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53화 (53/234)

53화 망나니 황자 인간 만들기 (3)

며칠 뒤.

헤이든 공작가에 비상이 걸렸다.

탈프 황자로부터 서신이 도착한 것 때문이었다.

“내 딸과 혼약을 맺으러 온다고?! 이런 터무니없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헤이든 공작이 황자의 서신을 찢어 버렸다.

평소 냉철하기로 유명한 헤이든 공작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주변의 측근들은 순간 놀라면서도 이해했다.

탈프 황자가 아무리 망나니라고 하더라도 너무 무례한 상황이었으니까.

사전에 교류하던 사이도 아닌데, 대뜸 결혼해야겠다며 서신 하나만 달랑 보낸 뒤, 쳐들어오는 중이었다.

마치 맡겨 놓은 물건을 찾는 것처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상대는 망나니로 유명한 3황자.

웬 철없는 귀족 자제였다면 흠씬 혼을 내 줄 테지만, 불가능하니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냥 적당한 양녀를 들여 혼인시켜 버리지요.”

“안 된다! 아멜리아를 지명했는데, 다른 양녀를 내밀면 그 성격에 행패만 부릴 거다.”

“그, 그렇겠군요.”

“받아들인다고 해도 곤란하다. 이대로 탈프 황자와 손을 잡았다가는 앞날이 어두울 테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측근의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헤이든 공작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 아멜리아와 만나게는 해야지. 아멜리아는 분명 질색할 테니, 그걸 명분으로 혼인을 미루고 수도의 귀족들을 움직여 무마해야겠어.”

당사자가 싫다고 하면 아무리 안하무인인 3황자도 그 자리에서 혼약을 치르자고 우기긴 어려울 터였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 어쩌면 흥미가 떨어져 자연스레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명분도 실리도 챙길 수 있겠군요.”

“명안이십니다.”

“하긴 누가 그런 자를 지아비로 섬기고 싶겠습니까?”

측근들도 한목소리도 찬성했다.

헤이든 공작의 딸, 아멜리아도 공작이 예상한 대로 반응했다.

아니, 예상 이상의 반응을 했다.

망나니 황자가 자신을 신부로 삼기 위해 오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런 돼지와 결혼할 바에는 죽겠다며 단검을 자신의 목에 들이대며 협박한 거였다.

예전에 탈프 황자를 직접 본 적이 있던 아멜리아라 더욱 격렬한 반응을 보인 거였다.

헤이든 공작이 놀라서 쫓아가 자신도 이 혼담에 반대이며, 어떻게든 막겠다고 약속하고서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겨우 한숨 돌린 헤이든 공작이 지친 얼굴로 딸에게 당부했다.

“지금처럼 황자 앞에서도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보이거라. 그래야 내가 만류할 수 있을 테니.”

“물론입니다! 빈말이 아니라, 그 돼지랑 결혼할 바에는 확 뛰어내려 죽어 버리겠습니다!”

아멜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귀족가의 영애라면 가문을 위해 개인 의사와 상관없이 혼인을 맺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헤이든 공작이 애지중지 키워 놓으니 가능한 어리광이었다.

그러고 일주일 뒤.

탈프 황자가 헤이든 공작의 성에 도착했다.

* * *

“오랜만이오, 헤이든 공작.”

“어…….”

헤이든 공작은 순간 당황했다.

탈프 황자가 도착했다고 해서 마중 나왔더니, 왠 낯선 청년이 거만하게 인사해 왔기 때문이다.

‘대체 누구지?’

황제 폐하의 어안과 비슷한 거로 봐서는 황가의 인물 같긴 한데, 도통 기억에 없었다.

그 청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나? 날세. 탈프.”

헤이든 공작은 상상도 못 한 정체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사람인가 돼지인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뚱뚱했는데.’

그런데 탈프 황자를 자처하는 이 청년은 탈프 황자와 달리 용모가 수려하고 체격도 건장했다.

“놀랐나? 그동안 관리 좀 했지. 푸헤헤헷!”

‘관리 좀 했다고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그래도 저 경망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니 탈프 황자가 떠오르긴 했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에이,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내 신부는 어디 있나? 어서 얼굴을 보고 싶군.”

‘성격 급한 건 여전하군.’

헤이든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아멜리아에게 나오지 말라고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 급한 성질에 딸을 보자마자 둘러업고 가 버릴까 걱정돼서였다.

그런데.

“탈프 전하?!”

분명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했던 아멜리아가 앞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오! 그대가 아멜리아인가? 듣던 대로 아름답군.”

“아!”

