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분노의 숲 (2)
카엘의 말에 엘프들이 기겁했다.
“가, 간단하다니.”
“…너무해.”
“숲에 있는 정령들의 비명이 들리는 거 같아…….”
막내인 모르타는 귀가 있던 부분을 틀어막고 괴로워했다.
정작 카엘은 엘프들의 상태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령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더니 조금도 안 들리나 보군.’
그러면서 엘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설명했다.
“괜찮아요. 이 숲에 정령은 없으니까. 이미 죽어 있는 숲이거든요.”
“네? 그게 무슨 말이시죠?”
“…이해 안 가.”
“나무들이 저렇게 잔뜩 있는데요? 심지어 움직이고 있잖아요! 좀 이상하긴 한데 숲의 정령들이 함께해서 일 거예요!”
“숲의 정령이 아니라, 마계 벌레들이 움직이는 겁니다.”
“헉!”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못 믿겠으면 정령술을 한번 써 보세요. 쓰실 수 있죠? 저번에도 쓰셨으니.”
카엘은 노아나가 자신과 대적할 때, 정령술로 발을 묶었던 걸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브로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령술이요? 근데 귀를 다쳐서 정령의 말을 못 듣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앗.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정령술은 쓸 수 있어.”
“대화는 못 해도 말은 걸 수 있거든, 응답하는 건 정령의 마음이지만.”
“아. 그렇군요.”
엘프들은 잠시 눈을 감고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령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네요.”
“…나도.”
“어. 정말. 안 되잖아.”
“그렇다는 건?”
노아나는 어느새 새까맣게 타 버린 나무 근처로 갔다.
정말로 나무 옆에는 수없이 많은 마계 벌레의 흔적들이 보였다.
“정말 마계 벌레가 움직이는 거였군요.”
엘프들은 슬픈 눈으로 빠르게 불타는 숲을 바라봤다.
맹렬하게 타오른 불은 몇 시간 만에 꺼졌다.
숲을 모조리 불태워 버린 거였다.
움직이는 나무는 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요?”
“아니요. 나무는 불태워졌어도 마계의 곤충은 일부 살아남았을 거예요.”
츠츠츠츠츠.
카엘이 말하자마자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뭔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건 거대한 바위 같은 것에 더듬이와 수십 개의 다리가 달린 벌레였다.
“저게 원흉이군요. 저희가 해치우겠습니다.”
노아나의 말에 다른 두 자매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지금 상황에 분노한 거였다.
엘프들은 검을 뽑아 들고 마계 벌레에게 자신 있게 덤벼들었다.
정령술을 못 쓴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정령술은 어차피 보조, 오랜 시간 검술을 익힌 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파앗.
셋은 마계 벌레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뛰다가 지면을 박차고 세 방향으로 나뉘었다.
좌, 우, 위.
둘째 데키마와 막내 모르타가 좌우에서 옆구리를.
첫째인 노아나가 더듬이를 노렸다.
아쉽게도 세 자매의 공격은 마계 벌레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옆구리는 물론, 더듬이마저 끄떡하지 않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브로칸이 본모습을 드러내며 앞으로 나섰다.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지만, 껍데기에 생채기만 날 뿐 공격이 통하진 않았다.
“어, 카엘 님. 어떻게 하죠?”
“아랫부분이 약점이야.”
“뒤집어야겠네요.”
브로칸은 다시 마계 벌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마계 벌레의 다리 사이에서 나온 가시처럼 날카로운 돌기가 브로칸을 찌르려 했다.
“어이쿠.”
자세를 낮췄던 브로칸은 질겁하며 피한 뒤에, 다시 마계 벌레에게 달려들어 힘으로 뒤집었다.
“대단하시네요.”
“…우와.”
“멋져!”
엘프들의 감탄에 브로칸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딜.”
마계 벌레가 몸을 뒤틀면서 일어서려 하자 엘프들이 달려들었다.
이후 브로칸까지 가세해서 한참 공격을 퍼붓고 나서야 마계 벌레가 움직임을 멈췄다.
“드디어 해치웠네요.”
츠츠츠츠츠.
츠츠츠츠.
츠츠츠.
