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라이프 베슬 (3)
“와! 이래도 소멸 안 되네요. 독하다, 독해.”
브로칸이 데스 나이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카엘에게 무차별적으로 얻어맞은 데스 나이트의 갑옷은 엉망진창으로 우그러져 있었다.
한마디로 고철 더미.
그런데도 아직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냥은 안 없어져. 소멸시키려면 성수라도 붓든가 해서 정화를 해야 해.”
카엘의 말에 데스 나이트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앗, 멈췄다! 아무래도 소멸하는 건 두려운 거 봐요. 그보다 저게 라이프 베슬인가요?”
브로칸이 중앙의 제단 위에 있는 원기둥 모양의 보석을 가리켰다.
내부에는 검붉은 액체가 가득 차 있는 데다가, 흉흉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어. 맞아.”
카엘은 다가가서 라이프 베슬을 들었다.
사람 팔뚝만 한 게 생각보다 컸다.
“그것도 철퇴로 후려치면 부서지나요?”
“그냥 내던지기만 해도 돼. 보기보다 많이 약하거든. 자.”
카엘은 그리 말하며 라이프 베슬을 브로칸에게 건넸다.
“어, 이거 제가 부술까요?”
“그래도 되는데, 잠시만.”
카엘은 제단 뒤쪽의 벽을 두드리면서 빈 곳을 확인하고 힘으로 벽을 박살 냈다.
그러자 새로운 공간이 나왔다.
‘스승님 말대로네.’
내부에는 작은 제단이 있었는데 그 위에 빈 라이프 베슬이 있었다.
다만, 그 크기는 기존 것보다 훨씬 작았다. 두께도, 길이도 기존 것에 비교해 절반도 안 됐다.
“어, 그건 뭔가요?”
“예비야. 라이프 베슬이 파괴당했을 때를 대비해 숨겨 둔 거지.”
카엘의 말에 데스 나이트가 자포자기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네크로맨서의 은신처에 도착한 데비하이드가 소리쳤다.
기껏 병력을 잔뜩 끌고 왔는데, 맞이하는 건 네크로맨서의 시체와 잔뜩 나뒹구는 스켈레톤의 잔해뿐이었다.
-벌써 다 도망친 건가?
도망친 건지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데비하이드는 이 침입자들이 도망쳤다고 단정했다.
“운 좋게 네크로맨서는 꺾었지만, 위대하신 데비하이드 님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 아니겠습니까?”
“데비하이드 님이 행차한다면 누구든 두려워할 수밖에 없죠.”
-그렇겠지? 대충 쓸 만한 것만 챙겨서 돌아가자.
데이 워커들의 추앙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데비하이드는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고는 네크로맨서에게 뼈만 남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남은 마력이라도 흡수해야지. 음……?
그런데 마력을 흡수하기는커녕 마력이 흘러 나가는 게 아닌가?
-어?
당황해하는 사이, 손가락 끝이 무너져 내렸다.
그걸 보며 데비하이드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존재하지 않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라이프 베슬이 깨진 건가? 대체 어느 녀석이?
분해하는 것도 잠시, 전신의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 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절규하던 데비하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소멸했다.
* * *
데비하이드의 짐작대로 카엘과 브로칸은 라이프 베슬을 내던져 박살 낸 참이었다.
안에 있던 검붉은 액체는 지면에 쏟아지자마자 증발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증발하네.’
그 검붉은 액체가 완전히 증발한 뒤, 예비 라이프 베슬에 새롭게 액체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앞에서 시커먼 게 뭉치더니 형체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해골이었다.
해골은 완전히 모습을 갖추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데비하이드 님의 라이프 베슬을 건드리다니 어떤 자식인지 몰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가만 안 두면 어쩌려고?”
-사지를 부숴 놓은 뒤, 눈과 손톱을 뽑고 피부를 벗겨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 줘야지.
“와, 그거 정말 무시무시한데?”
-뭐? 넌 누구…….
뒤늦게 누군가가 맞장구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치가 뒤를 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여기에 있지?
데비하이드는 정말 깜짝 놀랐다.
누가 침입해 라이프 베슬을 깨트렸다는 건 짐작했지만, 그 침입자가 예비 라이프 베슬을 숨겨 둔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설마 데스 나이트가 분 건가?’
절대로 배신 못 하는 존재지만, 순간적으로 그런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카엘은 데비하이드가 붉은 눈빛을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고 말했다.
“왜 데스 나이트 찾아? 걔 저기 있어.”
-음……? 어, 어떻게.
데비하이드는 카엘이 가리키는 곳을 봤다가 탄식했다.