탈프가 미소 지으며 칭찬하자, 아멜리아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거렸다.

“이런.”

탈프가 곧바로 부축했는데 그러자 아멜리아가 듬직한 탈프의 가슴에 안긴 모양새가 됐다.

“가, 감사합니다. 저하…….”

아멜리아가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뗐다.

그걸 본 헤이든 공작은 충격을 받았다.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한 게 분명했다.

‘결혼시키면 죽겠다며 날뛰었으면서 저렇게 다정하게 굴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엘도 내심 놀랐다.

‘스승에게 들었을 때는 말이 되나 했는데 정말 통하네.’

앞으로의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헤이든 공작은 정신을 수습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안 돼!’

아무리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도 탈프 황자의 세력은 미미했다.

그런 자와 손을 잡아서야 미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후견하고 있는 12황자는 이제 겨우 세 살에 불과하니, 시간이 많았다.

조용히 힘을 키우며 기다렸다가 4황자가 다른 황자와 부딪쳐 세력이 꺾이면 움직일 생각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4황자가 제위에 오르면 자기와 척을 진 다른 황자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니까.

‘1황자 정도만 되어도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지킬 힘이 있으니 괜찮은데…….’

아쉬워하면서 탈프 황자와 대화하는데, 제법 그럴싸한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자신과 12황자, 거기에 1황자까지 연합해 4황자에 대항하자는 거였다.

설명만 들으면 강대한 세력을 가진 4황자라도 충분히 꺾을 수 있어 보였다.

그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헤이든 공작은 확신했다.

‘이제까지 망나니짓은 주변을 모두 속이기 위한 위장이었나 보군.’

지금 탈프 황자의 모습은 웅크린 사자가 떨쳐 일어나 세상을 호령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 사자가 제일 먼저 자신과 손을 잡겠다고 한 거였다.

그야말로 운명 아닌가?

물론, 탈프 황자가 말한 것들은 이곳까지 오는 길에 카엘과 레오폴드가 설명한 거였다.

그것도 장밋빛 전망으로 바람을 잔뜩 불어넣어서.

황위에 욕심이 난 탈프 황자도 드물게 귀를 기울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계산을 마친 헤이든 공작은 탈프 황자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기로 결정 내렸다.

거기다가 앞으로 적극적인 협력 관계를 맺기로 맹세했다.

카엘의 계획대로 3황자와 12황자 간의 동맹이 맺어진 거였다.

“휴, 이제 수도로 가면 1황자와 동맹을 맺으면 되겠군.”

레오폴드가 안도하며 기뻐했다.

아무래도 제국 내에 분란을 일으킬 생각에 카엘보다 레오폴드가 더 신난 느낌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계획대로 되면 몬스터 대침공을 막기 위해 병력을 왕국 북부로 모아도 레오폴드가 흔쾌히 수락할 테니까.

어쩌면 일전에 상상한 대로 남쪽 국경을 지키는 왕국의 소드 마스터까지 불러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훨씬 오크 군단을 막는 데 수월하겠지.’

카엘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카엘과 레오폴드 왕자의 사절단은 탈프 황자를 앞세워 제국 수도로 출발했다.

망나니 황자와 동행한다는 소문에 레오폴드에게 초대장을 빙자한 결투장을 보내는 일은 뚝 끊겼다.

대신 다들 탈프 황자를 정중하게 초대했다.

황자가 싫든 좋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초대 안 했다가는 괜히 무시한다고 시비 걸릴 수도 있으니까.’

대부분 탈프 황자의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라고, 달라진 게 없는 횡포에 질색했다.

그러는 사이 소드 마스터 올리버의 행방을 묻는 로스코 백작가의 기사가 찾아왔다.

레오폴드와 카엘은 당연히 모르겠다며 둘러댔다.

그러자 기사가 항의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분명히 마주쳤을 텐데, 행방을 모른다니요.”

“부하들이 곧바로 포트빌성으로 향했다는데,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으니까.”

“왜 거기로 갔다고 합니까?”

“나야 모르지. 소드 마스터이시니만큼 언데드 몬스터들을 퇴치하러 가신 게 아니겠어?”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신데…….”

레오폴드의 설명에도 기사는 납득하지 않았다.

그런 기사를 쫓아낸 건 탈프 황자였다.

“웬 소란이냐!”

“그게 올리버 경을 찾느라…….”

“원래 자기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자가 아니냐! 어디 가서 죽을 위인은 아니니 그만 귀찮게 해!”

‘죽었는데.’

현재 올리버의 시체는 메라자이드가 들고 갔고, 장비와 무기는 적당히 부숴서 버려 두라고 했다.

