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49화 (49/234)

49화 리치와 리치 (2)

‘확실히 지금 나보다 강하군.’

카엘은 가까이서 메라자이드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판단을 내렸다.

적어도 데비하이드를 처음 봤을 때보다 두 배 이상은 강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끌고 온 언데드 몬스터들만 해도 까마득할 정도로 많았다.

어림잡아도 수백에서 천 마리가량.

그나마 다행인 건 상급 언데드가 없다는 것 정도?

‘최악의 경우에도 몸을 빼낼 순 있겠네. 그 전에 이야기부터 나눠야겠지만.’

천천히 다가온 메라자이드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언데드 몬스터들도 일시에 동작을 멈추는 게 아닌가?

마치 훈련받은 정예 병사들처럼.

‘저 정도 숫자까지는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거군.’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오질 않아 뭐 하나 싶었더니 여기 있었구나. 감히 이 메라자이드를 직접 행차하게 하다니.

“답답한 쪽이 와야지 않겠어?”

찌릿.

카엘의 대꾸에 메라자이드가 해골 속의 보랏빛을 번뜩이며 노려봤다.

그러나 카엘이 아무렇지도 않아 하자 이내 의외라는 듯 눈빛을 거뒀다.

-호오, 제법 강단 있는 인간이로고. 이쪽도 흥미롭군. 어린아이가 마검을 들고 있다니.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는데.

한편 데바하이드는 자신의 후배가 예상 밖으로 강해져서 나타나자 걱정하는 듯했다.

-음? 왠지 친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데비하이드의 기운을 느꼈는지 메라자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는 사이잖아. 나와서 인사해.”

-싫다.

“어차피 눈치챘을 거 같은데?”

카엘은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데비하이드를 꺼냈다.

데비하이드는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바닥에 내려와서는 고개를 숙였다.

-…….

-음? 설마.

허리를 숙여 데비하이드를 쳐다보던 메라자이드가 물었다.

-데비하이드? 데비하이드 맞지?

-…선배라고 불러라.

-풋. 푸하하핫! 정말이잖아. 아니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대? 얼마나 힘을 잃은 거야?

메라자이드는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게다가, 서, 선배라고 부르라고? 지금 자기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카엘, 뭐 해? 저 녀석을 해치워 줘.

-금방 뭐라고 했어? 해치워 줘? 그만 좀 웃기라니까.

데비하이드가 화내며 하는 말에 메라자이드는 이제 땅바닥을 치며 웃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내 웃음을 뚝 하고 그치더니 다시 위엄 있는 모습으로 말했다.

-수백 년 만에 재밌는 구경을 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지. 이대로 데비하이드를 내놓고 돌아가라.

-나, 나는 왜?

-후후, 다 알면서 물어?

섬뜩한 느낌을 받은 데비하이드가 카엘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카, 카엘. 나 버리면 절대 안 돼.

“안 버려.”

카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하고는 메라자이드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이제 포트빌성을 포기하고 은신처로 돌아가라.”

-뭐라?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돼?

“허세는 그만 떨지. 너야말로 알고 있지 않나? 운좋게 기습으로 취약한 성을 점령해서 세력을 키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국에서 손을 쓰면 끝장이라는 걸.”

-…….

“소드 마스터 하나만 떠도 소멸당하겠지. 차라리 지금 철수해서 힘을 보존하고 기회를 노려라.”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메라자이드가 차갑게 대꾸하자, 카엘이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아쉽군. 똑똑해 보여서 내 말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내가 똑똑해 보여?

메라자이드가 누그러진 어투로 되물었다.

‘혹시나 했는데, 데비하이드처럼 칭찬에 약하군.’

카엘은 더욱 칭찬했다.

“당연하지. 안 그러면 어떻게 제국 내에서 이 정도로 세력을 일굴 수 있겠어?”

-그건 그렇지. 저 녀석은 브레프니 왕국에서조차 망해서 저 꼴인데…….

-뭐라고?! 자꾸 선배 무시하…….

카엘은 항의하는 데비하이드의 입을 막았다.

한편 메라자이드는 아무래도 고민되는 듯했다.

-어쩐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긴 좀 아쉬운데…….

“그러면 쓸 만한 소재를 넘겨 주지.”

-소재?

