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왕국의 보물 창고 (1)
막상 카엘이 술 내기에 나서겠다고 하자 브로칸이 걱정했다.
“카엘 님, 어떻게 하시려고요?”
“숙취 약 먹으면 돼.”
카엘은 일전에 브로칸에게 줬던 호베니아 열매를 냉큼 먹었다.
카엘에게는 약효가 몇십 배나 증폭되는 만큼 이것만 먹으면 취할 일이 없었다.
“근데, 저 사람도 어인족이라서 술에 안 취한다면서요.”
“드워프도 취하는 술을 가져왔잖아.”
혹시나 해서 몇 병 챙겨 왔다.
그것도 제일 독한 거로.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재촉했다.
“뭣 하냐? 언제까지 이 발렌 님을 기다리게 할 거야?”
“아, 보니까 여기 술은 너무 약해서 배만 부르는 거 같아서요. 저한테 드워프마저 취하게 한 술이 있는데 이걸로 대결하죠.”
“푸하핫!”
발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폭소를 터트렸다.
“드워프마저 취하게 한 술이라고? 어려 보이는 녀석이 허풍도 잘 치는군.”
“보시면 알 겁니다.”
카엘은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 작은 잔에 따랐다.
“음? 너무 조금 아니야?”
발렌은 투덜거리다가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이 번쩍 뜨였다.
“우옷! 좋아! 이걸로 내기하지.”
“한 잔씩 마시는 겁니다.”
“너무 쪼잔한 거 아니야? 나는 이 잔에 마시겠다.”
발렌은 마시던 술잔에 드워프 증류주를 잔뜩 붓더니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흐. 맛 좋다!”
발렌이 술잔을 내려놓았을 때는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이제 제 차례네요.”
카엘은 발렌과 같은 크기의 술잔에 술을 부은 뒤, 깔끔하게 해치웠다.
“오! 제법인데? 그럼 다시 내 차례…….”
발렌은 감탄하며 자신의 술잔을 들었다가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털썩.
“어, 저 술고래가 쓰러지다니 대단한데.”
레오폴드 왕자는 놀라더니 술잔에 남은 술을 핥았다.
“크. 독하다, 독해. 이런 술은 어디서 구했담?”
“나중에 알려 드리죠.”
“좋아. 수고했어.”
고개를 끄덕인 레오폴드는 발렌의 뒤에 있던 일행에게 말했다.
“내가 이겼으니까, 알지?”
“…알았다.”
발렌의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렌을 데리고 사라졌다.
‘저들도 어인족이군. 안 그래도 찾으려고 했는데 수도에 오자마자 보다니 잘됐네.’
카엘이 그들을 유심히 보고 있을 때, 브로칸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거 마시고 취할 줄은 몰랐는데.”
“어인족은 술 성분을 인간보다 조금 빠르게 분해할 뿐이거든. 실제로는 술이 약한 편이야.”
“아하.”
“무슨 이야기 하고 있어? 이제 우리끼리 즐기러 가야지.”
레오폴드가 중간에 끼어들어 어깨동무하며 끌고 가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은화 하나를 술집 주인에게 튕겼다.
“주인장, 우리 애들 좀 챙겨 줘.”
“헤헷. 물론입니다.”
“그럼 우린 진짜 나가죠.”
밖으로 나온 레오폴드가 브로칸과 모르타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혼자 올 줄 알았는데, 둘이나 데려오다니 많이 친한가 봐?”
“믿을 만한 친구들입니다.”
“그래? 그럼 가지.”
레오폴드는 더 묻지 않고 앞장섰다.
“여기다.”
도착한 곳은 외관부터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호사스러운 주점으로, 커다란 덩치의 경비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밤의 정원이라.’
카엘이 주점 간판을 읽는 동안, 레오폴드를 본 경비원들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다들 잘 지내지?”
레오폴드는 싱글벙글 웃으며 경비원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맡는 것만으로 나른해질 것 같은 향긋한 냄새가 가득했다.
풀어지기 전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더욱 아찔한 차림의 여인이 다가왔다.
반쯤 헐벗은 차림의 여인은 곧바로 레오폴드의 팔짱을 끼고 교태를 부렸다.
“저하, 너무 오랜만에 오셨잖아요.”
“무슨 소리야? 로사. 그제도 왔잖아.”
“우리 사이에 매일매일 안 보면 오랜만인 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일행도 있으시네요. 어떤 방을 원하시나요?”
“조용한 방으로.”
“아, 네.”
레오폴드의 선택에 로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카엘과 일행을 훑듯이 바라봤다.
그 눈매가 얼마나 끈적끈적한지 카엘은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조트가 현실로 나오면 저럴까.’
“따라오시죠.”
로사의 뒤를 따르며 다른 방을 보니 얇은 천 너머로 반쯤 헐벗은 여성들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는 실루엣이 보였다.
정작 마담이 안내한 곳은 창문 하나 없는 외딴 방이었다.
“노는 방이 아니라 실망했나?”
“아닙니다. 그보다 여기에서 비밀회의를 하시나 봅니다.”
망나니로 위장한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어울리는 곳이 없으리라.
