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엘프 구출 (1)
“여기는 황제 폐하의 땅이니 물러가라!”
“들었지? 어서 꺼져.”
소드 엑스퍼트 둘이 카엘과 브로칸을 보며 경고했다.
브로칸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카엘 님, 어떡합니까?”
일전에 브로칸이 엘프 자매들과 이곳에 정면으로 왔을 때 소드 마스터 파이슨에게 들켜서 혼쭐이 났다.
그 때문에 드워프들이 감금되어 있는 산맥 뒤편으로 넘어온 건데 들킨 거였다.
“이 근처에 감지 마법이라도 깔려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정면으로 들어갈 걸 그랬네.”
“마지막 경고다. 어서 발걸음을 돌려라!”
“뭐 해? 안 돌아가고. 뒈질래?”
카엘은 둘을 무시하고는 아조트에게 슬쩍 물었다.
“어느 쪽이 약해?”
-말 짧은 쪽.
“들었지? 브로칸, 저 녀석 상대할 수 있겠어?”
“네. 해 보겠습니다!”
브로칸은 힘차게 대답했다.
소드 엑스퍼트와 1대1로 붙는데도 전혀 주눅 든 모습이 아니었다.
“좋아. 못 이겨도 되니까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아 둬! 내가 먼저 주의를 끌게.”
“네!”
카엘은 브로칸의 대답을 듣자마자 둘을 향해 뛰었다.
“엇!”
“보통 녀석이 아니다.”
“조심해!”
엄청난 각력으로 먼 거리를 단번에 날아오르듯이 뛰는 걸 본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검을 뽑았다.
카엘은 말이 긴 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화륵!
펑!
그가 화염 오러를 끌어올려 카엘의 공격을 막자 굉음이 터져 나왔다.
“헤프너!”
“덴! 내 걱정할 때가 아니야.”
헤프너의 말처럼 브로칸이 빠르게 덴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본모습을 드러내며 네발로 빠르게 달리자 덴이 깜짝 놀랐다.
“라이칸스로프?! 설마 저번에 침입했다던 녀석인가?”
“크엉!”
브로칸은 대답 대신 소리치며 뛰어올랐다.
화염 오러에 당하면 매우 아프다는 걸 이미 경험했기에 상대가 오러를 발현하기 전에 몰아치려는 거였다.
“큭.”
캉!
그 노림수는 제대로 먹혀 덴은 오러를 끌어올리지 못한 채, 간신히 브로칸의 발톱을 막았다.
‘됐어!’
상대를 압박하는 데 성공한 브로칸은 지면을 박차고 검을 쥔 덴의 오른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젠장.”
덴은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브로칸은 오히려 달려들어 얼굴을 할퀴려고 했다.
“이런 개새끼가!”
덴이 욕하면서도 얼굴을 막으려는 순간.
브로칸은 방향을 틀어 덴의 옆구리에 발톱을 박았다.
그러나.
팅!
발톱은 그대로 튕겨 나왔다.
‘윽.’
브로칸은 당혹스러웠지만, 망설이지 않고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흐흐. 스승님께 받은 마법 갑옷이다. 네 발톱 따위는 안 먹힐걸.”
“…….”
그 말에 브로칸은 인상을 쓰며 덴을 살폈다.
옷차림을 보니, 저 마법 갑옷이라는 것도 몸통만 있는 듯 보였다.
‘욕심부리지 않고 팔다리를 노릴걸.’
화르륵.
“다시 덤벼! 제대로 싸워 보자고!”
이번에는 제대로 화염 오러를 일으킨 덴이 자신 있게 소리쳤다.
“그래, 다시 해 보자고!”
브로칸은 대지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금방과 달리 기세를 가다듬은 덴에게는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히힛.”
분명 검의 사각을 노려서 공격한다고 생각했는데, 덴이 자세를 조금 바꾸자마자 방향을 튼 검이 브로칸을 노렸다.
“큭!”
브로칸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몸을 틀어 간신히 피했다.
“흐흐, 넌 이제 끝이다!”
한번 우세를 점한 덴은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금세 브로칸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쌓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이이.
심지어 오러에 닿은 털과 살이 타올랐다. 전처럼 한번 탄 살은 전처럼 회복되지도 않았다.
‘까다로운 기술이야.’
브로칸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치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에 애먹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동안 체력과 회복력에 너무 의지했어. 이래서야 어떻게 앞으로도 카엘 님에게 도움이 되겠어?’
분한 마음과 별개로 지금 당장은 눈앞의 적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적의 갑옷에, 오러로 강화한 신체를 고려하면 무슨 수를 써도 피해 입히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마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는 듯한 카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이길 필요 없으니 도망 못 치게 잡아만 둬!”
‘도망 못 치게 잡아 두는 게 아니라, 내가 죽을 판인데… 앗!’
