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체중 감량 포션 (1)
“납치라니 그게 무슨 짓이냐?! 아이고, 큰일 났구나! 헤이든 공작이 얼마나 딸을 애지중지하는데.”
오해한 브리짓은 자식의 결혼 소식에 축하하기는커녕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 벌벌 떨었다.
그럴 만도 한 게 헤이든 공작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유력자, 단독으로 주변 왕국을 침공할 정도의 군사력도 보유했다.
별다른 세력도 없는 탈프가 잘못 망나니짓을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아들인 제라드는 자신이 어떻게 말렸지만, 헤이든은 그럴 수도 없으니 정말 큰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평판까지 나빠질지도 몰랐다.
‘그러면 폐하께서도 나를 절대로 안 보려 할 거야.’
“어머니, 아닙니다. 납치라니요! 헤이든 공작도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아멜리아도 저와 결혼한다는 소리에 기뻐하고요.”
“…정말이냐?”
“네! 이렇게 손수건도 받았는걸요.”
탈프는 아멜리아가 정표로 준 손수건을 자랑스레 내보였다.
동방에서 온 고운 비단에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져 있는 게, 귀족가의 영애가 만들 만한 손수건은 맞았다.
그래도 저런 손수건이야 강탈하면 그만 아닌가?
도저히 믿기지 않은 브리짓은 옆에 선 레오폴드를 쳐다봤다.
“사실입니다.”
레오폴드가 미소를 지으며 맞다고 하자 그제야 브리짓은 납득했다.
“…그렇구나. 근데 네 형은 왜 보자고 하는 거냐. 보자마자 화낼 텐데.”
“제라드한테도 손해는 아닙니다.”
“형이라고 해야지.”
“그딴 자식이 무슨 형… 어쨌든 서로 이득인 일이라니까요. 함께 손을 잡고, 키슬링과 대적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데.”
“4황자랑 대적을? 가능한 이야기야?”
“물론이죠. 헤이든 공작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겠구나. 잠시만 기다려라. 내 바로 부를 테니.”
브리짓은 제라드에게 시종을 보내면서, 급한 일이니 최대한 빨리 오라고 전하라고 했다.
그걸 보며 레오폴드가 카엘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래도 1황자도 나름대로 일이 있을 텐데 바로 올까?”
“바로 올 겁니다.”
스승에게 들은 바로는 야밤에도 바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한바탕했다지.’
“헉, 정말이군.”
금방 나타난 제라드를 보며 레오폴드가 놀랐다.
제라드는 검을 차고 갑옷을 입다 만 게 아무래도 군사훈련을 나가려는 중이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탈프에게 안 좋은 상황을 초래했다.
“어머니! 무슨 급한 일이길래 부르셨습니까? 이분들은 누구…….”
“훗. 못 알아보겠나? 나다. 탈프.”
“탈프?! 너 이 자식. 여긴 왜 왔어!”
제라드는 잘난 척하는 인간이 탈프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검을 뽑아 들었다.
“아직 원한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렇겠죠.”
레오폴드의 속삭임에 카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맞장구쳤다.
참고로 그때 사건의 중심이었던 여인은 이미 탈프 품에서 벗어나 다른 왕국으로 가서 왕비가 됐다고 들었다.
다행히 브리짓이 제라드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렸다.
“지금 어미 앞에서 뭣들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어머니.”
호되게 혼난 제라드가 검을 내리는 걸 보고, 탈프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소심한 놈.”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면 사과부터 해도 모자랄 판에 망나니답게 적반하장이었다.
“더 다투기 싫으니 내 앞에서 썩 꺼져라!”
“나도 사양이야. 같이 큰일을 도모해 볼까 했는데 안 되겠어!”
제라드의 큰소리에 탈프도 목소리를 높이며 몸을 돌렸다.
그걸 본 레오폴드가 걱정했다.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사실 회귀 전에도 당연히 두 사람을 협력 관계로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인 브리짓이 말해도 제라드는 싸우지 않는 거면 모를까, 힘을 합치는 건 완강히 거부했던 거였다.
‘하지만, 4황자를 한번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했지.’
2황자를 꺾은 4황자는 이미 제위에 오른 것처럼 오만하게 구는 중이었다.
그런 4황자를 한번 겪고 나면,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합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실제로 회귀 전의 1황자 제라드도 4황자를 보자마자 탈프 황자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애썼다고 했으니까.
‘마침 4황자도 수도에 있다고 하니까. 어떻게든 만날 자리를 마련하면 되겠지.’
어떻게 마주치게 해야 좋을까 고민하는데, 그 시간이 예상외로 빨리 찾아온 게 아닌가?
“음? 탈프에 제라드까지 여기 있었나?”
입구 쪽에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화려한 차림에 검은 머리에 냉철한 얼굴을 한 청년이 서 있었다.