“엇. 그럼, 망나니가 아니야?”
카엘의 말에 모르타가 깜짝 놀라 중얼거리다가 당사자 앞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카엘이 미리 말 안 해 줬나 보군. 카엘도 짓궂은 면이 있단 말이야.”
레오폴드는 웃으며 카엘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서 이 친구들은 누군가? 카엘이 이렇게 데리고 온 걸 보면 그만큼 신뢰한다는 의미인데.”
“정말이요?”
“그랬나?”
레오폴드의 말에 브로칸이 눈빛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모르타는 시큰둥한 듯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걸 본 카엘은 웃으면서 두 사람을 소개했다.
“라이칸스로프인 브로칸, 이쪽은 엘프인 모르타입니다.”
“푸하핫! 라이칸스로프에다가 엘프?!”
“못 믿겠으면 제 본모습을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레오폴드가 폭소를 터트리자 안 믿는다고 여긴 브로칸이 먼저 자신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나섰다.
“괜찮네. 놀라운 일이긴 해도. 카엘이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예전에도 직접 보지 않으면 놀랄 일을 여러 번 보여 줬었거든. 아까 드워프 술이 어쩌고 했는데, 드워프도 만났나?”
“네. 안 그래도 드워프 왕국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렇군. 혹시…….”
레오폴드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이 무기를 제공하기로 했느냐고요? 했습니다.”
“대단한데. 난 단칼에 거절당했거든.”
역시 짐작한 대로 레오폴드도 예전에 드워프와 접촉했던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드워프들이 클리페우스성으로 이주하기로 했습니다. 라이칸스로프 일족도요.”
“이주까지? 어쩌다가?”
예상외로 큰일에 레오폴드도 많이 놀란 듯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양쪽 다 제국의 습격을 받고, 그 마수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서랄까요.”
“음.”
거기에 일조했던 모르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신음을 흘렸다.
한편 레오폴드는 카엘의 말에 탄식했다.
“제국의 습격이라니, 이게 다 왕국의 힘이 약한 탓이야. 그런데 이 엘프는?”
“드워프 왕국을 침입한 자 중 하나인데 전향했습니다.”
“전향이라…….”
레오폴드가 모르타를 쳐다보자, 모르타가 목소리를 높여서 항변했다.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로 카엘 님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요!”
“제국에 협박을 당한 거였습니다.”
브로칸도 옆에서 옹호했다.
“음. 협박이라… 그런 소문은 들었지만, 사실일 줄이야.”
아무래도 레오폴드도 나름대로 제국 쪽 정보를 듣고 있는 모양인 듯 바로 납득했다.
그러다가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런데 내 소문은 제국 측에 정확히 안 알려진 모양이군.”
“…네.”
“그대가 여행을 일찍 떠난 것도 제국의 대사 탓이었지.”
“그렇습니다. 혹시 어떻게 됐는지 들으셨습니까?”
이동 중 간간이 클리페우스성에 서신을 보내긴 했지만, 그쪽의 소식을 들을 길은 없었다.
“어, 듀리프 후작이 클리페우스성에 도착해서는 네가 없는 걸 보고 얼빠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밖에 별일은 없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카엘은 내심 안도했다.
“아직 거기 머물고 있다고는 하는데, 조만간에 왕국 사절단 준비를 위해 돌아온다는군.”
“아. 그렇겠군요.”
왕국에서 제국으로 사절을 보내는데 제국 대사인 듀리프 후작이 관여 안 할 리가 없었다.
보내는 인선이나 물품에 대해서 신경 써야 할 테니까.
“왜 무슨 일 있나?”
“사실 왕국 사절단에 끼어서 제국에 가려고 했거든요.”
“제국에?”
“네, 여기 협박당하고 있는 엘프들과 드워프들까지 구출해서 데려오려고 합니다.”
“오! 그거 좋지. 근데 그 전에 듀리프 후작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기껏 피해 왔는데 마주쳐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니. 이를 어쩐다.”
레오폴드는 드물게 웃음을 잃고 고민했다.
“뭐, 한 번 피했는데, 두 번은 못 피하겠습니까? 먼저 출발하면 되죠.”
“옳거니. 그것도 방법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저하께서 도와주셔야겠지만요.”
망나니로 소문 난 1왕자가 멋대로 제국으로 넘어가 버리면 막을 사람이 없을 터였다.
‘후작도 왕국에서 벗어나면서까지 쫓아오진 않을 테고.’
“하긴 나도 제국에 한번쯤 가 보고 싶었다네.”
“저하께서 흔쾌히 승낙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산할 게 남았습니다만.”
“그래, 아까 술 대결 말이지? 안 그래도 소원 내기에 이겼으니 뭐든지 들어주지.”
‘소원 내기를 하다니. 어인족들이 뭘 원할 줄 알고.’
내막을 아는 카엘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카엘도 알지 못하는 건 있었다.
“저하께서는 무슨 소원을 거셨습니까?”
“별거 아니야. 내가 부르면 와서 한 번 싸워 주기로 했어.”
레오폴드 나름대로 제국군과 전투할 때를 대비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카엘 자네는 뭐가 필요하나?”
