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제는 알았다
레오폴드 왕자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눈이 내렸다.
클리페우스성은 금세 새하얀 눈에 뒤덮였다. 남은 겨울은 이 눈 안에서 웅크린 채 봄이 올 때까지 견뎌야 했다.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폭설에 뒤덮인 건 회색산맥도 마찬가지.
몬스터들의 활동도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 기간에는 비교적 몬스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 탓인지 뺨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임에도 성내 거리에는 훈훈한 기운이 맴돌았다.
약재 창고로 가는 길에 보니 다들 술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하나같이 즐거운 얼굴들이었다.
‘회귀 전에는 다들 웃는 모습이 그저 얄밉기만 했지.’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알았다.
끊임없는 몬스터의 위협 속에서 저렇게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아, 카엘 님!”
작은 강아지 두 마리를 안은 꼬마가 아는 체하며 다가왔다.
“이거 보세요. 우리 집 개가 강아지를 낳았어요.”
“그래. 귀엽구나.”
카엘은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강아지들은 자기들도 쓰다듬어 달라는 듯 세차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던 중 아줌마가 다가와서 수프를 권했다.
“아이고, 도련님. 옷이 왜 이렇게 얇아요? 얼굴도 파란 것 좀 봐. 이것 좀 드세요.”
“고마워.”
빙한목의 열매 덕분에 딱히 추위를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성의를 생각해 받았다.
한 숟갈 뜨니 몸뿐만 아니라, 마음 까지 따뜻해졌다.
“맛있네.”
“호홋! 감사합니다.”
아줌마가 칭찬받자 옆의 아저씨가 접시를 내밀었다.
“갓 구운 빵도 있으니 좀 드셔 보세요. 아직 따뜻합니다.”
“이건 과일 여러 가지 말린 겁니다.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드세요.”
다른 아줌마도 와서 바구니의 덮개를 들춰 보이더니 아예 주머니에 잔뜩 덜어 줬다.
모두가 친절했다.
이건 카엘이 몬스터 역병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앞선 전투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회귀 전 병약했던 카엘이 아무것도 못 할 때도 따뜻하게 대해 줬었으니까.
‘그때는 받기만 해서 미안하기만 했지.’
지금은 돌려줄 능력이 됐다.
카엘은 빵을 권했던 아저씨에게 물었다.
“최근 속이 더부룩하고, 자다가도 숨이 막혀서 깨는 경우가 잦지?”
“어,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라는 아저씨에게 처방전을 써서 건넸다.
“안색만 봐도 알지. 이거 들고 가서 하브로스한테 약 지어 달라 해.”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중의 한 소년을 보곤 말했다.
“너는 요즘 수시로 설사해서 괴롭지? 여기 배 아랫부분이 쑤시고.”
“앗, 맞아요!”
놀라는 소년의 모습에 웃으며 처방전을 써 줬다.
“가, 감사합니다.”
카엘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혹시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이리 와서 보여 줘.”
“와아아아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처음 수프를 줬던 아줌마가 그걸 보며 걱정했다.
“그러기에는 카엘 님이 너무 번거로우실 텐데…….”
“밥값은 해야 하잖아.”
카엘의 대꾸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카엘 님, 역시 여기 계셨네요!”
“어, 무슨 일이야? 훈련받는 시간 아니야?”
“지금 그럴 때가… 공작님이 급하게 찾으십니다.”
“급하게?”
속삭이는 소피아의 말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카엘은 사람들에게 이제 가 보겠다고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떴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소피아에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래? 심각한 일인 거 같은데.”
“아, 제국 대사가 이곳에 온다고 해요.”
“뭐?! 제국 대사가?”
카엘도 깜짝 놀랐다.
제국 대사는 말 그대로 왕국을 감시하는 제국의 눈.
거기다 현 제국 대사인 듀리프 후작은 그 임무를 몇십 년 동안 충실히 수행한 능구렁이 같은 자였다.
실제로 은밀히 제국에 반감을 품었다가 그의 눈에 걸려 제거된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설마 왕자의 계획이 들킨 건가?’
카엘은 문득 레오폴드를 떠올렸지만, 가능성은 적었다.
레오폴드의 계획이 들통났다면 회귀 전에도 난리가 났었을 테니까.