속으로 걱정하던 와중에 한 가지 방법이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그래. 안 이겨도 되면 굳이 무리해서 상처 입힐 필요가 없잖아.’
“도망 못 치게 잡아 두라니! 나를 물로 보는 거냐?!”
브로칸은 화를 내며 다시 덤벼드는 덴의 검을 피하며 아래로 파고들었다.
덴은 그 정도쯤은 예상했다는 듯 브로칸을 걷어차려 했다.
“바보! 내가 검만 쓸 것 같아?”
“큭!”
브로칸은 덴의 발차기를 붙들어 버티고는 반대편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윽!”
털썩.
균형을 잃은 덴이 그대로 쓰러졌지만, 브로칸은 계속 덤비는 대신 뒤로 물러섰다.
덴이 넘어지면서도 검을 크게 휘둘러 반격한 걸, 브로칸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위험을 느끼고 피한 거였다.
“이 개자식이…….”
얼른 몸을 일으킨 덴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이없이 넘어진 데 매우 모욕을 느껴서였다.
그러면서 온 힘을 다해 끌어올린 기운이 얼마나 강력한지 브로칸이 순간 움찔할 정도였다.
“이 개새끼가, 반드시 죽여 버린다.”
“불가능해 보이는데?”
“헛?”
목소리를 깔며 위협하던 덴은 뒤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날아간 건 덴의 머리였다.
털썩.
목을 잃고 쓰러진 덴의 시체 뒤로 카엘이 나타났다.
“카엘 님?”
브로칸은 카엘이 상대했던 소드 엑스퍼트 헤프너를 봤다.
별다른 상처도 없이 덴처럼 목이 날아가 있었다.
단번에 해치운 것처럼.
“설마…….”
“맞아. 이 녀석을 바로 해치우고 어떻게 싸우는지 지켜봤어. 잘 싸우던데? 자기보다 강한 사람과 싸워 버티는 게 쉽지 않은데.”
“가, 감사합니다.”
브로칸은 카엘의 칭찬에 감격했다.
카엘은 그런 브로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잘 싸우는데, 브로칸을 강화할 만한 약을 좀 만들어 봐야겠어.’
안 그래도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거기다가 무장도 좀 갖춰 줘야겠고.’
“참, 저 사람 마법 갑옷을 입고 있다고 했어요. 스승에게 빌렸다는데요.”
“파이슨의 갑옷이라… 가져가자. 엘프들이 쓰게 검도 챙기고.”
“네!”
브로칸은 기다렸다는 듯이 덴에게서 갑옷을 벗겨서 카엘에게 가져왔다.
살펴보니 나름 마력이 잠재된 거 같았지만, 예전에 레오폴드가 입었던 것만은 못해 보였다.
“발톱이 전혀 안 들어가더라고요.”
“그래? 튼튼해 보이는 거 같긴…….”
콰직!
“…이거 부서졌는데?”
카엘이 힘을 주자 마법 갑옷이 구겨진 거였다.
“헉! 정말 엄청난 힘이세요!”
-힘도 세지만, 네 체내에 깃든 자연력 때문이기도 하지. 마법 방어력을 가져 어지간한 마법은 무력화할 정도거든.
아조트가 끼어들었다.
빙한목 열매의 효과로 마법 방어력을 얻다니, 기억해 둘 만한 이야기였다.
‘다른 자연력이 강한 약재를 더 확보해 두는 게 좋겠군.’
그걸 위해서라도 엘프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건 가져가서 고쳐서 써야겠다. 일단 엘프 자매들부터 찾자.”
“안 그래도 저쪽에서 냄새가 납니다.”
“가 보자.”
카엘은 브로칸의 뒤를 따라 숲속으로 한참 들어갔다.
그러자 파이슨이 거주하는 듯 보이는 오두막이 나왔다.
조용히 다가가 보니 내부에 검을 찬 사내가 둘 있었다.
카엘과 브로칸은 동시에 들이닥쳐 하나씩 해치웠다.
“너무 약한데요? 파이슨의 제자가 아닌가?”
“심부름하는 병사일 거야.”
“아! 그렇군요. 어, 이건 뭔가요?”
병사의 앞에 놓인 상자에 고운 천에 싸인 커다란 수정 구슬이 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거로 봐서는 이거로 침입자를 감지하나 보군.”
카엘은 만약을 위해 수정 구슬을 깨부수고는 브로칸에게 물었다.
“엘프 자매들의 흔적은?”
“냄새가 이 안에서 뚝 끊겼어요.”
“다시 지하로 데려다 놨나 보군.”
엘프들은 드워프가 만든 거 같은 지하 동굴 속에 갇혀 있다고 했다.
엘프 자매들도 외부로 나올 때는 눈을 가려 통로의 위치도 몰랐는데, 이후 은밀히 정보를 수집해 산맥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했다.
