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17화 (17/234)

17화 망나니 왕자 (1)

“크취익!”

오크 워리어가 잘린 손목을 부여잡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이크, 그래도 저거로는 안 죽겠지?’

카엘은 내심 걱정하면서도 오크 워리어를 걷어차 쓰러트리고 목에 검을 겨눴다.

“내 승리다.”

“크취익.”

오크 워리어도 대충 알아들은 듯 고개를 숙이며 목을 길게 뺐다.

졌으니까 목숨을 거둬 가라는 의미인 거 같았다.

확실한 패배 인정.

목적을 달성한 카엘은 목에서 검을 뗐다.

“취익?”

고개를 든 오크 워리어가 왜 안 죽이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죽일 거면 애당초 손목만 자르고 넘어가지 않았지.’

손목까지 자를 생각도 없었지만.

결투가 마무리된 뒤, 불명예스럽게 승자를 공격하는 부하들을 막아 주기만 하면 됐다.

“크취익.”

“크췩!”

다른 오크들이 성질을 내며 덤벼들었다.

그러자 카엘의 의도대로 오크 워리어가 부하들을 막아섰다.

옥스가 질린 얼굴로 물었다.

“어, 어떡합니까?”

“일단 피해야지. 가자.”

카엘이 먼저 발걸음을 뗐다.

캉! 캉!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오크들의 고함과 강철이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크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거였다.

문제는.

‘생각보다 더 시끄럽네.’

어찌나 시끄러운지 숲을 울릴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무슨 일인가 하고 다른 오크들이 몰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옥스, 속도를 더 내야겠어.”

“아, 맡겨만 주십시오.”

옥스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지금까지는 빙한목을 찾으며 이동하느라 느렸지만, 레인저 조장이 돌아가는 길을 선도하자 몇 배나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장벽에 도착했다.

“오늘 둘 다 고생했어.”

“막내 도련님도 대단하셨습니다. 오크 워리어를 그렇게 쉽게 해치우다니.”

“네. 멋진 기술이었습니다. 더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야! 그런 말을 하면…….”

네먼의 말에 옥스가 기겁했다.

카엘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럼. 투실라고라는 것 좀 찾아줘. 얼음이 언 곳을 뚫고 싹을 틔우는 거 있잖아.”

“아, 뭔지 압니다.”

“헤헷, 저는 좀 바빠서…….”

“뭐? 이제 술 마시러 갈 거라며.”

“이 자식이, 그걸 말하면 어떡해?”

내빼려던 걸 들킨 옥스가 네먼을 나무라면서 눈치를 봤다.

카엘은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은화를 꺼냈다.

“나도 맨입으로 부탁하려던 건 아니었어.”

“앗! 카엘 님이 필요하시다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옥스는 헤실거리며 은화를 낚아채려 했지만, 그 전에 카엘이 손을 뺐다.

“구해 오면 줄게.”

“헤헷. 그게 맞긴 하죠. 바로 구해 오겠습니다! 먼저 가져오는 사람이 받는 거다!”

옥스는 네먼에게 선언하고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경쟁하라고는 안 했는데.”

카엘은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서 은화 한 닢을 더 꺼내 네먼에게 건넸다.

“자, 받아.”

“못 받습니다. 그보다 이런 큰돈이 어디서 나셨습니까?”

은화 1개면 평민들의 한 달 생활비로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내가 잡은 오거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고 남은 만큼 값을 치러서 받은 거야.”

“그런 귀한 걸.”

“두 사람한테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주고 싶었거든.”

“아.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먼은 고개를 숙이고 은화를 받았다.

* * *

다음 날 저녁.

카엘의 앞에 투실라고를 잔뜩 쌓아 놓은 바구니가 놓였다.

“오, 빠른데?”

“조원들을 이끌고 종일 찾아 온 겁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죠?”

“그래. 고생했어. 조원들이랑 찾은 거면 이걸로 조원들에게 한턱내야겠네?”

“헤헷, 그래야죠.”

카엘이 은화 한 닢을 건네자 옥스가 입이 찢어질 듯 기뻐하며 뛰쳐나갔다.

그러고 얼마 안 되어서 네먼이 투실라고 바구니를 가져왔다.

