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망나니 황자 인간 만들기 (1)
탈프 황자.
망나니 황자라고 불리는 그는 레오폴드와 달리, 진짜 망나니였다.
심지어 식탐이 많아 상상 초월할 정도로 뚱뚱한 거로 유명했다.
그 탓에 망나니 황자라는 별명 외에도.
3인분 황자.
부풀어 오른 풍선이라고도 불렸다.
게다가 3황자임에도 황위 계승에 언급도 되지 않았다.
일찍이 황제가 장자 상속을 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탓에 제국 내는 황위 다툼이 치열했지만, 별다른 세력도 없어서였다.
‘할 줄 아는 건 황자라는 지위를 이용한 패악질뿐이었지.’
그런 그의 인생도 잠시, 찬란한 빛을 발할 때가 있었다.
바로 카엘의 스승과 만났을 때였다.
현자의 돌을 얻으려고 애썼던 스승은 탈프 황자에게 접근했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약으로 체중 감량을 시켜 줬다는 거였다.
어마어마한 체중 감량으로 환골탈태한 탈프 황자는 무슨 자신감이 생겼는지 황위를 물려받겠다고 나섰다.
스승은 황당했지만, 탈프 황자도 황국의 보물 창고에 접근 못 한다는 걸 알고 황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애썼다.
우선 가장 세력이 컸던 4황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어린 12황자의 후견인인 공작가의 딸과 혼인시키고, 어머니가 같은 1황자와 손잡게 만든 거였다.
‘거기까지는 일이 잘 풀렸지만, 결과적으로 탈프 황자가 망쳐서 실패로 끝났다고 했지.’
문제는 그 뒤의 일이었다.
다른 세력을 물리친 4황자가 황위 계승에 쐐기를 박을 만한 공적을 세우기 위해 브레프니 왕국을 침공하려 한 거였다.
그 낌새를 눈치챈 왕국은 제국의 공격을 방비하느라 병력을 남쪽으로 집결시켰다.
그 탓에 갑작스러운 몬스터 대침공에 클리페우스성이 뚫린 뒤에도, 왕국은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티겔 브리운이 전사했을 때도 왕국의 소드 마스터가 꼼짝할 수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더욱 황당한 건 그 뒤의 일이었지.’
4황자가 몬스터 대침공으로 혼란에 빠진 브레프니 왕국으로 진출해 해방군 행세라도 했으면 차라리 나았겠지만.
오크 군단의 군세가 범상치 않자 곧바로 철군해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안 내버려 두지.’
4황자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더 약화할 작정이었다.
‘그래야 레오폴드 황자도 병력을 클리페우스성에 집중하자고 할 때 거리낌이 없겠지.’
카엘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레오폴드가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엘, 어떡하나? 탈프 황자의 초대장이 도착했다네.”
“네, 들었습니다.”
“왜 그리 태연한가? 황자의 별명을 못 들어 봤는가?”
“압니다. 망나니 황자라고 불린다지요.”
“망나니 왕자로 불리는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조금 걱정되는군.”
사실 레오폴드의 우려는 당연했다.
제국과 왕국의 격차를 생각하면, 황자가 자신을 해쳐도 항의하기 어려웠다.
보통이라면 이득이나 명분이 없을 땐 그러지 않겠지만, 이 망나니 황자는 달랐다.
실제로 서남쪽의 오스발도 왕국의 왕자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기분 나쁘다며 채찍과 몽둥이로 얻어맞고, 반신불수가 된 일도 있었다.
그때 오스발도 왕국이 항의하자 제국군이 쳐들어가서 짓밟았었지.
‘망나니 황자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라,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였지.’
그 뒤로 더욱 기고만장해진 망나니 황자는 안하무인으로 패악질을 부렸다.
그런 자가 레오폴드를 부른 거였다.
“어쩐다… 차라리 무시하고 수도로 바로 가 버릴까?”
“이미 서신도 받았겠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초대에 응하시죠.”
“응하라고?”
“네. 일단 상대해 보고 여차하면 도망칩시다. 최악의 경우에라도 클리페우스성으로 가 버리면 아무리 황자라도 어쩌지 못 할 겁니다.”
카엘의 말에 레오폴드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렇군. 이거 창피하게 내가 지레 겁을 먹었나 보군.”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긴 하니까요. 하지만 잘 움직이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혹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나?”
카엘의 의미심장한 얼굴을 본 레오폴드가 흥미를 보였다.
“탈프 황자를 만나는 김에 황위 쟁탈전에 힘을 실어 주면 어떨까 해서요.”
