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왕국의 보물 창고 (3)
“어, 저하?”
왕성에 도착하자 경비병들이 막아섰지만, 레오폴드는 막무가내로 들어갔다.
“어서 비켜! 급한 일이다.”
그러자 경비병들은 익숙하다는 듯 길을 열어 줬고 덕분에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금방 썼던 검은 내가 줬던 검이지?”
“네. 알고 봤더니 마검이더군요. 드워프가 확인하고, 봉인석을 제거해 줬습니다.”
“허, 마검이라니. 잠깐, 봉인석을 제거했다고?”
“멋대로 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준 거니 그건 상관없지. 다만, 마검의 봉인이 풀려도 괜찮은가?”
“검집 안에 넣어 두면 문제없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어, 그래.”
레오폴드가 관심을 보이며 걸음을 멈추자, 카엘이 아조트를 꺼내 들었다.
아조트는 검집에서 벗어나자마자 떠들었다.
-호호홋. 이제 나의 진가를 알게 된 느낌이 어때? 자신의 어리석음이 한탄스럽지?
“정말이로군.”
레오폴드는 놀란 얼굴로 중앙의 보석이 눈 모양으로 변한 아조트를 바라봤다.
레오폴드와 눈이 마주친 아조트가 은은한 마력을 뿜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너그러우니까, 다시 내 손을 잡으면 네게 대륙에 이름을 떨칠 힘을 주지. 어때?
“됐다. 내게 필요한 건 검이 아니라, 제국에 맞설 군대니까.”
-치, 재미없어.
아조트가 투덜댔다.
강인한 정신력 때문에 매혹에 실패한 거였다.
정작 레오폴드는 아조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엄포를 놓았다.
“그보다 넌 내 생명을 구해 준 보답으로 카엘에게 준 검이니 카엘에게 충성해라. 배신하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둘 테다.”
-에헤, 뭐야? 둘이 사귀는 거야?
철컥.
카엘은 아조트가 더 헛소리하기 전에 검집에 집어넣었다.
레오폴드도 민망한지 먼저 발걸음을 떼며 앞장섰다.
“가지.”
잠시 후.
둘이 도착한 곳은 왕성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철문 앞이었다.
중무장한 왕국의 호위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정작 레오폴드는 그 옆에 마련된 작은 건물로 향했다.
그 안에는 나이 지긋한 노기사가 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는데, 레오폴드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놨다.
“또 오셨습니까?”
“마들린 경, 박대하니 섭섭하오.”
레오폴드는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넉살 좋게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마들린은 그 모습이 더욱 못마땅한지 투덜댔다.
“매번 이 늙은이가 지키는 창고를 거덜 내려 하시니 경계할 수밖에 없지요. 그나저나 또 무슨 핑계로 창고를 털러 오셨습니까?”
“파프닐 경께 사죄의 선물을 드리러 왔다네. 이 친구가 대련 중에 상처를 입히는 바람에 말이지.”
“파프닐 경을 상대로 말입니까?”
소드 엑스퍼트를 이겼다는 말에 마들린은 놀란 얼굴로 카엘을 쳐다봤다.
“실례했습니다. 카엘 브리운이라 합니다.”
“뭐? 브리운이면…….”
“짐작한 대로 브리운 공작의 막내아들일세.”
“허. 그러니 그리 대단한 실력을 지녔나 보군요. 역시 사자의 아들은 사자인가…….”
“뭐, 어쨌든 들여보내 줘.”
“알겠습니다. 제가 또 혼나고 말죠.”
레오폴드가 조르자 마들린이 한숨을 내쉬며 백기를 들었다.
“어이, 문 열어.”
마들린이 밖에 대고 소리치자 철문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 철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철문이 열렸는데, 내부에도 지키는 기사들이 여럿 보였다.
‘이거 어지간해서는 훔쳐 가기는 힘들겠는데.’
“자, 뭐 해? 안 들어가고?”
카엘은 레오폴드의 재촉에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에는 금은보화로 된 장신구와 보물들은 물론, 그림과 조각 같은 예술품으로 가득했다.
“이쪽이야. 네가 찾는 건 이쪽에 있을 거야.”
레오폴드가 가리키는 쪽으로 들어가자 아조트가 검집 안에서 들썩였다.
카엘은 아조트를 살짝 뽑았다.