“왕국의 보물 창고에서 잠깐 빌려 쓰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뭔지 모르겠지만. 사절단 준비할 때 빼돌려야 할 거야. 내가 너무 털었더니만, 경계가 심해졌더군.”
사절단을 준비할 때면 듀리프 후작이 돌아올 때라 너무 늦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타가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들어가서 훔쳐야…….”
“방법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오, 무슨 방법이길래? 어서 말해 보게.”
“굴욕적이긴 하나 제국의 기사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죄할 선물을 고른다는 명분이면 왕국의 보물 창고에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레오폴드는 왕국의 처지에 쓴웃음을 짓다가 문득 카엘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놀란 얼굴이 됐다.
“그나저나 제국 기사를 상처 입힐 거라니, 하나같이 강자들인데 자신 있는가?”
“물론입니다. 다음 연회 때 데려가 주십시오.”
“알았네! 근데 그 꼴로 갈 순 없으니 준비가 좀 필요하겠군. 로사!”
“준비요?”
카엘이 불길한 느낌을 받을 때, 로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타났다.
“이 친구 좀 부탁해. 이래 봬도 티겔 브리운의 아들이거든.”
“네? 정말인가요? 그럼 그에 걸맞게 제가 꾸며 드리죠.”
로사는 곧바로 의욕을 보이며 어디선가 줄자를 꺼내 카엘의 신체 길이를 재기 시작했다.
“그럼. 내일 데리러 올 테니까, 준비 잘하라고.”
다음 날.
오후 늦은 시간에 다시 찾아온 레오폴드는 혀를 찼다.
“이거 너무 느낌이 안 사는데?”
“네. 아무리 꾸며도 어색한 게 저하 같지 않아요.”
로사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입고 있는 형형색색의 장식이 달린 화려한 옷은 카엘이 봐도 너무 안 어울렸다.
“그냥 어두운 색으로 주시죠.”
“아니, 망나니처럼 화려하게 입어야지. 망나니끼리 의기투합했다는 게 제일 먹히기 쉽잖아. 이미 수도에 오자마자 이곳에 틀어박혀 향락에 빠져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걸.”
“저하께서 내신 소문인 거 같습니다만.”
“당연하지.”
웃으며 말하는 레오폴드에게 카엘이 제안했다.
“차라리 백면서생이라는 설정으로 가죠. 저하께서 시골 촌뜨기를 자기 손에 쥐고 휘두른다는 식으로 가는 게 저도 편할 거 같습니다만.”
“오. 그럴싸한데요?”
“그러게. 채택!”
로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레오폴드가 곧바로 결정했다.
그날 저녁.
레오폴드는 대저택에서 열리는 연회에 도착하자마자 망나니짓을 했다.
벌써 술에 심하게 취한 듯 술병을 휘두르며 소란을 피우는 거였다. 주변에서는 거기에 휘말릴까 봐 거리를 뒀다.
그런 귀족들을 보며 레오폴드가 비웃었다.
“이런 못난이들. 아니꼬우면 덤벼! 계급장 떼고 상대해 줄 테니까!”
“아, 물론. 내가 아니라 여기 클리페우스성 출신의 용맹한 친구가 손봐 줄 거야. 더러운 오크는 기본이고, 트롤까지 쓰러트렸다니까.”
“소드 마스터 티겔 브리운의 아들이랑 싸울 기회다 이거야!”
카엘은 그렇게 떠드는 레오폴드의 뒤에 얌전히 서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카엘을 안쓰러워하며 수군거렸다.
“저분이 브리운 공작의 자제? 기껏 수도까지 왔는데, 저하한테 붙들렸나 봐요.”
“평소보다 더 기세등등하니 조심해야겠군. 왜 저런 망나니랑 같이 다니는 거야.”
“쉿, 들리겠어. 저하께서 클리페우스성에 갔다 들었는데, 친해졌나 보지.”
“쯧쯧, 순진해 보이는데 나쁜 물이 들겠어.”
그때 레오폴드가 술병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다들 시끄럽다!”
“…….”
“이런 겁쟁이들! 여기 놈들은 죄다 겁쟁이야!”
레오폴드가 조롱하고 있으려니 구석에서 누군가가 파안대소했다.
“푸하하하핫!”
“뭐가 웃긴가?”
“저, 저하. 파프닐 경입니다. 제국의 명예로운 기사 파프닐 경이요.”
귀족 중 하나가 사색이 되어서 레오폴드를 만류했다.
다른 귀족들도 겁을 먹고 좌우로 비켜서자 단단한 체격에 여유 있게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레오폴드는 연기지만, 자신이 깽판 칠 때보다 더욱 겁먹은 귀족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하지만 카엘이 여기서 곧바로 반응하면 안 된다고 했지.’
레오폴드는 속으로 꼭 누르곤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파프닐 경이 여기 왜 있어?”
“저도 초대받았습니다. 저하, 제가 있는 걸 아셨다면 죄다 겁쟁이라 안 하셨겠지요.”
그 말에 레오폴드가 카엘을 슬쩍 쳐다봤다.
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폴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글세? 지금도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는 거로 봐서는 그대도 겁쟁이 같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