그 말에 레오폴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음, 아무리 그대라도 제국 내의 사정은 잘 모를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운을 뗀 레오폴드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제위에 가장 가까운 건 4황자. 황후의 첫 번째 자식으로 다른 후계자들과 비교해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지.”
“두 번째는 1황자. 황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래도 장자다 보니 그를 옹립하려는 자들이 많은 편이야.”
“2황자는 4황자를 상대하다 사망했고, 망나니인 3황자를 포함해 나머지 황자들은 세력이 미미해.”
“헤이든 공작이 후원하고 있는 아직 어린 12황자 정도가 그나마 주목할 만하달까.”
“참고로 망나니 3황자와 1황자는 같은 두 번째 후궁이 낳아서 그나마 가까운 관계라 할 수 있지만…….”
레오폴드가 말끝을 흐리는 걸 카엘이 받았다.
“3황자가 사고 쳐서 사이가 나쁘다죠?”
“알고 있었나?”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중에서 3황자가 사고 친 건 한번 들었다면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친형, 1황자와 정을 통하고 있던 하급 귀족의 여식을 뺏은 거니까.’
여인이 유혹했다느니, 황자가 겁탈했다느니 소문이 엇갈렸지만.
중요한 건 3황자가 1황자와 여인의 관계를 알면서도 저질렀다는 거였다.
1황자로서는 폭발할 만한 일이었다.
실제로 평소 온화한 성품이라고 알려진 1황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지 3황자에게 결투 신청까지 했다.
목숨을 걸고 싸워 명예를 회복하고 여인을 되찾으려 한 거였다.
‘다들 1황자가 이겼을 거라고 했지. 결투가 이뤄졌다면 말이야.’
당시에는 둘의 어머니가 자식 간의 혈투만은 볼 수 없다며 말렸기에 겨우 넘어갔다.
그래 봐야 둘 사이는 극도로 나쁜 채였지만.
“어쨌든 망나니 황자를 회유한다고 해도 1황자도 움직이지 못하니, 쓸모가 없을 걸세.”
“그 둘의 어미인 후궁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러면 1황자도 움직이겠죠.”
“헛! 그건 어떻게 아나? 정말 놀랍군.”
레오폴드가 감탄했다.
제국, 특히 황궁 내 사정에 밝지 않으면 모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1황자는 후궁이었던 어머니의 말에 쩔쩔맸다.
‘스승은 한참 고생 끝에 알았다고 했지.’
어쨌든 망나니 황자가 어머니를 설득하면 1황자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도 힘들걸. 제 어미가 망나니 황자의 행실을 떠나서 뚱뚱하다고 꺼리거든. 보기 창피하다는 거지.”
그것도 카엘은 알고 있었다.
둘의 싸움을 말린 것도 아끼는 첫째 아들이 하급 귀족가의 여식에게 눈길을 주는 게 마음에 안 들던 차에 망나니 황자가 처리해 준 탓이 컸다.
결투를 말린 이유도 다른 데 있었다.
‘1황자가 이길 게 분명한데, 그러면 다시 그 여인이 1황자에게 붙을 테니까.’
카엘이 자신 있게 말했다.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근데 둘이 힘을 합치는 데 성공하더라도 4황자를 상대하긴 부족해. 12황자까지 합쳐야 겨우 해볼 만할 거야.”
“12황자도 끌어들일 겁니다.”
“어? 어떻게?”
“결혼 동맹이죠. 12황자를 후원하는 헤이든 공작에게 딸이 있지 않습니까? 망나니 황자와 혼약하면 됩니다.”
“음. 공작이 딸을 그렇게 아낀다고 들었는데, 망나니에게 시집보내려고 할까? 무엇보다 딸이 그렇게 얼굴을 밝힌다는데, 돼지 같은 3황자한테 시집가라고 하면 자살할지도 몰라.”
레오폴드는 여전히 우려했다.
그래도 카엘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스승이 한번 해 봤던 거였으니까.
“그것도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래? 그렇게 자신감을 보이니 어떻게 할지 되레 기대되는군.”
레오폴드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 전에 황자가 실제로 어떤 자인지 파악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당장 망나니 왕자라 불리는 자신도 진면목을 숨기고 있었으니, 3황자의 경우에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고 본 거였다.
“제가 알기로는 망나니가 맞습니다만.”
카엘의 단호한 말에 레오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좋아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만나러 가지.”
* * *
며칠 뒤.
탈프 황자를 만난 카엘은 눈을 의심했다.
‘뚱뚱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람 셋을 합친 것만큼 뚱뚱해 3인분 황자라더니 정말이었다.