“생각보다 빨리 모았네? 고마워.”

“부하들이랑 훈련장을 한 바퀴 돌면서 찾으니 쉽더군요. 그나저나 옥스도 다녀갔습니까?”

“어. 은화 줬더니 좋다고 가더라. 조원들한테 한턱낸다네.”

“그럼. 저도 부하들 데리고 합류해야겠습니다.”

네먼도 그리 말하며 자리를 떴다.

혼자가 된 카엘은 준비해 둔 약재와 도구들을 보며 손을 비볐다.

“그럼 이제 만들어 볼까?”

먼저 투실라고를 우묵한 용기에 부어 작은 방망이로 빻았다.

그러자 독특한 향과 더불어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통. 통. 통. 통.

빻을수록 투실라고에서 점성이 있는 진액이 나왔다.

‘이 정도면 됐겠지.’

거기에다가 붉은 수액을 섞었다.

네먼과 옥스가 투실라고를 채집할 때, 카엘도 가만히 있지 않고, 코너스 나무에서 긁어모은 거였다.

완전히 섞은 뒤 장갑을 끼고 오거 주머니에서 빙한목 열매를 꺼냈다.

빙한목 열매는 여전히 강력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걸 그대로 방금 만든 점액에 담그자 치이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다시 빙한목 열매를 꺼내니 표면에 얇게 붉은색 점액이 입혀졌다.

“됐다.”

이 막이 빙한목 열매를 삼켜도 바로 얼어붙지 않도록 막아 줄 것이다.

‘그럼, 더 기다릴 거 없이.’

카엘은 빙한목 열매를 입안에 넣었다.

단번에 삼키려니 알맹이가 커서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들었다.

괴로워도 깨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대로 얼음덩어리가 될 테니까.

잠깐 애를 쓰다가 간신히 꿀꺽 삼켰다.

잠시 후.

체내에 시원한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웃!”

손발이 얼음장같이 차갑다고 생각했더니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약효가 센데?’

체질 탓에 약효가 증폭되는 건 알았지만, 스승이 알려 준 증세보다 강했다.

카엘은 주머니 속에서 약환을 꺼냈다.

막시마가 선물해 준 루부스 열매와 네먼에게 줬던 주주베 열매로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약환을 미리 만들어 둔 거였다.

그걸 먹자 배 속에서부터 따듯한 기운이 돌았다.

손도 녹고, 속도 한결 편해졌다.

‘이제 됐으려나.’

빙한목 열매가 제대로 자리 잡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화롯불에 손을 갖다 댔다.

‘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네.’

열기가 느껴지긴 해도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아악!”

“어? 무슨 일이지?”

놀라서 돌아보니 소피아가 경악하고 있었다.

카엘이 화롯불에 손을 넣고 있는 걸 보고 비명을 지른 거였다.

‘이크, 언제부터 본 거지.’

“카, 카엘 님. 왜 자해를…….”

“그게 아니라, 불에 내성이 생기는 약을 먹어서 시험해 본 거였어. 이것 봐. 멀쩡하지?”

“엇!”

울먹이는 소피아를 달래며 화롯불에서 손을 뺐지만, 소피아의 굳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저, 저거…….”

“응?”

소피아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방금까지 손을 넣었던 화롯불이 꽁꽁 얼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

새파랗게 변한 손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손에서 나온 냉기가 화롯불을 얼려 버린 거였다.

카엘의 체질 덕분에 빙한목 열매의 약효가 강화된 거였다.

‘내성이 생긴 걸 넘어 방출까지 할 수 있다니! 고생해서 얻은 보람이 있네.’

빙한목 열매가 품고 있는 냉기를 꺼내 쓰는 거라 무한정으로 쓸 수 없겠지만.

특별한 능력을 손에 넣은 거였다.

카엘이 손을 보며 냉기를 가라앉힌다고 의식하자 바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소피아를 보니 여전히 얼빠진 채였다.

“소피아, 훈련받을 시간 아니야? 갑자기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아, 그게. 공작님이 부르셨습니다.”

“바로 가 봐야겠네. 혹시 뭐 때문에 부르셨는지 알아?”

“듣기로는 귀한 손님이 곧 오신다고 해서…….”