“키슬링?! 여긴 무슨 일로?”
난데없이 4황자가 나타난 거였다.
심지어 호위 기사들까지 잔뜩 데리고.
“아, 탈프가 여기 있다고 해서 보러 왔지. 환골탈태했다고 화제더라고. 근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변했는데?”
이죽거리는 말투와 달리 내뿜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소드 엑스퍼트라고 하더니, 보통이 아니군. 뒤에 있는 호위들도 모두 소드 엑스퍼트라지?’
키슬링을 비롯해 모두 소드 마스터 파이슨의 제자였다.
키슬링은 영리하게도 소드 마스터는 동원하면 안 된다는 황제의 어명을 피하고자 소드 엑스퍼트를 모두 자기 호위 기사로 임명한 거였다.
“흥!”
그걸 아는 탈프는 콧방귀만 뀔 뿐, 별다른 대꾸도 못 하고 슬쩍 눈길을 피했다.
반면에 키슬링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는 탈프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제 겉모습은 그럴싸해졌네, 이 정도면 옆에 세워 둬도 부끄럽지 않겠어. 어때, 내 쪽으로 오는 건?”
“흥! 너 따위와 손잡을 생각은 없다.”
“누가 손을 잡는대? 내 밑으로 들어와야지.”
“뭐야?!”
“어, 그러다 치겠다. 어디 한번 덤벼 봐.”
탈프가 발끈하며 인상 쓰자 키슬링은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러면서 검집에 손을 대는 게 언제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그때.
“그만! 여기가 어떤 곳이라고, 피를 보려 하느냐!”
…라고 금방까지 탈프에게 검을 휘두르려고 했던 제라드가 소리쳤다.
그러자 키슬링이 이죽거렸다.
“누가 이런 더러운 창녀 집에서 검을 뽑는대? 재수 없게.”
“뭐라고?!”
“제, 제라드. 진정하거라. 어미는 괜찮다.”
무서운 기세로 분노하는 제라드를 브리짓이 황급히 나서서 말렸다.
여기서 칼부림이 벌어지면 키슬링의 뒤에 있는 호위 기사들이 이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까 두려웠던 거였다.
실제로 키슬링은 2황자도 이렇게 시비를 걸어 제거한 전적이 있었다.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산하에 시비 거는 거였다.
그걸 잘 알고 있던 제라드도 이를 악물고 화를 가라앉혔다.
“…….”
“치, 김샜네. 가자.”
제라드가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키슬링은 비웃으며 돌아가 버렸다.
“어휴, 개자식이, 죽여 버릴 수도 없고.”
키슬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탈프가 욕했다.
반면에 브리짓은 긴장이 풀렸는지 비틀거렸다.
“어,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그래도 좀 쉬어야겠구나.”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라드는 뒤쪽의 침실로 브리짓을 눕히고 바로 나오더니, 툴툴거리고 있는 탈프에게 말했다.
“너도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지?”
“당연하지!”
“그럼. 저 재수 없는 녀석을 쓰러트릴 테까지 힘을 합치자.”
“내가 할 말이었다! 그래도 저런 개자식보다는 형제가 낫지.”
탈프는 제라드가 내민 손을 잡았다.
조금 떨어져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레오폴드가 속삭였다.
“정말 자네 말대로 됐군.”
“이렇게 빨리 될지는 몰랐지만요.”
카엘은 의기투합한 형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스승은 탈프 황자를 구슬려 제라드와 키슬링을 대면하는 자리를 만드느라 몇 달 동안 애를 썼다고 들었다.
“이제 이대로 두면 서로 한창 싸우겠군.”
“그래 봐야, 4황자가 쉽게 이기겠지만요. 그냥 봐도 역량이 좀 부족해 보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회귀 전 1황자는 3황자를 비롯해 여러 황자들을 규합해서 4황자와 싸웠지만, 일방적으로 밀렸다.
스승이 나서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해도 탈프 황자가 어찌나 개판을 치는지 분통이 터질 정도라고 했다.
‘결국, 3황자를 이용하는 건 포기했다고 했지.’
“그건 그런데, 아쉽군.”
레오폴드는 노골적으로 안타까워했다.
후계 다툼을 하며 제국의 국력을 깎아 먹을 걸 기대했는데, 4황자가 쉽게 이겨 버리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일로 4황자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기만 해도 나쁘지 않지. 나야 단기간에 소란만 피워 주면 상관없지만.’
원래라면 레오폴드가 망나니짓으로 제국 수도에서 주목받는 동안, 드워프와 엘프들을 탈출시킬 작정이었다.
다행히 예상보다 큰일이 벌어질 판이라 훨씬 수월할 거 같았다.
* * *
잠시 후.
손을 놓은 제라드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 힘만으로는 무리다.”
“훗. 넌 예전부터 너무 걱정이 많아. 걱정할 거 없어.”