거기다가 수면 시간이 불규칙하고, 술과 기름진 음식만 잔뜩 먹은 탓에 머리카락도 얇고 듬성듬성했다.
이대로라면 금방 벗겨질 게 빤히 보였다.
‘아니, 지금도 꽤 벗겨졌네. 용케 잘 안 보이게 가렸군.’
망나니짓을 연기하느라 음주와 가무를 즐긴다고 해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술을 삼가고 검술 훈련을 하는 레오폴드와는 천양지차였다.
“탈프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오폴드 브레프니입니다.”
“레오폴드? 그대가 레오폴드란 말인가?”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닐세,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길이 바쁘고 고될 터인데 내 부름에 응해 주어 고맙네.”
놀랍게도 탈프 황자는 레오폴드가 온다는 소식에 직접 마중까지 나왔다.
심지어 매우 환대하는 게 아닌가?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지. 내 맛있는 음식과 술을 잔뜩 준비해 뒀다네. 역시 여독을 풀려면 술이 최고 아닌가?”
“이 레오폴드 너무나도 감격했습니다! 실은 저도 전하께서 마음에 드실 만한 독한 술을 챙겨왔습니다.”
“역시! 그대라면 풍류를 알 줄 알았지. 내 그래서 꼭 만나고 싶었다네.”
“저도 실은 전하의 위명을 듣고 행운이 따르면 멀리서라도 뵙겠지 싶어 이렇게 제국행에 나선 겁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살갑게 대화를 나누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레오폴드가 슬쩍 뒤를 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이러면 되나?’
카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소문과 달리 성격이 그리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만?”
“글쎄요. 마음 맞는 높으신 분들끼리만 친해 보이는 거겠죠.”
탈프와 레오폴드를 본 호위 기사 제롬이 놀라자 레몽이 이죽거렸다.
레몽이 맞는 말을 했다.
저 망나니 황자는 한참을 술을 마시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더니, 할 이야기가 떨어지자 흥을 돋워야겠다면서 잔혹한 지시를 내렸다.
하인에게 음식을 억지로 먹게 한 거였다.
그걸 킬킬거리며 보더니 하인이 참지 못하고 토하자 더러우니 꺼지라고 걷어찼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비명을 듣고 싶다면서 하인들에게 서로 채찍으로 때리게 했다.
겁먹은 하인들이 눈치를 보며 때리자, 마음에 안 드는지 직접 나서서 기절할 때까지 후려치기까지 했다.
레오폴드에게 호감을 보인 건 어디까지나 자신과 같이 망나니라는 평판이기 때문.
억울하게 주위의 경멸과 무시를 느꼈을 거라는 동질감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멈춰야겠는데.’
점점 폭력 수위가 높아지는데, 이대로 가다가 흥분해 검을 휘두르려고 하면 곤란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 불똥이 레오폴드한테까지 튈지도 몰랐으니까.
마침 레오폴드도 카엘을 쳐다보며 난처한 눈빛을 했다.
카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인을 불러 술병을 건넸다.
드워프 왕국에서 담은, 매우 독한 술이었다.
다행히 탈프 황자는 레오폴드가 권하는 술을 기뻐하며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켜더니 그대로 뻗어 버렸다.
그걸 본 황자의 시녀들과 하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늘은 좀 푹 쉬겠다고 자기네들끼리 조용히 속삭이더니 거대한 황자의 몸뚱어리를 낑낑대며 거처로 옮겼다.
“휴우. 우리도 가지.”
레오폴드도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떴다.
그걸 본 카엘은 웃으며 물었다.
“어땠습니까?”
“봤으니 자네도 알지 않나? 이리저리 찔러 봤지만, 저건 진짜야. 이제까지 내가 했던 건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처럼 느껴졌네.”
레오폴드는 정신적인 충격이 컸는지 넋이 나간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다 카엘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저자가 황제가 되면 폭군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렇겠군. 그랬으면 좋겠어.”
레오폴드는 저 망나니 황자가 황제가 되었을 때 제국에 미칠 영향을 상상하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탈프 황자를 겪은 이라면 그가 황제가 됐을 때, 제국이 혼란에 빠지고 분열될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레오폴드는 금방 현실을 자각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불가능할 거 같은데……. 그보다 자네 계획은 여전히 진행할 생각인가? 저 망나니로는 도저히 안 될 거 같은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긴 합니다만, 번듯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면 가능하리라 봅니다.”
회의적이던 레오폴드가 깜짝 놀랐다.
“허, 저 돼지를 사람으로 만든다고?! 그게 가능해?”
“한번 두고 보시죠.”
카엘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내일 황자에게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