노아나가 말하자마자 사방에서 마계 벌레들이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하나는 은밀하게 접근해서는 카엘의 뒤를 노렸다.
츠츠츠.
그걸 본 브로칸이 소리쳤다.
“카엘 님, 위험해요!”
카엘은 진작 마검 아조트를 뽑아 들고 있다가 아조트를 휘둘러 마계 벌레를 깔끔하게 절단 냈다.
그러자 아조트가 목소리를 높이며 기뻐했다.
-오호홋. 이런 농후한 마력은 오랜만에 맛보는군.
‘역시 마기로 이뤄진 존재를 베면 마력을 흡수하나 보군.’
“이건 마검의 목소리?”
“…에고 소드.”
“처음 봐.”
엘프들이 놀라는 사이, 카엘은 접근하는 마계 벌레들을 하나둘 베었다.
“우리도 싸우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엘프들과 브로칸도 합심해서 마계 벌레들을 하나씩 맡아서 싸웠다.
한참 뒤.
수십 마리를 해치우고 나니 더는 움직이는 게 없었다.
-어때? 내 힘이 쓸 만하지 않아? 그러니 더는 이런 갑갑한 검집에…….
카엘은 아조트가 떠드는 걸 무시하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근데 여기서 무슨 약재를 찾을 수 있는 건가요?”
“안으로 들어가죠.”
노아나의 물음에 카엘은 대답 대신 앞장섰다.
수없이 많은 나무의 잔해와 수없이 많은 마계 벌레 사체를 뚫고 중앙으로 들어갔다.
가운데에는 아까 상대했던 거대 마계 벌레들의 사체가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마치 일부러 모아 놓은 것처럼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중앙에는 기이한 모양의 뭔가가 자라고 있었다.
“이건가요?”
“네. 이건 소르다리오라는 균류인데. 마계 벌레를 양분 삼아 자랍니다. 저게 마계 벌레는 조종한다는 말도 있죠. 어쨌든 이걸로 중요한 재료 하나는 구한 셈입니다.”
“와아!”
카엘의 말에 엘프들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이어진 카엘의 말에 바로 어두워졌다.
“이제 현자의 돌만 찾으면 되겠네요.”
“혀, 현자의 돌이요?”
“…말도 안 돼.”
“네? 그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
“정말 돌을 황금으로 바꾸는 건 없다고 알려졌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연금술을 연구해 온 강력한 마법사들은 비슷한 걸 만들어 냈습니다.”
“강력한 마법사라면… 제국의 전설적인 마법사인 라이즈만?”
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인간으로서는 그런 걸 만드는 데 한계가 있죠.”
“인간 마법사라 안 된다니… 설마 드래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카엘의 말에 엘프들이 화들짝 놀랐다.
“드래곤이 만든 현자의 돌을 어디서 구한다고요. 설마 드래곤 레어라도 들어가서 훔칠 생각은 아니겠죠?”
“…불가능.”
“그래요. 말도 안 돼요!”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스승은 레드 드래곤이 가지고 있던 현자의 돌을 훔친 적이 있었다.
물론, 대륙에 쳐들어오기 전 잠들어 있을 때였지만.
“그래도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요. 왕국의 보물 창고에도 현자의 돌이 하나 있다고 들었거든요.”
몬스터 대침공 이후, 왕국에서 제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조공품으로 썼다고 들었다.
그걸 뒤늦게 안 스승은 괜한 고생을 했다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
‘결과적으로는 소용없게 됐지만.’
“그런 거라면 문제없습니다. 저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훔쳐 오겠습니다.”
그 말에 카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왜 훔쳐요? 빌리면 되는데.”
제국에서 암살자로 일하다 보니 사고방식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빌려?”
“어떻게요?”
“제가 레오폴드 왕자를 좀 알거든요. 말만 잘하면 빌려줄 거에요.”
“와! 역시 대단하십니다. 공작가의 일원이라고 해도 어떻게 왕자와 친하죠?”
단순히 감탄하는 브로칸과 달리 엘프들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오폴드라고 하면 브리프니 왕국의 1왕자, 설마 그와 친한가요?”
“…망나니.”
“망나니에 난봉꾼이라 들었는데, 걱정이야.”
