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황위 계승 내전 (2)
카엘은 레오폴드와 함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토라타만평야로 향했다.
“왕국으로 돌아갈 준비는 잘 되고 계십니까?”
“어, 문제없어. 제라드 황자가 국경까지 안내할 기사와 병사까지 내주겠다지 뭔가. 자네가 만들어 준 약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거지.”
제라드 황자가 어머니께 드릴 피부 미용 약을 부탁하길래 만들어 줬다.
이후 어머니의 주름이 펴져서 매우 기뻐하신다고, 제라드가 직접 와서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다.
‘말만으로 끝내지 않는 거로 봐서는 확실히 탈프보단 낫단 말이지.’
“이렇게 된 이상, 자네가 어렵게 영입한 파나틱 신전 기사단은 필요 없었겠어.”
아무래도 신전 기사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다 보니 내심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파나틱 신전 기사단은 다른 신전 기사들과 달랐지만, 굳이 오해를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알게 되겠지.’
무엇보다 카엘은 제라드 황자의 기사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인 이상 언제 황금에 눈이 멀어 배신할지 몰랐다.
어지간해서는 그러지 않겠지만, 한탕 하고 다른 왕국으로 가 버리면 평생 떵떵거리고 살 정도니까.
‘그걸 대비하려면 파나틱 기사단이 지켜 주는 게 좋지.’
“어쨌든 왕국의 사절단도 페르세스에 도착했겠다 슬슬 왕국으로 돌아가려고 했거든.”
‘바로 돌아간다라…….’
카엘은 황제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으면 했지만, 정작 그 기회를 가진 레오폴드는 황제를 알현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참고로 왕국의 사절단은 레오폴드가 돌아간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매우 안도했다.
망나니 왕자를 황제 앞에 내놓았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걱정하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프 황자군과 키슬링 황자군이 격돌했다지 뭐야. 탈프 황자군이라기에는 병력 대부분이 헤이든 공작이 데려온 거지만.”
“헤이든 공작이 병력을 이끌고 오자마자 선전포고를 해 버렸나 보군요.”
“맞아. 그 소식을 듣고 어찌나 아찔하던지. 제라드 황자도 아직 한창 준비 중인데 말이지.”
정말 터무니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바로 패했나 보네요.”
“심지어 탈프 황자가 선두에 섰다가 쓰러져 후방으로 옮겼다네.”
“탈프 황자가요? 누구랑 싸웠습니까?”
“싸우기라도 했으면 괜찮을 텐데, 돌격하다가 낙마해 버렸다더군.”
“그… 그렇군요.”
카엘도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하긴 몸만 좋아졌을 뿐, 그동안 검술이며 기마술이며 제대로 안 배웠을 테니, 실력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
“그나마 전면전이 아니라서 살았어.”
제국 내에서 벌어지는 내전에는 치밀한 전략 전술을 쓰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정면으로 맞붙어 어느 세력이 크고 강한지 겨루는 대결에 가까웠다.
먼저 거리를 두고 각각 진용을 갖춘 뒤, 대표로 나온 기사들이 먼저 결투를 벌인 다음.
양쪽 병력이 맞부딪쳐 백병전이 이뤄지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며칠 혹은 몇 달까지 반복해서 격돌하다가 밀려서 포기하는 쪽이 패배하는 거였다.
“오, 마침 전투 중인가 보군.”
레오폴드의 말대로 정말로 두 부대가 토라타만평야 중앙에 대치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미 한창 기사끼리 결투 중이었다.
‘오러를 쓰는 거로 봐서는 소드 엑스퍼트네.’
반면에 탈프 황자군에서 나온 기사는 평범했는데, 얼마 안 되어 가슴을 찔려 말에서 떨어졌다.
곧바로 다른 기사가 나왔으나 바로 팔에 칼을 맞고 항복했다.
그 후로 탈프 황자군에서 더 나오는 기사가 없자, 키슬링 황자군에서 야유를 보냈다.
그러자 탈프 황자군이 진격하고 따라서 키슬링 황자군도 진격하더니 격돌했다.
치열한 백병전은 잠시, 탈프 황자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탈프 황자군이 한참 뒤에 펼쳐 놓은 자신의 진영까지 후퇴하자, 키슬링 황자군도 공격을 멈추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저걸로 오늘 전투는 끝이겠군.”
“마치 훈련 같군요.”
“어마어마한 소모전이기도 하지.”
레오폴드가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 피해가 계속해서 누적된다.
추후 제국과 싸울 생각이 잔뜩 있는 레오폴드 입장에서는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가지.”
카엘은 레오폴드의 뒤를 따라 탈프 황자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대책 회의 중인지 지휘관 막사가 붐볐다.
안으로 슬쩍 들어가서 보니 연달아 패배한 탓에 분위기가 무거웠다.
탈프 황자도 둘이 온 걸 보고도 아는 체 않는 걸 보니, 아주 저기압인 듯했다.
“오늘도 도리스 경이 나오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소드 엑스퍼트를 어떻게 상대하라고.”