고철 더미가 된 데스 나이트가 덜그럭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도 데비하이드는 침입자들에게 덤비지 못했다. 침입자들이 예비 라이프 베슬마저 부숴 버릴까 겁먹은 거였다.
-이, 일단 그것 좀 내려놓고, 우리 이야기 좀 하지.
“이야기 좀 하지? 말이 짧다?”
-…….
“이걸 확!”
-죄, 죄송합니다. 제발 그거 깨지만 말아 주세요.
브로칸이 예비 라이프 베슬을 던지는 시늉을 하자 데비하이드가 기겁하며 말렸다.
“왜? 이거 깨도 예비 하나 더 있잖아?”
-그걸 어떻게…….
데비하이드가 정곡을 찔렸는지 움찔했다.
이미 들은 대로였다.
회귀 전 스승은 라이프 베슬을 깬 뒤 부활한 리치를 잡아 예비가 있는 곳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또 소멸하기 전에 예비가 하나 더 있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상식적으로도 당연한 일이다.
목숨을 예비로 만들어 둘 수 있으면 누구라도 여러 개 만들어 둘 테니까.
다만, 부활하는 데도 마력을 소진하기에 한계는 있다고 했다.
당장 예비 라이프 베슬의 크기만 해도 훨씬 작았다.
‘눈대중으로 봐도 힘이 반의반으로 줄어든 건가?’
그래도 지금 마력도 매우 강했다.
“그러니까 깨도 되지?”
-아, 안 됩니다.
카엘의 말에 브로칸이 다시 라이프 베슬을 들어 올리자, 데비하이드가 기겁하며 말렸다.
“왜? 솔직하게 말하면 고려해 볼게.”
-…여기서 또 다른 라이프 베슬로 옮겨 가면 마력이 네크로맨서만도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것도 깨지면?”
-끝입니다. 자아를 유지할 정도의 마력이 안 되기에 예비도 소용없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긴 아무리 부활한다고 해도 자아가 없다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알겠다. 그럼 그 여분은 어디 있지?”
-이 제단 아래에 있습니다.
카엘은 바로 제단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그 바닥에서 작은 상자가 나왔다.
안에는 여분의 라이프 베슬이 들어 있었는데, 손가락 세 개 크기만 했다.
‘확실히 많이 작군.’
-정말이죠?
“그래, 정말이네.”
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브로칸의 손에 있는 예비를 뺏어 내던졌다.
와장창!
그걸 본 데비하이드가 기겁했다.
-아니,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뭐가 틀려? 어디까지나 고려해 본다고 한 것뿐인데.”
그러자 데비하이드는 새빨간 눈을 번뜩이며 화를 냈다.
-이 나를 갖고 놀다니 용서하지 않겠……. 으아아아악!
곧바로 소멸해 버렸지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분 라이프 베슬에 다시 마력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데비하이드가 외형을 갖춰 나갔다.
그런데.
“어, 왜 이리 작아졌어?”
아무리 힘이 줄었다고 해도 외형마저 작아지다니.
그것도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 정도만 했다.
-젠장! 젠장! 빌어먹을! 젠장! 빌어먹을!
아기 모습이 된 데비하이드는 씩씩대며 땅바닥을 쳤다.
“그만해. 더는 안 깰 테니까.”
-정말… 입니까?
데비하이드는 미덥지 못한 눈빛으로 카엘에게 물었다. 그래도 혹시나 또 라이프 베슬을 깰까 두려웠는지 말투는 공손했다.
“정말이야. 방금도 네 마력이 너무 강해서 깬 거야.”
-아하, 제가 원래 세긴 합니다.
“금세 우쭐하기는.”
브로칸이 데비하이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충 어떤 성격인지 알 거 같군.’
카엘은 그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새 몸을 움직여 보는 데비하이드에게 제안했다.
“대신 나한테 협조 좀 해 줘야겠어.”
-협조… 말입니까?
“그래. 그러면 라이프 베슬도 안 깨고, 다시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줄게. 당장 저 데스 나이트에게 있는 마력만 흡수해도 좀 살 만하겠지?”
그 말을 들은 데스 나이트가 움찔했다.
-성직자가 그래도 됩니까?
“성직자 아니야. 라이칸스로프랑 다니는 거 보면 몰라?”
-아!
아무래도 언데드 몬스터다 보니 브로칸을 보고도 위화감을 못 느낀 듯했다.
어쨌든, 데비하이드는 살아날 기회가 아직 있다고 여겼는지 적극적인 태도로 물었다.
-그런데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그 말에 카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 * *
카엘과 인간으로 변신한 브로칸이 톨레도성으로 돌아오자 프레데릭이 뛰쳐나와 반겼다.