“네가 성에서 철수했다는 소문이 돌면, 가장 빠르게 신전 기사들이 들이닥칠 거야. 보물 창고에 숨어 있다가 그 녀석들만 데리고 가라.”

-호, 재밌는 제안이군. 알겠다.

시원스레 승낙한 메라자이드는 그대로 병력을 돌려 돌아갔다.

“휴우.”

메라자이드가 돌아가자마자 루크가 긴 숨을 내뱉었다.

어마어마한 마기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숨이 턱 막힌 채로 버틴 거였다.

소년의 몸으로는 진작에 마기에 정신이 갈가리 찢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아조트가 도와줘서 겨우 견뎌 낸 거였다.

“괜찮아?”

“네… 문제없습니다.”

-감히 내 제자를 건드리다니. 성격 더러운 년!

카엘은 혼자 방방 뛰는 아조트를 내버려 두고 루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실망스럽지 않나? 네 원수인데 그대로 보내서.”

“전혀요. 은인께서 계획이 있으시니 어떤 것이든 따를 작정입니다.”

언데드 몬스터를 그리 증오한다더니.

걱정했던 것과 달리 별다른 반감은 없는 듯했다.

심지어 의욕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무엇보다 제가 힘을 길러서 직접 해치우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 그래. 그 마음가짐이야.

아조트가 장하다는 듯 칭찬했다.

“아조트 말대로 머지않아 그날이 올 거야.”

카엘은 그리 루크를 달래고는 레오폴드가 기다리기로 한 곳으로 돌아갔다.

* * *

카엘이 도착하자 레오폴드가 마차 밖으로 뛰쳐나와 반겼다.

“왜 이제 와?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어, 근데 누굴 데려온 거야?”

“포트빌성 근처로 갔다가 구해 왔습니다.”

“그래? 용케 살아 있었나 보네.”

레오폴드가 루크를 훑어보자, 루크가 주눅이 든 얼굴로 물었다.

“저기… 이분은.”

“아, 브레프니 왕국의 레오폴드 왕자 저하시다.”

“와, 왕자?!”

“귀여운 녀석이로군.”

루크가 놀라는 모습을 보며 웃던 레오폴드는 루크가 익숙한 검을 품에 안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음? 왜 쟤가 아조트를…….”

“검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키워 보려고요.”

“그래? 그럼. 기대하지.”

뛰어난 인재가 생긴다는 말에 레오폴드가 루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포트빌 상황은 어땠는가? 많이 심각하던가?”

“초토화되어 있긴 했습니다만, 언데드 몬스터들은 모두 철수했는지 성안이 비어 있었습니다. …하고 소문이 났으면 좋겠군요.”

“그래? 또 뭔가 재밌는 걸 꾸미고 있나 보군.”

카엘의 말을 들은 레오폴드가 씩 웃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 정의가 승리한 기념으로 연회를 열어야겠구나. 자, 다들 마을로 돌아가자! 주변의 상인들을 수배해 연회를 준비하도록!”

레오폴드는 곧바로 호위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걸 본 루크가 감탄했다.

“왕자까지 움직이다니. 역시 은인께서는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움직인다고 할 거까지야.”

카엘이 멋쩍어하자 아조트가 재촉했다.

-그럼 볼일 다 끝났지? 우리는 훈련하러 가자.

레오폴드가 언데드 몬스터가 물러간 기념으로 축하 연회를 벌인다고 하자 금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실제로 메라자이드가 마기의 연무를 거둔 덕에 포트빌성 주변의 하늘도 정화된 것처럼 맑았다.

그래도 그 지옥 속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소수의 주민들은 여전히 두려운지 쉽사리 돌아가지 못했다.

그 와중에 포트빌성의 주인이었던 미르포아 백작의 혈연관계인 귀족들은 성의 모든 권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며, 성에 접근하는 걸 엄금했다.

하지만.

그런 제약도 여차하면 신전에 숨어 버리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신전 기사들에게는 소용없었다.

* * *

포트빌성 앞.

레오폴드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도망쳤던 신전 기사들이 나타났다.

“이야. 정말 언데드들이 싹 사라진 거 같은데? 있었으면 내 검 맛 좀 보여 줬을 텐데.”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한몫 잡을 수 있도록 신께서 안배해 두셨다고 봐야지.”

“언데드들이 다시 나타나진 않겠지?”