“왜 그래?”
-흥분돼서 그래요. 여기 강력한 마력을 가진 것들이 많이 느껴지거든요.
“그래? 현자의 돌은?”
-바로 저기 있네요.
아조트가 움직여 가리킨 곳에는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손톱만 한 크기의 붉은 조약돌이 있었다.
아주 작았지만, 그 내부는 살아 있는 심장처럼 꿈틀대며 뛰고 있는데, 현자의 돌이 분명했다.
“그건가, 필요하다는 게?”
“네.”
“어서 챙기고 돌아가자고.”
그 말에 카엘은 현자의 돌이 들어 있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다른 건 챙겨 갈 만한 게 없나?’
다음에라도 가져가려면 미리 아는 게 중요했다.
카엘이 두리번거리자 그 의도를 눈치챈 레오폴드가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더 털어 갈 기회를 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약속하신 겁니다.”
레오폴드에게 다짐을 받은 카엘은 문득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파프닐한테 줄 것도 챙겨야 하지 않습니까?”
“아, 맞다. 나가는 길에 아무거나 하나 줍지, 뭐.”
레오폴드는 그렇게 말하며 정말 돌아가는 길에 장신구를 하나 집어 들었다.
* * *
밤의 정원으로 돌아온 카엘은 브로칸과 모르타 앞에 현자의 돌을 꺼냈다.
“이게 현자의 돌이야.”
“생각보다 작네요.”
브로칸이 신기한 듯 들여다보며 냄새를 맡았다.
“작은 편이긴 한데, 약을 만드는 데는 충분해. 그럼 바로 만들어 볼까?”
“…저기, 카엘 님.”
잠자코 있던 모르타가 입을 연 거였다.
현자의 돌을 보자마자 기뻐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아 카엘도 이상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응? 무슨 일 있어?”
“혹시… 약을 만들자마자 먹어야 하나요?”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하루라도 빨리 낫고 싶지 않아?”
그 말에 모르타는 귀가 있던 자리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혼자만 낫고 싶진 않아서요.”
아무래도 언니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냉큼 회복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먹어도 돼, 급하게 정령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약이 통하는지 먼저 확인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 언니들한테 시험하는 것보다.”
“시험이요?”
“어, 약이 잘못 될 수도 있나요?”
브로칸도 놀랐는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만드는 방법은 알지만, 사용해 본 적은 없거든. 내가 어디서 확인해 보겠어?”
“아. 그렇죠. 그럼 어쩌지…….”
브로칸이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있을 때, 모르타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먼저 먹을게요. 제게 시험해 보세요.”
“잘 생각했어. 그럼 바로 만들지.”
카엘은 그리 말하고 엘프들을 위한 포션 제작에 들어갔다.
조제법은 다른 것보다 간단했다.
동그란 그릇에 마계의 벌레에서 자라고 있던 균을 채취한 소르다리오에 몇 가지 약재를 잘 섞어 놓은 다음, 가운데에 현자의 돌을 넣었다.
“이걸로 준비 끝.”
“그렇게 간단하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브로칸에게 카엘이 설명했다.
“여기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현자의 돌이 반응해 물질들을 변형하거든. 그걸로 포션을 만들면 돼.”
포션을 만든다는 말에 가방이 들썩였다.
자신의 마력이 필수적으로 들어가기에 가방 안에 묶여 있던 데비하이드가 반발한 거였다.
카엘은 무시하고 그릇 안에 데비하이드의 마력을 한 방울 떨어트린 다음, 얼른 뚜껑을 닫았다.
그 틈으로 잠깐 빛이 새어 나오다가 멈췄다.
카엘이 다시 뚜껑을 열자 내부는 반짝이는 가루로 가득했다.
그걸 본 브로칸의 눈빛도 반짝였다.
“이야. 금가루 같네요.”
“비슷해 보여도 달라.”
카엘은 라이프 베슬의 뚜껑을 열어 마력을 성배에 조금 붓고, 현자의 돌이 변형시킨 가루를 넣어 잘 섞은 다음에 작은 병에 나눠 담았다.
그중에 한 병을 모르타에게 내밀었다.
“자. 네 거야.”
“감사합니다.”
모르타는 두 손으로 포션을 조심스레 받아들고는 잠자코 바라봤다.
“…….”