“잘 모르나 본데, 분하게도 우리가 힘을 합쳐도 키슬링에게 못 미쳐.”
제라드는 자신만만한 탈프를 어이없어하면서도 천천히 설명했다.
실제로 탈프 황자의 세력이라고 해 봐야 같이 어울려 놀던 귀족밖에 더 있겠는가?
그나마도 가문에서 내놓은 탕아들이 대부분.
그런데도 믿는 구석이 있던 탈프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니까. 헤이든 공작이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헤이든 공작이?! 어떻게 된 거냐?”
“공작한테 딸이 있잖아. 아멜리아와 혼약하기로 했거든.”
“아, 아멜리아 님과 말이냐…….”
제라드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듯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예전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형제답게 취향까지 비슷한 모양이네.’
그래도 그리 미련은 없는지 바로 화제를 돌렸다.
“헤이든 공작까지 나선다면 할 만하겠군.”
“그럼! 그러니까 어서 병력을 모아서 치러 가자고.”
“그럴 수는 없지. 일단 명분이 필요하다.”
“인테르성은 공격해도 괜찮지 않아?”
“2황자 소유였던? 하긴 원래 어머니가 하사받으셨던 거니 충분히 명분이 있다. 좋은 의견을 냈구나.”
“헤헷.”
제라드의 칭찬에 탈프가 코를 훔치며 웃었다.
공통의 적을 앞두고 있으니 형제끼리 죽이 잘 맞는 듯했다.
그때 제라드가 레오폴드와 카엘을 쳐다봤다.
“그대들은?”
“아, 이쪽은 브레프니 왕국의 레오폴드 왕자. 저쪽은 그가 데리고 있는 의원이고.”
“흠. 자리를 옮기는 게 나을 거 같군. 외부인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괜찮다! 레오폴드는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니까. 레오폴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이 자리에 없었겠지.”
“그래? 하긴.”
제라드는 이채를 띤 눈빛으로 레오폴드를 쳐다봤다.
생각해보면 구제 불능이었던 동생이 갑자기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 게 이상했다.
‘저자가 도움을 줬나 보군.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그 의문은 탈프 황자가 바로 풀어 줬다.
“제라드도 들어 본 적 있지? 브레프니 왕국의 망나니 왕자라고.”
“아.”
확실히 들어 본 적 있었다.
국정에는 관심이 없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면서 사고 쳐서 브레프니 국왕도 매우 실망하고 있다고.
어찌나 심각한지 제국과 달리 장자에게 왕위를 상속하는 브레프니 왕국이 왕세자로 삼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는 보고도 받은 기억이 있었다.
‘망나니끼리 어울린 것뿐인가.’
제라드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했다.
큰일을 도모하려는 차에 뭔가 쓸 만한 인물을 데려왔다 싶었는데, 하필이면 타국의 망나니라니!
그래도 보기에는 탈프 황자의 이전 모습보다는 훨씬 멀쩡해 보였다.
‘설마 저자도 탈프처럼 갑자기 모습이 변한 건가? 의원이 같이 있는 것도 이상하고.’
제라드가 넌지시 물었다.
“이 의원이 지어 준 약을 먹고 살을 뺀 거냐?”
“…살을 뺐다기보다는 내 본모습이 드러나게 도와준 거지.”
탈프는 자존심이 상한 듯 툴툴대며 대꾸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다니.
“그렇다면 부탁할 게 있는…….”
“안 된다! 너는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탈프가 정색하며 제라드의 말을 끊었다.
“아니, 내 약이 아니라 어머니의 약을 부탁하려고 한 건데… 요즘 피부가 많이 상하셨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거든. 오늘 충격도 받으셨으니 신경을 더 쓰셨을 거 아니냐.”
“뭐, 그 정도야.”
그제야 안도한 탈프가 물러섰다.
제라드는 그 모습에 인상을 썼다가, 카엘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찌 되겠는가?”
“맡겨 주시면 최대한 정성껏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그러자 탈프가 끼어들었다.
“내 덕분에 알게 된 의원이니, 나한테도 고맙다고 해야지.”
“그, 그래.”
제라드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두 황자에게 벗어나자마자 레오폴드가 말했다.
“어머니를 위한 약이라, 효심은 인정하지만, 자네는 귀찮은 일을 맡게 됐군.”
“괜찮습니다. 어차피 브로칸이 돌아오려면 좀 남았으니까요.”
현재 엘프 자매와 브로칸은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잡혀 있는 곳으로 가서 접촉해 탈출을 논의하고 돌아오기로 했다.
다음 날.
브로칸 대신, 은밀히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제국의 귀족들이었다.
키슬링이 찾아온 것처럼, 탈프 황자가 어떻게 환골탈태한 건지 알아본 귀족들이 카엘에게 부탁하러 온 거였다.
카엘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였다.
‘어, 이거 돈 좀 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