주저하는 모습이 반가운 손님은 아닌 모양이었다.

“귀한 손님 누구?”

“1왕자 저하가 오실 거랍니다.”

“그 망나니 왕자가?!”

“카엘 님!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시면 어떻게 해요?”

카엘의 말에 소피아가 화들짝 놀라며 누가 들었나 걱정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실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하지 마.”

레오폴드 브레프니.

브레프니 왕가의 장남으로 책과 검을 멀리하고, 늘 술과 여자에 빠져 사는 거로 유명했다.

거기다 어찌나 막무가내인지 왕국에 헌신하는 대귀족은 물론, 개국공신조차 기분 나쁘다고 몽둥이로 패고 다녔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망나니 왕자.

안 그래도 제국의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저 꼴인 걸 보고 왕국의 모든 이가 한탄했다.

저 망나니가 왕위에 오르면 망국의 길로 들어설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몬스터 대침공으로 클리페우스성이 무너지고 오크 군단이 대륙을 유린할 때였다.

몬스터를 퇴치하기 위해 나선 왕국의 군대는 연전연패하고, 성은 함락됐다는 절망적인 소식만 계속 들려왔다.

그 와중에 망나니 왕자는 뜻밖의 행동을 보였다.

어디선가 병력을 이끌고 출정해 몬스터와 싸우기 시작한 거였다.

혹자는 몬스터를 만만히 보고 공을 세우고 싶어 황금을 뿌려 용병들을 고용한 거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몇 번의 승전을 거뒀다.

알고 보니 그간의 망나니짓은 왕자의 위장, 군대는 왕국을 업신여기는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비밀리에 육성한 거라는 거였다.

‘결과적으로 몬스터에게 패배해 죽었지만.’

문제는 이곳 클리페우스성에서 1왕자를 봤거나 1왕자가 왔었다는 기억이 없다는 거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왔었나?’

회귀 전 카엘은 외부에서 손님이 오더라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할 때가 많았다.

전염되는 병은 아니지만, 손님들이 카엘에게서 병이 옮을까 꺼렸기 때문이다.

“근데 뭐 하러 여기까지 온다는 거야?”

“그게… 오크를 사냥하러 온다고 합니다.”

“사냥?”

지금은 대대적인 오크의 공세를 막아 낸 직후.

한동안은 활동이 뜸한 시기라 레인저와 함께 외곽을 돌면서 오크 순찰 팀을 잡는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보통은 오크를 사냥한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다.

누가 소드 마스터인 공작에게 와서 오크 사냥하고 싶으니 자리를 마련해 달라 하겠는가?

그야말로 1왕자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망나니짓이긴 했다.

그 실체를 생각하면 다른 의도가 있을 게 분명하지만.

‘근데 아버지는 왜 나를 부르는 거지? 설마 나보고 1왕자를 상대하라는 소린가?’

설마 했더니 정말이었다.

* * *

“레오폴드 저하를 제가 모시라고요?”

“그래. 네가 고생을 좀 해 줘야겠구나.”

카엘의 반문에 티겔이 쓴웃음을 지었다.

망나니 왕자를 상대시키려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분명했다.

기회를 봐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던 카엘은 내심 잘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로 알겠다고 하지 않았다.

“큰형이나 셋째 형도 계신데 제가 나서면 보기 안 좋지 않겠습니까?”

“브란은 다른 일로 당분간 성을 떠나 있을 테고, 막시마를 붙여 놨다가 괜히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흠.”

더 말하지 않아도 그 걱정은 충분히 이해됐다.

막시마는 1왕자의 망나니짓을 견디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고도 남았으니까.

카엘은 마지못해 승낙하는 척했다.

“…알겠습니다.”

“내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나. 어차피 오크 사냥 때 네가 동행하길 원했으니 피할 수는 없을 거다.”

“저를요?”

1왕자가 지명했다니 뜻밖이었다.

‘어찌 됐든 좋은 기회야.’

1왕자는 망나니가 아닐뿐더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비밀리에 마련해 뒀다.

그것 말고도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카엘은 그것들을 몬스터 대침공을 막는데 이용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제국과 싸우기도 전에 몬스터와 싸워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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