하나같이 레오폴드 1왕자를 망나니로 아는 듯했다.
‘제국 측에서 암살자로 활약했던 엘프들이 1왕자를 망나니로 알 정도면 위장이 안 드러났나 보군.’
카엘은 엘프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말했다.
“저만 믿고 이제 수도로 가죠.”
* * *
카엘은 드워프 왕국에 들렀다가 왕국의 수도인 킹스콧으로 향했다.
엘프들은 각각 따로 움직이기로 했는데 첫째인 노아나는 제국의 동향을 살피고 거짓 정보로 제국을 교란하기 위해 국경으로.
둘째는 드워프들이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을 때를 대비하겠다며 지하 왕국에 남았다.
막내인 모르타만이 따라가겠다며 두건으로 귀를 가리고 청년으로 분장했다.
드워프들은 수도로 출발하기 전에 보답이라며 보물 창고를 열어 금화를 잔뜩 챙겨 줬다.
보물 창고 내부를 보니 각종 희귀 광물뿐만 아니라 당연하게도 금도 잔뜩 있었다.
‘이러니 드래곤이 털어 갔지.’
그 뒤로 수도까지는 별일이 없었다.
수도 내부로도 무사히 들어왔다.
오가는 사람이 많아 허름한 세 여행자를 주목하는 일은 없던 거였다.
“와아! 신기한 게 정말 많네요.”
심지어 브로칸은 수도에 오자마자 이것저것 구경하며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라이칸스로프 마을에서만 살고 기껏해야 산골 마을에 내려온 게 전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 모습과 많은 물건을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놈이라 경비병들도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별거 없네. 제국의 수도가 훨씬 나아.”
모르타가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브로칸이 관심을 보였다.
“제국은 훨씬 더 대단해?”
“그럼.”
“와! 나도 한번 가 보고 싶다.”
“안 그래도 갈 거잖아. 그때는 내가 안내해 줄게.”
“아, 그렇겠네. 잘 부탁해.”
브로칸은 웃으며 모르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는 길에 둘은 제법 친해졌는지 서로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모르타가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죠? 왕성으로 가려 해도 이 꼴로는 힘들 거 같은데.”
“왕성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1왕자라면 아마도 술집에 있을 테니까요.”
“아.”
모르타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1왕자는 주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야. 여기서 내 생명의 은인을 보다니. 나 지금 취한 거 아니지?”
심지어 레오폴드 왕자는 카엘을 보자마자 친한 척하며 달라붙었다.
“취하신 건 확실합니다만, 헛것을 보고 계신 건 아닙니다.”
“그렇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신께서 도와주신 모양이야.”
“위기?”
“어, 나 한 번만 더 살려 줘. 저 친구랑 술을 누가 더 잘 마시나 내기했는데, 내 부하들이 다 뻗었지 뭐야.”
안 그래도 왕자의 호위 기사들은 모두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레오폴드가 앉아 있던 탁자 맞은편에는 투박한 얼굴에 배 나온 사내가 앉아 있었다.
문제는 카엘에게 낯익은 얼굴이라는 거였다.
‘발렌이잖아?’
그때 브로칸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음? 여기서 물비린내가 나는 거 같은데요.”
“맞아. 저 사람 어인족이거든. 어지간한 술에는 안 취할 거야.”
카엘이 조용히 설명했다.
그때 레오폴드가 칭얼거렸다.
“어떡할 거야? 나 대신 좀 마셔 줘. 옆에 부하들한테 시켜도 돼. 술 잘 마시게 생겼는데.”
“죄송합니다. 전 술을 못 마셔서요.”
“저도요.”
“푸하핫. 쓸모없는 부하들이로군.”
브로칸과 모르타가 단호하게 말하자 레오폴드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대신 저한테 하나 빚진 겁니다.”
“당연하지. 내 왕국의 보물 창고에서 원하는 거 하나 내어주지. 건국왕에 관련된 것 빼면 상관없어.”
레오폴드는 가볍게 왕국의 보물 창고를 털어 주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어인족하고도 터무니없는 약속을 한 모양이었다.
‘상관없지. 내가 이길 테니까.’
카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레오폴드에게 다시 한번 다짐받았다.
“약속하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