헤이든 공작의 가신이 투덜댔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병력의 숫자와 사기가 전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기세를 올리려면 기사들의 결투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런데 내전에 참여가 금지된 소드 마스터를 제외하고, 검술이 가장 뛰어난 소드 엑스퍼트를 적이 데리고 나오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저희도 어떻게 소드 엑스퍼트를 모셔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 쉽게 구해지면 진작 데려왔지.”
헤이든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소드 엑스퍼트가 흔하진 않았다.
있다고 해도 이미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소드 마스터를 목표로 수련하기 바빴다.
소드 마스터들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제자를 육성하기를 꺼렸다.
‘아무나 키운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키슬링을 비롯해 여럿 소드 엑스퍼트를 육성한 파이슨이 특이한 경우였다.
‘야심 있는 키슬링이 힘을 쓴 거였지만.’
“도리스 경도 소드 엑스퍼트라 하나 며칠 동안 전면에 나서느라 지쳤을 테니, 이제 한동안 쉬지 않겠습니까?”
“바보냐! 안 쉬고 또 나오면 어떡하려고?”
탈프가 헤이든의 가신에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가신들의 얼굴이 모두 구겨졌다.
“…….”
싸운다고 나섰다가 낙마한 주제에 저러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입니다.”
카엘이 신호를 주자, 레오폴드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면서 카엘을 가리켰다.
“탈프 전하, 이 친구를 한번 써 보시지요.”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카엘에게로 몰렸다.
연이은 패배에 모두 소드 엑스퍼트를 두려워하던 차에 상대하겠다는 용자가 나타난 거였다.
“오! 소드 엑스퍼트를 상대하겠다니 용감하군!”
“음?! 근데 못 보던 얼굴인데.”
“차림새가 기사는 아니고, 용병인가?”
제일 놀란 건 탈프 황자였다.
“…카엘? 그대는 의원 아닌가?”
그 말에 난리가 났다.
“뭐야?! 기사가 아니었어?”
“허. 우리를 모욕하는 거 아닌가.”
“당장 끌어내 목을 쳐라!”
한 가신이 소리치자 근처에 있던 기사가 카엘에게 덤볐다.
탈프 황자나 레오폴드가 막을 틈도 없었다.
막을 필요도 없었지만.
카엘은 자신을 잡으려는 기사의 손을 뿌리치고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헉!”
“힘이 어마어마하군.”
다들 놀라는 와중에 잠자코 있던 헤이든 공작이 나섰다.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군, 하지만 소드 엑스퍼트 앞에서 힘자랑은 의미가 없다.”
가신들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지. 힘이 세다고 해도 오러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적어도 마법 검이라도 있지 않으면.”
그 말에 레오폴드가 소리쳤다.
“제 검을 줬습니다! 오러를 충분히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헤이든 공작이 내키지 않은 듯 보이자 탈프 황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거참, 답답하게! 내보냅시다. 저 레오폴드가 그토록 자신하는데, 아니면 누가 나설 거요?”
“…그렇다면야 한번 보내 보죠.”
면박을 당한 헤이든 공작이 화를 꾹 참으며 허락했다.
그에 분노한 가신 하나가 탈프 황자에게는 말 못 하고, 카엘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패배하면 돌아올 생각 하지 마라. 그 책임을 물어 죽여 줄 테니까.”
“제가 이기면요?”
“크하핫! 내가 네 개가 되겠다.”
그때 탈프 황자가 나서서 말했다.
“재미있군. 다들 들었지?”
* * *
다음 날 오전.
탈프 황자군이 움직이는 걸 보고, 키슬링 황자군도 전투 준비를 개시했다.
“오늘도 또 싸울 작정인가? 어차피 질 거 빨리 포기하고 항복하지.”
“괜찮아. 계속 싸워야 우리도 전공을 세울 기회를 얻을 거 아닌가.”
“하핫! 그건 그렇군. 말 나온 김에 오늘은 도리스 경이 우리에게 결투를 양보해 줬으면 좋겠는데.”
키슬링 황자군의 기사들은 여유를 부리며 우스갯소리를 나눴다.
그때 탈프 황자군 진용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게 아닌가?
근데 투박한 가죽 갑옷에다가 가문의 깃발을 든 종자도 없이 혼자 나왔다.
“설마 방랑 기사를 내보낸 건가?”
“방랑 기사는 무슨, 대신 죽어 줄 용병이라도 고용한 거겠지.”
“허, 저런 걸 결투하는 데 내놓다니, 나머지는 다 겁먹은 건가?”
그 말에 기사들이 한바탕 웃었다.
한편 도리스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탈프 황자군의 대표를 바라봤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하지만, 어중이떠중이를 내보내다니.
그 가볍고 신중하지 못한 결정에 화가 난 거였다.
‘그 망나니가 내린 결정이겠지. 헤이든 공작이 관록이 있다곤 하나, 그 망나니랑 손을 잡은 순간 끝이지.’
반면에 자신이 모시는 키슬링 황자는 예리한 검처럼 냉철하면서도 피를 볼 때는 확실히 볼 줄 알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고 선봉을 맡긴 이상, 그 기대에 부응해 철저히 상대를 부숴 놓을 생각이었다.