그래도 지하인 걸 알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는지 찾자.”
“네!”
드워프 지하 왕국 스탄눔으로 갈 때도 오두막에 통로가 있었다.
예상대로 브로칸이 금방 바닥에 있는 통로 입구를 발견했다.
“여기 있습니다. 근데 잠겨 있네요.”
“비켜 봐.”
콰직!
카엘은 힘으로 자물쇠를 부숴서 열었다.
통로 내부는 드워프 쪽 동굴에 들어갔을 때처럼 어두웠다.
“아조트.”
-알았어.
아조트를 검집에서 뽑으며 부르자 곧바로 빛을 발했다.
“아무도 안 지키나 본데요?”
“밖으로 나가는 길이 저것밖에 없으니까 입구만 지킨 거 같아.”
귀한 엘프를 지키는 병력치고는 너무 적지만, 원래라면 소드 마스터가 지키고 있으니 숫자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소드 마스터가 자리를 비운다고 소드 엑스퍼트를 둘이나 배치해 두기도 했고. 드워프 쪽에도 기사와 소드 엑스퍼트가 한둘은 있겠지.’
거긴 드워프들을 가둬 두는 게 아니라, 공방을 운영 중이기에 관리하는 데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통로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통로 좌측에 쇠창살로 되어 있는 빈 감옥이 나왔다.
감옥은 사람 하나가 누울 만큼 매우 좁았다.
“…여기에 가둬 뒀나 보군요.”
“그런 거 같군.”
조금 옆에 있는 감옥에는 해골만 남아 있었다.
“시체를 그냥 방치하다니…….”
브로칸은 화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빈 감옥이나, 해골만 남은 감옥을 수십 개 지난 뒤에야 살아 있는 엘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엘프는 엉망으로 다쳐 감옥 안에 쓰러져 있었다.
“모르타?”
가까이 가서 보니 엘프 자매 중 막내인 모르타였다.
“카엘 님.”
“기다려 봐.”
카엘은 감옥 문을 억지로 잡아 뜯어 열었다.
그러고 모르타를 살펴보니 의식이 없었다.
전신이 그을린 듯한 상처도 상처지만, 양쪽 귀는 또 잘려 나간 듯, 귀 대신 피가 까맣게 굳어 있었다.
그걸 본 브로칸이 눈물을 흘렸다.
“크윽. 이렇게 잔인할 수가…….”
“진정해. 일단 치료부터 하자.”
“네…….”
카엘은 회복 포션을 모르타의 입에 흘려 넣었다.
“으음.”
모르타는 이내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쓰더니 커억 하며 검은 피를 토했다.
“모, 모르타. 정신이 들어?”
브로칸이 애타게 물었지만,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군. 일단 밖으로 데려가서 편히 눕혀. 나는 다른 엘프들이 더 있는지 보고 구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눈물을 훔치며 대답한 브로칸은 모르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밖으로 향했다.
그사이 카엘은 다른 감옥을 탐색하고는 혀를 찼다.
대부분 죽어 있었고, 살아 있어도 엘프가 비쩍 말라 의식불명인 상태였다.
아마 식량은커녕 마실 물도 제대로 주지 않고 방치한 거였다.
최근에 감금당한 모르타를 비롯한 엘프 자매들이 그나마 상태가 나은 편이었다.
‘어쩐지 감옥 안이 조용하더라.’
음유시인의 이야기 속의 엘프는 이슬만 먹고 산다고 나온다.
그 말대로 엘프는 아주 적은 식량 섭취만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스스로 가사 상태에 빠져들어서 버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냥 방치해 버리다니.’
엘프 자매들이 지나가는 말로 거기서 자신들은 살아도 산 게 아니라고 했는데,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던 거였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구해야지.’
카엘은 진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엘프들을 확인하고 감옥에서 꺼내 오두막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렇게 구한 엘프들은 엘프 자매를 빼고 모두 31명이었다.
다 합쳐서 사오십여 명 남짓 된다고 들었는데, 엘프 자매들이 떠난 사이 많이도 죽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말려 죽이다니, 잔인한 놈들.’
카엘은 상처 입은 노아나와 데키마에게 먼저 회복 포션을 먹인 뒤, 나머지 넷에게는 남은 회복 포션을 한 모금씩 나눠 마시게 했다.
그러고 얼마 안 지나 노아나가 정신 차렸다.
“…으, 카엘 님?”
“아직 힘들 테니까, 일어나지 마.”
“구하러 와 주셨군요. 믿고 있었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았어.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흐흑.”
평소 심지가 굳은 노아나였지만 그간의 일을 떠올리니 복받쳐 오르는지 카엘의 가슴에 안겨 오열하기 시작했다.
카엘은 잠자코 노아나를 토닥여 줬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 보이는 데키마도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는 게 보였다.
‘다들 얼마나 고생했으면…….’
구하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