카엘은 나머지 병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그거 증발하니까 마실 거면 얼른 마셔.”
“아, 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모르타는 눈을 감고 포션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
“어때?”
모르타가 포션을 다 마시고도 아무 말이 없자 브로칸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기분이 이상하고 가슴이 답답해… 윽.”
대답하던 모르타는 괴로운지 몸을 웅크리며 주저앉았다.
“카, 카엘 님?!”
그걸 보고 놀란 브로칸이 카엘을 쳐다봤다.
“잠깐, 지켜봐.”
카엘의 말과 동시에 모르타의 신체 내부에서부터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한군데로 뭉치더니 모르타의 전신을 훑듯 움직이다가 머리로 향했다.
얼굴의 좌우 귀가 있던 부분에 도착한 빛은 점점 밝아지더니 천천히 귀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은 사라졌지만, 모르타의 쫑긋한 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르타, 귀가…….”
브로칸의 말에 모르타는 자신의 귀를 만졌다.
“……?!”
원래라면 귀가 있던 흔적만 남아 흉측한 자국이 있는 곳에서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귀가 다시 생긴 거였다.
모르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러고는 새로 만져지는 귀를 잡고 몸을 웅크리며 흐느꼈다.
“으, 으… 으흐흐흑.”
브로칸은 그런 모르타의 어깨를 아무 말 없이 두드렸다.
겨우 진정한 모르타는 카엘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카엘 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평소 까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정말로 공경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보다는 제대로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큰 수확이었다.
‘이거라면 나중에 스승님을 고치는 것도 문제없어.’
카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은혜는 갚는 건 나중에 하고, 어디 한번 정령을 불러 보지?”
“나도 보고 싶어!”
브로칸의 말에 모르타는 고개를 끄덕인 후,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뭐라고 중얼거리니 주변에 산들바람이 맴돌았다.
분명히 문이며 창문이며 다 닫혀 있는데도.
그 와중에 모르타가 먼 곳을 바라보는 황홀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아, 들려요. 정령들의 목소리가.”
“난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고.”
브로칸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첫째인 노아나는 대지의 정령 같던데, 모르타는 바람의 정령인가? 기억해 둬야겠군.’
엘프는 대부분이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지만, 그 힘을 빌려 쓸 정도로 친한 정령은 대부분 한 가지 속성. 기껏해야 두 가지라고 했다.
나중에 알맞은 임무를 주기 위해서는 속성도 신경 써야 했다.
그때 모르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왜 그래?”
“바람의 정령들이… 전부 카엘 님에게 갔어요. 카엘 님이 좋은가 봐요.”
그 말에 짚이는 데가 있었다.
바로 빙한목의 열매.
“아, 내가 자연력이 높은 걸 먹어서 품고 있어서 그런가 봐.”
“……그렇군요.”
떨떠름한 모르타의 표정에 브로칸이 걱정했다.
“왜 그래?”
“카엘 님한테 질투 나서 그래. 기껏 정령과 대화를 하는데, 카엘 님한테 관심을 가지니까.”
“나는 안 들리니까, 잘 모르겠는데?”
“너는 바보니까.”
툴툴대는 모르타를 보며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정령들한테 그리 관심 가면 위험할 때 도와나 달라 그래.”
“…그러겠대요.”
모르타는 회복의 기쁨은 온데간데없는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더니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속삭이는 게 아닌가?
“그리고 저도… 카엘 님이 위험하면 도와드릴게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말하는 모르타의 귀는 새빨갰다.
아무래도 창피해서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한 모양이었다.
“어? 모르타, 귀가 빨개.”
“시끄러워!”
브로칸이 눈치 없이 지적하자 모르타가 빽 하고 소리쳤다.
그때 로사가 문을 두드렸다.
“카엘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바로 나와 보시지요.”
‘손님? 올 사람이 없는데?’
짐작 가는 사람도 없는 건 둘째 치고 로사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밖으로 나간 카엘은 왜 그랬는지 깨달았다.
국왕의 호위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국왕이 카엘을 만나야겠으니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으, 역시 혼내려나?’
너그럽기로 유명한 국 왕이었지만, 어제 그런 소란을 피웠으니 혼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막상 가서 만난 국왕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카엘 브리운, 작위를 내려 줄 테니 왕국을 위해서 일하는 게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