그때 휘하의 기사 중 워릭이 도리스에게 간청했다.
“도리스 경, 제가 키슬링 전하의 깃발을 가로막은 오만한 자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음.”
“요 며칠 계속 출진하시지 않았습니까? 다른 기사들에게도 기회를 주시죠.”
“좋다. 출진하도록.”
도리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기사까지 거들자 마지못해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힘차게 인사한 워릭은 바로 말을 준비해 달려 나갔다.
근데 정작 기사를 본 상대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게 아닌가?
“음? 도리스 경은?”
“흐흐, 네 상대로는 도리스 경이 나설 필요도 없다. 이 워릭의 상대로도 과분하다!”
“그래? 널 쓰러트리면 나오겠지. 덤벼.”
“이 무례한 녀석이!”
검지를 까닥거리는 걸 본 워릭이 발끈하며 돌격했다.
한편 워릭의 뒤에서도 상대를 비웃었다.
“어떻게 저런 무뢰한을 보내다니.”
“어쩌면 망나니 황자 쪽 인간인지도 모르겠네요.”
“본때를 보여 주라고!”
“쯧.”
그때 도리스가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차는 게 아닌가?
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중 하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워릭 경이 패배하시리라 보십니까?”
“아니, 다만 저렇게 흥분해서야 제대로 못 싸울 거 같아서 말이지.”
“아, 그렇군요.”
납득한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스 경은 항상 냉철하게 싸우는 거로 유명했다.
이번 전투만 해도 저 무심한 얼굴로 몇 명의 기사를 제압했던가.
‘그런 도리스 님 눈에는 성에 안 찰 만도 하지.’
그러는 사이 워릭이 상대에게 도달해 서로 격돌했다.
“엇!”
“왜 저래?”
“아이고.”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창을 앞세운 워릭의 돌격을 상대가 가볍게 피해 버린 거였다.
심지어 균형을 잃은 워릭은 그대로 나뒹굴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진 거였다.
그걸 본 기사들이 혀를 찼다.
“쯧쯧. 저렇게 허망하게 패배하다니.”
“실수한 거죠. 그래도 기사라는 자의 기마술이 저래서야.”
“도리스 경의 말대로 흥분해서 실수했나 보군요. 이번에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다른 기사가 결투에 나서겠다고 나오자 다들 금세 호응했다.
“오! 파트리온 경이라면 본때를 보여 줄 수 있을 겁니다.”
“방금의 승리는 요행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시오.”
“알았다. 반드시 승리하고 오도록.”
“네!”
도리스의 허락에 파트리온은 자신 있게 대답하며 말에 올라탔다.
“나는 파트리온 테그랄! 그대도 이름을 밝히고 결투에 응하라!”
“또 도리스가 아니잖아. 언제까지 피라미를 상대하게 할 거야?”
파트리온은 상대의 도발에 순간 발끈했지만, 워릭처럼 흥분해서 실수하는 걸 경계했기에 꾹 참고 검을 휘둘렀다.
“시정잡배라서 이름을 못 밝히는 모양이구나! 그저 내 검에 쓰러지는 걸 영광으로 알라!”
그랬더니 상대는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닌가?
‘훗, 쉽게 공을 세우게 되는군.’
…라고 파트리온이 생각한 순간.
툭!
파트리온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도 검을 쥔 채로.
상대가 순식간에 파고들며 파트리온의 손목을 벤 거였다.
“으아아아아아악!”
피가 치솟는 자신의 손목을 본 파트리온이 비명을 지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어서 데려가서 치료해라.”
상대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연달아 벌어진 승리에 탈프 황자의 진영에서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아아!”
“근데 저 기사가 누구지?”
“카엘 경이래. 카엘 경.”
“카엘! 카엘! 카엘!”
그들도 카엘이 키슬링군의 기사를 처음 쓰러트릴 때는 운인가 했지만, 이번에는 멋들어진 검술로 해치우는 걸 보고 열광했다.
카엘은 손을 들어 호응했지만, 관심은 이다음에 과연 소드 엑스퍼트인 도리스가 나오는가 하는 거였다.
‘이번에는 나오겠지?’
그사이 키슬링 황자군의 병사들이 우르르 나와서 파트리온을 데리고 돌아갔다. 떨어진 손도 주워서.
비싸긴 해도 치유의 기도로 붙일 수 있어서였다.
“으윽! 으아아악!”
“시끄럽다! 패배한 주제에 애처럼 울다니.”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르는 파트리온을 향해 도리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병사들은 얼른 파트리온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험악한 분위기에 기사들이 모두 긴장해서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거렸다.
“카엘이라.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대체 어디서 저런 기사가 튀어나온 거지.”
“난 얼핏 들어 본 거 같은… 아, 맞다! 전에 파프닐 경을 꺾은 레오폴드 왕자의 결투 대리인 이름이 카엘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네. 어쩐지 강하다고 했더니.”
저 멀리서 그 소란을 들은 카엘은 아뿔싸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파프닐을 꺾었다고 하면 바로 도리스가 나왔겠군.’
명예를 떠벌리고 전공을 자랑하는데, 익숙지 않아 깜빡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