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19화 (19/234)

19화 망나니 왕자 (3)

어느새 트롤은 레오폴드 바로 앞.

이대로라면 트롤의 거대한 손에 레오폴드의 얼굴이 박살 날 게 분명했다.

“젠장!”

카엘은 지면을 박차고 트롤에게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보검으로 트롤의 팔을 자르려고 했다가 멈췄다.

레오폴드가 피를 뒤집어쓰면 몸은 마법 갑옷이 막는다고 해도 무방비인 얼굴이 위험했다.

‘그렇다면!’

푹!

카엘은 트롤의 가슴팍에 보검을 꽂은 뒤, 양손으로 트롤의 팔을 잡아 꺾었다.

두둑!

“크릉!”

이번에는 트롤도 고통스러운지 안 그래도 일그러진 얼굴로 인상 쓰며 몸부림쳤다.

문제는 낭떠러지 바로 앞이라는 거였다.

“야, 잠깐…….”

카엘은 트롤을 밀어냈지만, 이미 허공이었다. 게다가 가까이 있던 레오폴드마저 휘말렸는지 떨어지고 있었다.

‘좀 피하지.’

슝!

떨어지며 아래를 보니 까마득했다.

이대로 추락하다 바닥에 부딪히면 살아남기 힘들어 보였다.

‘어떻게든 해야 해.’

절벽으로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허리에 찬 단검으로도 길이가 모자랐다.

‘남은 건 물주머니 정도인가? 아! 물을 쓰면 되겠다!’

카엘은 일단 바로 옆에서 추락 중인 레오폴드를 잡았다.

어째 조용하다 싶더니 기절해 있었다.

‘하긴 괜히 발버둥 치는 것보다 낫나?’

카엘은 그리 생각하며 다른 손으로 물주머니를 꺼내 앞으로 뿌렸다.

그 물이 앞으로 뻗어 나가는 동시에 손끝으로 빙한목의 냉기를 발산했다.

물이 절벽에 닿는 것과 동시에 얼음이 됐다.

추락에 제동을 건 거였다.

‘됐다.’

콰직!

그러나 얼음은 곧바로 부서졌다.

카엘에게는 그 짧은 순간을 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몸을 절벽 쪽으로 틀어 한 손으로는 절벽을 움켜쥐고, 양 발끝을 박아 넣었다.

덕분에 추락을 멈출 수 있었다.

괴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쾅!

큰 소리에 밑을 보니 트롤이 지면에 추락해 박살이 나 있었다.

카엘이 멈춘 곳은 지면에서 십여 미터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

조금만 더 늦었으면 같은 꼴이 될 뻔했다.

‘얼마나 떨어진 거지?’

위를 보니 까마득했다.

‘많이도 떨어졌네.’

못 올라갈 건 아니지만, 이 상태로 레오폴드를 들고 올라가긴 불편했다.

‘일단 내려가서 업든지 해야겠어.’

푹! 푹! 푹!

한 손에는 레오폴드를 들고, 나머지 손발을 힘으로 벽에 찔러 넣는 식으로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으으.”

지면에 도착하니 망나니 왕자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으.”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괴로워하던 레오폴드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지?”

“트롤과 싸우다가 떨어졌습니다.”

“그랬지… 트롤은?”

“저기 죽어 있습니다.”

카엘이 트롤의 사체를 가리켰다.

트롤의 사체는 추락의 충격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군. 우리는 어찌 운 좋게 살았나? 그래 봐야 난 이대로 끝이겠지만.”

레오폴드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어디 다치시기라도 했습니까?”

크게 다친 부분은 없어 보이는데, 내장이라도 다친 건가?

카엘이 막 살펴보려는데 레오폴드가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 실수로 트롤의 피를 삼켜 버렸네…….”

“아.”

왜 기절했나 했는데 그 뜨거운 트롤의 피를 삼켜서였던 모양이었다.

‘근데 바로 안 죽은 걸 보니 내혈을 마신 거 같은데?’

트롤의 피는 외혈과 내혈로 나뉜다.

고온이라 쇠를 녹이고 자신의 피부마저 변형해서 딱딱하게 만든다고 알려진 쪽이 외혈.

실제로 심장을 오가는 피를 내혈이라고 한다.

내혈도 뜨거운 편이긴 하지만, 외혈 정도로 고온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 몸을 유지하기 힘들 테니까.

거기다가 사람의 입안은 어지간한 고열은 견딜 수 있었다.