카엘이 누워만 있었어도 충분히 들렸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설마 왕자처럼 날 보러 온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집무실에 도착하니 티겔이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그래, 잘 왔다.”
“제국의 대사가 이리로 온다 들었습니다.”
“그래, 듀리프 후작이 며칠 내로 도착할 거라는구나.”
‘며칠 내라니.’
그렇게 가까이 와서 기별한다는 건 갑자기 들이닥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저하의…….”
티겔이 다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아니다. 알아본 바로는 너를 만나기 위해 온 모양이구나.”
“저를요?”
“아무래도 네 활약상이 대사의 귀에까지 들어간 거겠지.”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다니.
하긴 어린 나이에 오거를 쓰러트린 괴력과 성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신성력까지.
변방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허풍이라고 여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레오폴드가 관심을 보인 것처럼, 제국의 대사도 관심을 가질 만했다.
다만.
“굳이 이 먼 곳까지 행차해서 보려는 건. 단순히 궁금해서 보러 오는 건 아니겠군요.”
“그래. 직접 확인해서 네 활약상이 사실이라면 포섭을 하려 들 게다.”
“거절하면 제거하려고 할 테고요.”
“음…….”
다소 직설적인 카엘의 말에 티겔은 침음을 흘렸다.
진퇴양난이었다.
소문이 사실이면 사실인 대로 카엘더러 제국을 위해 일하라고 할 테고.
제안을 거절하면 제국에 반감을 품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래에 위협이 될 거라 판단하고 없애려고 할 테니까.
“어찌해야 할까 걱정이 태산이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음? 혹시 생각해 둔 거라도 있느냐?”
“듀리프 후작이 오기 전에 먼저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온다고 미리 기별하지 않았으니 떠났다고 해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아예 마주치지 않는다. 괜찮은 방법이긴 하다만…….”
티겔은 말을 맺지 못했다.
카엘의 말대로라면 도망치듯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가 보고 싶은 곳도 있고요. 저하를 뵈러 수도로 가 볼까 합니다.”
어차피 봄이 되면 모험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조금 당겨지는 것뿐이었다.
“…알겠다.”
“그럼, 출발 준비를 마치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는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게 좋다.
티겔이 카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선조께서 너를 지켜 주실 거다.”
“아버님도 돌아올 때까지 강녕하시길.”
* * *
해가 질 무렵.
카엘은 말을 타고 클리페우스성을 빠져나왔다.
짐을 싸는 동안 가족과 옥스와 네먼 등 친한 사람 몇몇에게만 작별 인사를 했다.
특히 소피아는 절대로 혼자 보낼 수 없다고 함께 가려고 하는 걸 떼어 내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다고 데려갈 수도 없으니까.’
앞으로의 여정은 위험하기도 위험할뿐더러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게 많았다.
끝없이 펼쳐진 대로를 따라 한참 달리고 나니 어느새 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산과 산 사이를 가로막고 세워진 성은 몬스터를 막아 내는 굳건한 제방처럼 보였다.
하지만.
몬스터 대침공 때는 저 철벽같은 성도 무너졌다. 저 높은 첨탑도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불타올랐다.
그게 회귀 전 허름한 짐마차 뒤에 실린 채로 도망치며 본 클리페우스성의 마지막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병약했던 몸뚱어리는 건강해지다 못해 약빨이 잘 듣는 신비한 체질로 바뀌었다.
망나니의 가면을 쓴 왕자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 대침공에 대비할 시간도 아직 남아 있다.
‘무엇보다 어머니도 병으로 돌아가시지 않도록 할 테니 아버지도 건재하시겠지.’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당장 해야 할 건 포션 만들기인가?’
일반적인 약과 달리 포션은 빠르고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것 때문에 카엘은 몬스터 대침공 시절 대활약할 수 있었다.
포션으로 전사의 능력을 강화할 뿐만이 아니라, 전투 중에 다쳐도 회복 포션으로 곧바로 다시 싸울 수 있게 만들었다.
그 포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포션 원액을 만드는 데 필요한 리치의 라이프 베슬.
다른 하나는 드워프만이 만들 수 있는 포션을 담을 병.