‘나중에 찾으면 언데드 몬스터한테 당했다고 생각하겠지.’

그 내막을 모르는 기사는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갔다.

그걸 보며 카엘이 쾌재를 불렀다.

‘망나니도 우리 편 망나니면 쓸데가 있단 말이지.’

그 뒤로는 별일 없이 제국 수도에 순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 * *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군.’

카엘은 처음 보는 수도 페르세스의 모습에 감탄했다.

황제가 기거한다는 본성은 돌산을 깎아 만들어 높고 견고한 게, 단단한 요새 같았다.

거기다 그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외성이 둘러싸듯 세워져 있었는데, 그 성 하나만 해도 클리페우스성 정도로 컸다.

외성과 외성은 높고 두꺼운 장벽으로 이어져 있는 게 몬스터 대침공 때의 오크 군단이라도 쉽게 점령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드래곤이 나타나면 무너지겠지만.’

참고로 저 다섯 외성은 두 명의 소드 마스터와 1황자, 4황자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일행은 1황자 제라드가 관리하고 있다는 남쪽 외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제라드는 외성에서 후궁인 어머니 브리짓을 극진히 모시고 있다고 했다.

‘그것 하나만으로 효자긴 하지.’

황후 외에도 황제의 후궁은 수십 명에 달했고, 그 후궁의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 황자들은 황제의 찰나의 여흥거리였던 자신의 모친은 도외시하고,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썼으니까.

“음…….”

탈프 황자는 막상 어머니의 거처 앞에 도착하자 엉거주춤하며 망설였다.

망나니짓 때문에 많이 혼나기도 하고, 뚱뚱했던 자신의 외모를 못마땅해했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함께 갔던 카엘이 말했다.

“전하,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그래요. 지금 얼마나 멋지신데요. 브리짓 님도 분명 보고 감탄하실 겁니다.”

“흥! 누가 걱정했다고.”

레오폴드까지 한마디 거들자 탈프는 괜히 성질내며 문을 열었다.

안에 있던 시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걸 막고 방 안을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탈프입니다!”

“아, 왔느냐. 잠깐만. 아직 단장이 끝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브리짓은 한참 시간을 끌었다.

탈프는 어머니가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자식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저러는 건 아니었다.

만에 하나 황제가 찾을 경우를 대비해서 최선을 다해 꾸미고 있는 거였다.

십 년 넘게 찾은 적이 없음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그래, 무슨 일로 왔… 엇.”

단장을 마치고 나오던 브리짓이 입을 다물며 멈춰 섰다. 그러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폐하?”

“아닙니다. 어머니, 저 탈프입니다.”

“탈프… 어, 정말이냐? 정말 네가 탈프란 말이야?”

“네, 맞습니다.”

“아니, 어떻게…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정말 놀랍구나.”

브리짓은 가까이 다가가서 탈프의 모습을 요리조리 살폈다.

“정말 폐하의 젊을 때를 쏙 빼닮았어.”

“그, 그렇습니까?”

“훨씬 더 듬직해 보이긴 하지만.”

우람한 근육 때문인 거 같았다.

한차례 탈프의 몸을 이리저리 훑던 브리짓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고 독하게 단련한 모양이구나. 이 어미도 이제 걱정을 덜었다.”

“헷, 제 걱정을 다 하셨다니…….”

탈프는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이런 네 모습을 보면 황제 폐하께서도 얼마나 기뻐하실까.”

정작 브리짓은 그것마저도 황의 눈에 들 기회라고 여겼을 뿐이지만.

“어쨌든 황제께 이른 시일 내에 알현할 자리를 마련하자꾸나.”

“…네.”

탈프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리 안하무인인 망나니라 할지라도 황제를 대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보다 어머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그래. 뭐든 말하렴.”

“제라드를 불러 주십시오.”

“제라드를 왜……? 너 혹시 또 무슨 사고 쳤니?”

미소를 짓던 브리짓이 이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동안의 행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전하, 혼약한 소식부터 말씀드려야지요.”

당황하는 탈프를 향해 레오폴드가 조언했다.

“그대는?”

“브레프니 왕국의 1왕자 레오폴드 브레프니라고 하옵니다.”

“아, 반갑군요. 근데 혼약이라니 무슨 말이냐?”

그제야 진정한 탈프가 멋쩍어하며 자신의 혼약을 어머니한테 고했다.

“아, 헤이든 공작의 장녀 아멜리아 헤이든 양과 혼약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브리짓이 기겁했다.

“서, 설마. 납치해 온 거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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