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녹색 피부의 불청객 (2)
오크 부대의 공격, 이틀째.
성벽 위의 레인저가 소리쳤다.
“오크들이 후퇴한다!”
“그러면 뭐 해, 다른 녀석들이 교대해서 쳐들어올 텐데. 지겨운 자식들!”
“외상값 받으러 오는 술집 주인보다 지독하구먼!”
한 레인저의 실없는 농담에 다들 피곤한 와중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오크 진영을 감시하던 레인저가 투덜댔다.
“젠장! 적 교대 부대가 벌써 출발했어.”
“제기랄, 오늘도 밤새 공격할 거면서 쉴 시간도 안 주네.”
“…….”
그 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또 오크들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암울한 거였다.
짝! 짝!
“자! 자! 다들 엉덩이 떼고 일어나서 불이나 밝혀. 뭐라도 보여야 오크 녀석들을 때려잡을 거 아냐!”
옥스가 손뼉을 치며 무거운 분위기를 깼다.
고참 레인저들도 한마디씩 하며 거들었다.
“그러게. 활 쏘려면 손이라도 좀 녹여야지.”
“에이, 오늘은 잠 좀 자 볼까 했더니.”
“어차피 아무 데나 쏴도 맞을 텐데 눈 감고 쏴.”
“어차피 공격이 없어도 감시하느라 못 잤을 텐데, 심심하지 않고 잘됐네.”
덕분에 무거운 분위기가 좀 가셨을 때, 신병이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저기 조장님, 저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겁니까?”
“…….”
맹랑한 질문이었지만, 옥스는 차마 화내지 못했다.
신병의 얼굴이 시커먼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쉬지도 못하고 계속 싸웠으니 지칠 만도 하지.’
다른 레인저들이 신입을 위로했다.
“오늘 밤만 새우면 되니까. 조금만 더 버텨.”
“그래도 막내 도련님 활약하는 거 보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
“오크 자식들 첫날에는 카엘 님한테 죽어라 덤비더니만, 오늘 피하는 거 봤어?”
“덕분에 좀 편했지.”
“…쿨. 음먀. 음냐.”
떠들어 대는 레인저들 사이에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린 신병이 내는 소리였다.
“조장, 어떡할까요?”
“하는 수 없지. 일단 구석에 처박아 둬.”
“이야, 조장이 원래 이렇게 자비로운 분이 아닌데. 막내 도련님과 어울리더니 사람이 착해진 건가.”
“오늘만이야, 오늘만.”
한편 옥스의 지시대로 신병을 구석에 옮기려던 레인저가 피식 웃었다.
“조장! 이 자식 잠꼬대하면서 웃는데요? 사랑하는 그대여, 어쩌고 하는 거 같은데.”
“뭐?! 다들 조용히 해 봐.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자. 흐흐.”
옥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신병에게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음냐. 음냐. 소피아 님, 제발 내 사랑을 받아 주…….”
쿵!
옥스가 냅다 신병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으.”
“이 자식이 성벽 위에서 드러누워 자? 평생 못 일어나게 해 줄까?”
“헉! 죄송합니다!”
머리를 움켜쥐며 아파하던 신병은 옥스의 벼락같은 호통에 벌떡 일어났다.
“우와! 너무하네.”
“꿈에서 소피아 님한테 구애했다고 저리 박정하게 구는 거 봐.”
“신병 갈굴 게 아니라 평소에 소피아 님한테 말이나 좀 걸지.”
“뭐야! 이 자식들아?!”
옥스가 발끈했지만, 레인저들은 겁먹기는커녕 낄낄거릴 뿐이었다.
빌어먹을 것들이라 중얼거린 옥스는 신병을 돌아봤다.
“어이, 신병!”
“네…….”
신병은 눈치 보면서 대답했다.
자신의 연심을 옥스에게 들켰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옥스는 화내지 않고 신병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순간적으로 발끈하긴 했어도 소피아에게 연정을 품은 건 별거 아니었다.
그런 사내들은 클리페우스성에 1개 중대는 넘어가고도 남았으니까.
지금은 그저 조장으로서 도와주려는 것뿐이었다.
“처음 오크 상대하니까, 춥고 고달프지? 내가 춥고 잠 올 때 버티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
옥스는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거기서 새어 나오는 냄새를 맡은 신병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건?! 수…….”
옥스가 얼른 신병의 입을 막았다.
“어허, 조용히 해. 들켰다가는 큰일 나.”
신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많이 마시지 말고 한 모금만 마셔.”
옥스는 막은 손을 떼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신병은 손을 치우자마자 곧바로 작은 병을 잡고 술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아니, 한 모금만 마시랬잖아!”
옥스는 쏘아붙이면서도 술병을 빼앗진 않았다. 자신의 신병 시절이 떠올라서였다.
‘그래, 힘드니까 술이 당기겠지.’
꿀꺽. 꿀꺽. 꿀꺽. 꿀꺽.
