 어서 약을 다오.”
“바로 드릴 수는 없죠. 저와 제 일행이 무사히 브레프니 왕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진실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이 나를 두고 흥정을 하다니! 차라리 널 죽이고 뺏겠다!”
다시 기세를 올리며 압박하려는 메르 8세에게 카엘이 대꾸했다.
“뺏으신다고 해도, 아직 안 만들었는데요?”
“…….”
메르 8세가 어이없어하며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 모습에 수호병이 반응했다.
-풋.
“…끙.”
덕분에 얼굴이 벌게진 메르 8세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포기했다.
“알았다, 알았어.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하겠다. 내 이름을 걸고.”
-진실이십니다.
“됐지?”
수호병에게 확인받은 메르 8세가 자신 있게 말했지만, 카엘은 그마저도 받지 않았다.
“진실이 바뀔 수도 있는 거라서요. 대신 방주에서 내리자마자 드리겠습니다.”
-진실입니다.
“그럼, 그러든가.”
메르 8세는 이제 다 귀찮은지 손을 내저었다.
‘좋아.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네. 그럼 이제 드래곤 하트를 빌려 달라고 해야겠다.’
심해성까지 굳이 온 건, 단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니었다.
가능하면 드래곤 하트를 빌려 실험하고 약을 만들 생각이었다.
카엘은 옥좌에 몸을 기대며 지친 기색으로 누워 있는 메르 8세에게 말했다.
“전하, 실은 약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그때였다.
쿠쿵!
굉음과 함께 갑자기 심해성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땅이 쩍 하고 갈라질 정도로 강력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지?’
카엘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메르 8세가 벌떡 일어나서 이를 갈았다.
“이것들이, 코그 이 자식이 또 쳐들어오다니! 어서 쫓아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장한 어인족들이 대답하고 우르르 나갔다.
카엘은 이 와중에도 가만히 서 있는 수호병을 슬쩍 봤다.
‘코그가 쳐들어왔다고?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는군. 저 녀석이 안 움직일 만하지.’
카엘은 회귀 전에 스승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 심해성의 주인은 메르 8세지만, 제피슈의 피를 이어받은 방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 이름은 코그.
메르 8세와 마찬가지로 반인반용으로 호시탐탐 심해성의 왕좌를 노렸다.
일신의 강함으로는 메르 8세가 압도적이었지만,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전력을 다하기는 힘들었다.
수호병들이 힘을 합치면 제압할 수 있겠지만, 수호병들은 제피슈의 방계도 엄연히 후손이라며 나서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심해성을 공략할 수 없는 건 코그도 마찬가지지만.’
덕분에 수십 년 넘게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중, 코그가 한 마법사를 만나고 변화가 생겼다.
그 마법사가 코그가 드래곤 하트를 먹으면 선조의 힘을 이어받아 강해 진다고 한 거였다.
안 그래도 선조들의 드래곤 하트는 비교적 온전한 채로 왕릉에 모셔져 있었는데, 대부분 왕이 단명한 탓이다.
마법사의 말에 눈이 뒤집힌 코그는 수시로 심해성을 공격해 왕릉을 노렸다.
‘결국, 성공해서 메르 8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지.’
그때 너무 무리해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해 스승까지 찾아왔던 거였다.
‘근데 공격해 온 게 이쯤이었다니, 적절한 시기에 왔는데?’
원래라면 치료에 필요하다며 드래곤 하트를 잠깐 빌려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걸 해결해 주면 아예 하나 얻을 수도 있겠는데?’
카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때, 카엘이 남아 있는 걸 본 메르 8세가 말했다.
“그대들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일단 물러가라. 저 불한당들이 돌아가면 그대들을 육지로 돌려보내 주겠다.”
“쉬이 끝날 거 같지 않습니다만. 방주도 못 움직일 거 같은데요?”
“끄응…….”
그 말에 메르 8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카엘의 말대로 코그가 한번 공세를 시작하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1년 가까이 걸리긴 했다.
지금처럼 심해성이 직접적인 공격에 영향을 받는 건 방어 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초반에 한해서지만, 방주가 오가긴 힘들었다.
“그럼 지금 약을 만들어 주든가. 내가 건재하기만 해도 코그 녀석이 감히 이곳을 공격하지도 못할 테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렇지? 그 후에는 약속대로 무사히 육지로 보내 주지.”
카엘은 수호병을 돌아봤다.
-제피슈의 후예께서 거짓 약속을 하시면 제피슈의 명예가 더럽혀집니다.
‘이 와중에도 속여 먹을 생각을 하다니.’
스승이 이를 갈던 것처럼 정말 믿을 만한 자가 못 됐다.
메르 8세가 억울하다는 듯 수호병에게 항변했다.
“아니, 저자를 억류해서 후예들에게 약을 만들게 하는 게 더 제피슈를 위한 게 아닌가?!”
-아닙니다.
“…….”
수호병이 단호하게 부정하자 메르 8세는 할 말을 잃었다.
“…….”
수호병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왕족이 단명한다고 해도 수백 년은 족히 사는 데다가 후손이 끊길 위험도 없었다.
반면에 메르 8세가 그런 말을 듣고도 수호병에게 뭐라고 못 하는 건, 그게 제피슈의 성향과 논리대로 반응한 걸 잘 알아서였다.
‘제피슈의 이빨과 마력으로 만들어진 존재라서 그렇다고 했지.’
그때 메르 8세가 역정을 내며 카엘에게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그대에게 무슨 방도라도 있나?”
“물론, 있습니다.”
“어, 정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되묻는 메르 8세를 향해 카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