“왜 이제 오십니까?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정말 목이 빠져라 기다린 모양이었다.
“리치가 있는 곳은 찾으셨습니까?”
“네.”
“잘하셨습니다. 당장에 주교님한테 말씀드려서 중앙 교회에 지원 병력을 보내 달라고…….”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설마, 리치를 해치우신 겁니까?”
“네. 소멸시키진 못했지만, 앞으로 이 근방에 언데드 몬스터가 나타날 일은 없을 겁니다.”
“대단하십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카엘은 프데레딕의 안내로 빠르게 톨레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욱. 욱.
그러다 신전 입구에 들어서니 등에 멘 가방에서 소리가 나면서 움찔댔다.
“음? 무슨 소리가…….”
프레데릭이 놀라는 걸 보고 가방을 툭 치면서 경고했다.
“조용히.”
그러자 가방이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카엘 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카엘은 얼버무리며 앞장섰다.
신전 중앙을 지나칠 때쯤, 데비하이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너무 괴롭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 여기 신전 안이라서 그래. 좀 참아.”
-신전?! 아니, 이런 미친 자…….
데비하이드의 목소리가 커지는 걸 보고 가방을 세게 쳤다.
퍽!
아무래도 신경 쓰였는지 프레데릭이 조심스레 물었다.
“가방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만, 뭔가요?”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묵고 있던 객실로 들어간 카엘은 가방을 열어 보였다.
그 안을 본 프레데릭이 깜짝 놀랐다.
“헉! 해골? 이거 언데드 몬스터 아닙니까?”
“네, 리치입니다.”
가방 안에 있던 건 아기 크기로 줄어든 리치 데비하이드였다.
“리치?!”
프레데릭이 뒤로 물러나며 경계했다.
그 반응에 데비하이드는 만족스러운 듯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래 위대한 리치 나 데비하이드 앞에서 두려움에 떨거라.
“시끄러워!”
푹!
브로칸이 데비하이드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해골이 부서져서 일부가 안으로 들어갔다.
-악! 안 그래도 마력이 부족한데.
데비하이드는 울상을 지으며 구멍이 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부서진 부분이 다시 메워졌다.
카엘은 그걸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브로칸에게 말했다.
“너무 세게 때리지는 마. 데비하이드도 얌전히 굴고.”
“아, 조심할게요.”
-힝.
그 광경을 보면서도 프레데릭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리치가 이렇게 초라한 존재였다니.
-크윽, 초라하다니.
굴욕적인 평가인 듯 데비하이드의 눈빛이 흐려졌다.
카엘은 품에서 라이프 베슬을 꺼내 보였다.
“리치의 마력이 담긴 라이프 베슬입니다. 본체는 깨트렸고, 이건 작은 크기의 여분입니다.”
-여분의 여분이지만…….
데비하이드가 구시렁거렸다.
“아, 여분이라 이렇게 작아진 거 군요. 근데 왜 이 녀석을 소멸시키지 않고 데려오셨습니까?”
“잠깐, 쓸데가 있거든요.”
“쓸데라…….”
프레데릭은 입을 닫고 생각에 잠긴듯했다.
‘역시 거부감이 심한가?’
신전 기사치고는 신실한 만큼 저 불경한 것이 한시라도 존재한다는 게 용납 안 되리라.
‘그래서 가능한 안 밝히려 했는데…….’
“아, 알겠습니다. 카엘 님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시겠죠.”
뜻밖에도 프레데릭은 그냥 넘어갔다.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뜻인가?’
심지어 걱정하며 진심 어린 당부까지 해 줬다.
“그래도 조심해 주세요. 다른 이들이 보면 난리가 날 테니. 특히 주교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바로 신상 앞에서 언데드 퇴치 기도를 하실 겁니다.”
그 말에 데비하이드가 움찔했다.
“잘 들었지?”
-야, 얌전히 있겠습니다.
“맞다. 프레데릭 님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혹시 신전에 성배가 있습니까?”
성배는 말 그대로 잔 모양의 성물을 뜻했다.
“음… 성배라. 아! 하나 있습니다.”
여긴 성물이 많아서 혹시나 했는데, 다행히 있었다.
‘없으면 신전마다 있는지 확인할 판이었는데.’
“원하신다면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프레데릭은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말했다. 사제들이 막아서도 힘으로 뺏어 올 판이였다.
‘가져다주기만 하면 나야 상관없지만.’
“근데 어디다 쓰시려고 하십니까?”
카엘은 작은 라이프 베슬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이걸로 약을 좀 만들려고요.”
-뭣이?!
카엘의 대답에 데비하이드가 기겁했다.
‘왜 저리 놀라? 조금만 빼 쓸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