‘잠깐, 입안이 헐 수는 있겠지만. 그거 마셨다고 죽진 않지.’

“몸도 굳는 게 점점 최후가 다가오는 듯하군…….”

“굳어요? 아.”

카엘은 놀라서 레오폴드를 살폈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레오폴드의 말대로 심장이 점점 멈춰 가고, 체내의 피가 식어서 몸이 굳어 가는 건 아니었다.

겉면에 새파랗게 맺힌 얼음만 봐도 카엘의 냉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얼음 송곳을 만드느라 강렬한 냉기를 발산했을 때, 잡고 있던 레오폴드도 살짝 얼려 버린 건가.’

어찌 됐든 죽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동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비밀리에 준비해 놓은 걸 알려 주겠다. 내가 죽거든 찾아서 왕국을 위해 써 다오. 아니, 적어도 이곳을 위해 써도 좋다. 그것만으로 왕국은 안정될 테니까.”

‘안 죽는다니까요.’

…라고 말하려던 카엘은 입을 꾹 닫았다.

원래 레오폴드에게 알아내려던 걸 본인의 입으로 듣게 됐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레오폴드는 하나둘 읊기 시작했다.

왕국의 창고에 기록되지 않은 보물을 모아 놓은 장소.

비밀리에 키우는 기사단.

숨겨 둔 보급품의 위치.

등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참 뒤.

말을 마친 레오폴드가 물었다.

“…다 기억하겠는가?”

“네, 기억했습니다.”

머리에 꼭꼭 박아 넣었다.

“그래, 그럼 이제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겠군.”

“죽는다니요? 돌아가셔야죠.”

카엘의 말에 레오폴드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곧 죽는다니까.”

“저하께서 삼킨 건 트롤의 내혈입니다. 내혈은 뜨겁긴 해도 조금 삼켰다고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외혈을 삼켰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이제 입안은 안 뜨거우시죠? 아마 경미한 화상만 입었을 겁니다.”

“그렇군. 어쩐지 계속 말하면서도 안 아프다 싶었지.”

레오폴드는 뻘쭘한 얼굴이 됐다.

그럴 만도 했다.

죽는다고 생각해 온갖 비밀을 다 떠벌렸으니까.

레오폴드는 민망한지 주위를 살펴보더니 화제를 돌렸다.

“여기는 절벽의 중간 지점 같군. 나갈 길은 이 위쪽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근데 어떻게 돌아갈 생각인가? 구조대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이렇게요.”

푹.

카엘은 절벽에 발끝을 꽂았다.

레오폴드가 혀를 내둘렀다.

“어마어마한 힘이군. 하긴 아까 트롤도 힘으로 제압했었지. 여기 떨어지고도 무사한 것도 자네의 괴력 덕분이겠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내 무조건 자네 말에 따르지. 뭘 해야 하나.”

“저하를 업고 올라가려는데, 안전을 위해 서로 몸을 묶을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게 좋겠지.”

레오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옷가지를 길게 뜯었다.

뜻밖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트롤에게 맞고 나뒹굴고, 피를 뒤집어쓴 탓에 너덜너덜해졌다고 해도 왕자가 자기 옷을 쓰라고 손수 찢다니.

다만.

“밧줄이 있습니다만.”

“…그렇군.”

기사들은 보통 안 챙기지만, 옥스에게 레인저 훈련을 받은 카엘은 간단한 도구들은 챙겨 다녔다.

길진 않아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충분했다.

‘아, 맞다.’

올라가기 전에 챙겨야 할 게 있었다.

“저하, 트롤의 가죽을 벗겨 내는 데 저 검을 좀 써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다.”

레오폴드가 시원스레 허락했다.

카엘은 곧바로 트롤의 등에 꽂혀 있는 보검을 뽑아 트롤의 딱딱한 가죽을 벗겨 냈다.

‘검이 잘 들긴 잘 드네.’

트롤의 가죽은 울퉁불퉁해서 오거 가죽처럼 통째로 갑옷으로 만들긴 힘들지만, 보완재로써는 훌륭했다.

‘진짜 찾는 건 그게 아니지만.’

적당히 멀쩡한 부분만 챙긴 뒤, 허벅지와 팔뚝을 베어 냈다.

가죽 안의 외혈이 어느새 차갑게 식어 딱딱한 고체가 됐다.

이 트롤의 외혈을 쓰면 용암에 버금가는 고화력을 낼 수 있어 대장장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재료였다.

카엘은 그걸 긁어서 주머니에 최대한 집어넣었다.