“혹시 모르니까, 얼른 챙길 거만 챙겨서 나오자. 어차피 우리가 성을 먹을 수도 없잖아.”

“하는 수 없지. 우리가 공략해서 수복한 것도 아니니.”

“그래도 신의 이름으로 성의 주인을 다시 논해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욕심쟁이들이 날로 먹으려 한단 말이지.”

“신의 저주나 받을 것들! 천벌이나 받아라!”

신전 기사들은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포트빌성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불타고 부서진 데다가 각종 집기와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긴 했지만. 시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몰랐지만, 메라자이드가 좀비로 만든 탓이었다.

내성 안으로 들어선 신전 기사들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손에 든 검은 진작에 검집에 넣어 두고 준비해 온 커다랗고 튼튼한 자루를 들었다.

“보물 창고는 어디 있지? 언데드들은 금은보화를 볼 줄 모르니 보물 창고에 가면 물건들이 다 그대로 있을걸세.”

신전 기사들은 언데드 몬스터를 어떻게 상대해야할지는 잘 몰랐지만, 언데드 몬스터를 휩쓸고간 자리에서 뭘 챙겨야할지는 빠삭했다.

“저쪽이야!”

“근데 닫혀 있으면 어떡하지?”

“깨부수면 되지. 그 정도 수고쯤은 해야지.”

그렇게 신전 기사들은 보물 창고 앞에 도착했다.

근데 보물창고의 커다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아닌가?

“어, 누가 먼저 와서 털어간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안에 번쩍번쩍한 거 안 보여?”

내부를 얼핏 본 신전 기사가 다가가서 문을 활짝 젖히는 순간.

푹!

머리에 창이 꽂혔다.

스켈레톤 전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내찌른 거였다.

“하, 함정?”

나머지 신전 기사들도 당황하는 사이에 별다른 저항을 못 하고 쓰러졌다.

메라자이드가 흡족한 눈빛으로 시체가 된 신전 기사들을 쳐다봤다.

-신전 기사 셋이라. 앞서 잡은 넷까지 하면 총 일곱인가? 이 정도면 흡족한 성과야.

“좋아하기 전에 언데드 몬스터로 만들어.”

카엘이 옆에서 재촉했다.

-성미 급하기는.

“급한 게 아니라, 이미 다음 손님이 왔거든.”

-뭐?!

그때 예리한 오러가 메라자이드를 노리고 날아왔다.

-큭.

‘하는 수 없나.’

캉!

카엘이 나서서 오러를 막았다.

“호오. 내 검을 막다니.”

오러 공격을 펼친 소드 마스터 올리버가 감탄하며 보물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걸 본 메라자이드가 화들짝 놀랐다.

-어, 어느새.

언데드 몬스터들이 철수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마기의 연무를 거둔 탓에 미처 눈치채지 못한 거였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올리버가 입술을 핥았다.

“실은 카엘이라는 레오폴드의 결투 대리인을 찾아왔다가 신전 기사들을 봤거든. 보물을 둘러업고 가는 걸 베려고 했는데, 바로 찾을 줄이야.”

‘안 그래도 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리로 왔지.’

카엘은 원래 메라자이드가 신전 기사들을 해치는 걸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소드 마스터가 여기까지 찾아온다는 소리에, 그것도 그 소드 마스터가 올리버라는 소리에 자리를 피한 거였다.

‘다른 자들이라면 몰라도 올리버는 반드시 나를 죽이러 온 걸 테니까.’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피바람을 불러일으켜 얻은 살인마라는 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이거 제국을 어지럽힌 언데드 몬스터와 한 패였을 줄이야. 죽여 버릴 명분으로 충분하겠는걸.”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으면서.”

카엘이 차갑게 대꾸하자 올리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래. 원래라면 너밖에 못 죽였겠지만. 이 일이라면 그 망나니 왕자까지 함께 죽여도 황제라도 뭐라고 못 할 거야.”

올리버는 그 사실이 너무 기쁘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올리버가 간과한게 하나 있지.’

바로 카엘뿐만이 아니라, 올리버와 상성이 최악인 리치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거였다.

“자, 그럼. 어디 떠드는 것만큼 실력이 있는지 한번 볼까?”

카엘은 여유 있게 웃으며 도발했다.

그 말에 올리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흥! 곧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