‘그 둘을 쉽게 얻으려면 역시 라이칸스로프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안 그래도 라이칸스로프 마을로 찾아갈 예정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한참 달리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카엘은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지고 나서야 말을 멈췄다.
워낙 척박한 땅이라 근처에 마을도 없어 적당히 노숙할 생각이었다.
‘추위를 안 타니 편하군.’
불을 피울 필요도 없이 짐승의 습격에 대비하기만 하면 됐다.
잘 준비를 마친 카엘은 자리에 누워 다음 목적지를 생각했다.
‘일단 듀리프 후작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여기서 서쪽으로 빙 둘러 가야겠지. 해가 뜨자마자 내내 달리면 이틀 안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으려나?’
워낙 척박한 땅이라 마을이 드문드문 존재했다.
덕분에 오가는 행상도 별로 없어 클리페우스성에는 항상 물자가 부족했다.
아무리 몬스터가 없다고 해도 겁먹고 오지 않는 거였다.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데 말이지.’
“으악!”
저 멀리서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
“…….”
조용하고 평화롭다 하자마자 비명이 들리다니.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카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귀를 기울였다.
“몬스터다!”
‘몬스터? 여기에 몬스터가 있다고?’
“이런 젠장. 몬스터의 습격이다!”
“다들 빨리 일어나! 고용주부터 보호해.”
다급한 목소리가 연신 들렸다.
들리는 소리만으로는 듀리프 후작 일행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행상과 그를 호위하는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일단 가 보자.’
행상인 걸 안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클리페우스성까지 오는 행상이 적은데, 몬스터에게 털렸다는 소문이 돌면 아예 사라질지도 몰랐다.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간 카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뭐야? 고블린이잖아.’
용병들이 애먹고 있는 몬스터는 고블린에 불과했다.
‘아무리 몬스터를 상대할 일이 없다고 해도 고블린한테 애먹다니…….’
한심했지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카엘은 도와주기 위해 검을 뽑아 들고 나섰다.
* * *
“무슨 일이야?”
난데없는 소리에 깬 맥킨더는 마차를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노랑 안광이 번뜩이는 몬스터가 소리치면서 용병들과 싸우고 있던 거였다.
몬스터는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끔찍한 몰골로 악다구니 쓰며 덤비는 게 무시무시해 보였다.
“저, 저것들은 뭔가?”
“고블린입니다.”
마침 마차 근처에 있던 용병대장 콜트가 알려 줬다.
“고블린? 이 근처에는 몬스터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고블린은 산속 깊은 곳 어디서든 나오긴 합니다. 이렇게 대범하게 습격해 오는 일은 없습니다만. 그보다 위험하니 안에 들어가 계시죠. 여차하면 도망가야 하니까요.”
“그 정도로 많이 위험한가?”
맥킨더는 불안한 마음에 묻고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용병들은 확실히 고블린에게 밀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키에에엑!”
괴성과 함께 고블린이 날아오더니 바로 앞에 떨어졌다.
“이크.”
놀란 맥킨더는 얼른 마차 문 뒤로 숨어서 물었다.
“콜트, 고블린이라는 것들은 날아다니기도 하나?”
“그럴 리가요. 그보다 이거 죽었는데요.”
그 말이 시작이었다.
“키에엑!”
“키키에에에엑.”
“켁!”
고블린의 비명이 연달아 들리더니, 고블린들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야?”
“뭘 저리 겁내지? 고블린들이 저런 거로 겁을 집어먹진 않는데, 설마 더 강한 몬스터라도 나타난 건가?”
“강한 몬스터?! 오크, 아니 오거라도 나온 건가?”
긴장한 맥킨더가 마른침을 삼켰을 때, 달빛을 머금고 있던 구름이 비켜서면서 고블린을 쫓던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사람?’
고블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 보였던 것뿐 실제로는 사람만 했다.
그 사람은 고블린들이 완전히 도망쳐 버린 뒤에 다가와서 물었다.
“다들 괜찮으시죠?”
“헉!”
피를 뒤집어쓴 채 악귀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짓는 모습에 다들 숨을 멈췄다.
금방 상대한 고블린보다 훨씬 무서웠기 때문이다. 안 괜찮다고 하면 정말 안 괜찮게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
맥킨더와 콜트, 용병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카엘은 안도했다.
‘다들 괜찮다니 다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