“다 됐습니다. 이제 업겠습니다.”

“알겠네.”

카엘은 레오폴드를 업고 밧줄로 둘의 몸을 묶었다.

그런 다음 절벽을 붙잡고 성큼성큼 올라갔다.

‘아까보다 수월하긴 한데 올라가려면 한참 걸리겠네.’

“…….”

“…….”

“혹시 내가 말을 걸면 방해되겠나?”

레오폴드는 가만히 업혀만 있다 보니 심심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한참은 더 올라가야 하니까요.”

“알겠네. 근데 그대는 내가 말한 진실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더군.”

‘아, 그러고 보니.’

레오폴드가 망나니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회귀 전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까 레오폴드가 죽음을 앞두고, 고백할 때 너무 당연한 듯 받아들이긴 했다.

‘1왕자가 하는 말을 안 까먹느라고 그런 거였지만.’

카엘은 적당히 둘러댔다.

“놀라긴 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법도 하다 싶었습니다.”

“그래? 그대는 내가 왜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다고 생각하는가?”

“제국의 견제 때문이겠지요.”

“…그렇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에게 욕먹는 망나니가 후계자라면 제국에서도 안심할 테니까.”

레오폴드의 말대로 제국은 왕국이 군사력을 키우는 걸 여러모로 경계했다.

그 때문에 왕국은 과거부터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우려고 했고, 제국은 그걸 눈치챌 때마다 왕국을 압박했다.

수백 년 동안 반복된 역사였다.

제국이 그렇게 경계하면서도 왕국을 완전히 점령하지 않는 건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왕국을 점령하면 제국이 몬스터를 막아 내야 하는데, 그 때문에 실익이 적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모순적으로 이곳의 몬스터 때문에 왕국이 유지되는 상황.

‘확실히 제국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지.’

몬스터 대침공이 벌어지고 왕국이 무너지니까 제국에서도 국경 방어에 애를 먹는다는 소식이 들렸으니까.

정작 몬스터들이 제국까지 쳐들어갔다는 이야기는 회귀 전까지 듣진 못했지만.

어쨌든 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건 오래전부터 내려온 왕국의 염원.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 레오폴드는 주변의 비난을 감수하고 망나니 왕자를 연기한 거였다.

“왕국을 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당당한 나라로 만드는 게 내 목표다!”

레오폴드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카엘은 별다른 감흥을 못 받았다.

제국의 눈을 가리고 방심시켜 결정적인 순간에 진면목을 보이려는 작전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전에 몬스터 대침공이 일어났다는 거였다.

레오폴드가 준비한 군대도 제국과의 일전을 벌이기 전에 몬스터들과 몇 번 싸우다 전멸했다.

“그 전에 이곳의 방비가 얼마나 튼튼한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레오폴드도 장벽 너머의 몬스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떠셨습니까?”

“대단했다. 군기는 엄정하고 실력 또한 왕국의 정예 병사에 못지않았지.”

칭찬이긴 한데 마냥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확신했다. 공작이 건재한 이상 이곳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이런 결론이 나와 버릴 테니까.

이대로는 클리페우스성을 도와주기는커녕 성의 전력마저 빼 가려고 할지도 몰랐다.

‘오히려 반대로 해야 하는데.’

아니, 카엘은 반대로 왕자의 세력을 이용해 몬스터 대침공을 막을 작정이었다.

‘적어도 몬스터 대침공 때까지는 제국에서 왕국을 침공한 적이 없었으니.’

“그대는 궁금한 게 없나?”

한 가지 있긴 했다.

“저하, 아까는 왜 그리 무모하게 트롤에게 덤볐습니까?”

“…….”

잠깐 망설이던 레오폴드가 입을 뗐다.

“아무래도 전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전사처럼 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왕자가 내 환심을 사려고 강한 척했다는 건가?’

영광이긴 하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보다 아까 이야기한 것들은 비밀로 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그런 보물을 남들과 공유하다니,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필요할 때 내가 써먹으면 몰라.’

“맞다. 내 목숨을 구해 준 보답도 해야지. 뭘 원하는가. 내게 가능한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네.”

카엘은 살짝 민망했다.

이쪽은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먼저 보답하겠다 말하다니.

“…….”

“사양 말고 말하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괜찮으니.”

왕자의 것 중 탐나는 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당장 트롤도 벨 수 있는 보검도 탐났고, 희귀한 마법 갑옷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요구할 건 그거지.’

이게 받아들여지면 왕자를 만난 1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카엘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하의 군대를 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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