근데 신병이 술병에서 입을 떼기는커녕 계속해서 술을 삼켜 대는 게 아닌가?
얼굴도 뻘게졌다.
“얀마! 그만 좀 처마셔!”
“켁!”
참다 못한 옥스가 뒤통수를 때리자 신병이 괴로워하면서 술을 내뿜었다.
“이 귀한 술을 그렇게 마구 퍼마시면 어떡해?”
“귀한 술?”
“헉!”
술통을 뺏은 옥스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고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카엘 님!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왜 그리 놀라?”
“그거야…….”
옥스는 술병을 들어 보이다가 얼른 품속으로 숨겼다.
“이건 전투의 고단함을 이겨 내려다 보니…….”
“뭐가? 아무것도 못 봤는데?”
카엘이 모르는 척하자 다른 레인저가 대답했다.
“저거 술 말…….”
“잠깐.”
뒤늦게 카엘의 의도를 눈치챈 옥스가 얼른 나서서 무마했다.
“헤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벌써 오셨습니까?”
“다들 고생하니까, 기운 내라고 선물 가져왔지.”
“오옷! 선물이요!?”
카엘은 반색하는 옥스를 향해 작은 주머니 두 개를 던졌다.
“빨간 건 각성제. 잠 깨는 약이니까 졸릴 때 먹어.”
각성제는 쓴맛을 내는 라디칸을 정제해 쓴맛을 적당히 줄이고, 강장제 성분을 더한 거였다.
“어, 이쪽은 파란데 이건 무슨 약입니까?”
“그건 수면 유도제.”
사실 라디칸의 효능은 매우 쓴 맛과 달리 열을 제거하고 가슴의 답답함을 완화해 숙면에 도움을 주는 거였다.
추가로 숙면에 도움을 주는 약재인 글리시네와 단맛이 나면서도 약 흡수를 빠르게 해 주는 리커리시를 끓인 물과 섞은 거였다.
거꾸로 먹으면 곤란하니 헷갈리지 않게 파란색을 내는 약재까지 더했다.
“와! 지금 딱 필요한 거였습니다.”
“둘 다 꼭 필요할 때만 먹어, 오래 복용하면 설사할 수도 있거든. 며칠 먹는 것 정도로야 큰 문제 없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다 써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말로만?”
되묻는 말에 옥스가 움찔하더니 멋쩍게 웃었다.
“…하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죠.”
“그래? 그럼, 오크 녀석들 물러나면 바로 보자고.”
“그렇게나 빨리…….”
옥스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다른 레인저들이 꼴좋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 * *
“크취익.”
저 멀리서 오크의 콧바람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렸다.
한창 소리치며 분주하게 움직이던 레인저들은 하나둘 입을 꾹 닫았다.
오크들과 싸워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알아서였다.
“자, 오늘 밤만 더 버티자고. 다들 위치로!”
“네!”
옥스의 독려에 레인저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조장, 신병은 또 자는데 놔둘까요? 술도 꽤 취한 거 같은데.”
“아니, 이거 한번 시험해 봐야지.”
옥스는 씩 웃으며 아까 받은 약 주머니를 꺼냈다. 빨간 약환이 든 주머니였다.
“자, 이 녀석 입 좀 벌려 봐.”
“네.”
레인저가 신병의 양쪽 볼을 눌러 입을 벌렸다.
“으음?”
신병이 눈을 끔뻑거렸을 때는 이미 약환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꿀꺽.
“어?!”
각성제를 삼킨 신병이 눈을 번쩍 떴다.
“이야, 바로 잠 깬 거 같은데요?”
“누구 약인데. 막내 도련님 약은 효과 확실하잖아.”
“앗! 죄송합니다. 근데 제가 뭐 먹었나요?”
“어, 잠 깨는 약 좀 먹였지.”
“네?!”
“걱정하지 마. 막내 도련님이 주고 간 약이니까. 그나저나 어때? 속이 쓰리거나 아프거나 그러진 않아?”
옥스는 신병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각성제를 받았을 때 옥스는 대충 어떤 약재를 쓴 건지 눈치챘다.
바로 라디칸!
‘확실히 그걸 먹으면 잠이 확 깨지.’
그러나 너무 써서 혀를 대기만 해도 토악질을 할 정도였다.
막내 도련님이 조제하면서 먹을 수는 있게 만들었겠지만, 무척 괴로울 게 분명했다.
막상 신병은 별로 괴로워하지 않는 게 아닌가?
“조금 쓰긴 한데 먹을 만한데요? 눈이 번쩍 떠지는 것도 떠지는 거지만, 입안이 화해지는 맛이 별미네요.”
“그래?”
옥스는 빨간 약환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다가 날름 집어삼켰다.
‘웃?!’
정말로 입안에서부터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거기다 머리가 맑아지고 전신에 활력이 맴도는 거 같았다.
“이, 이거 정말 괜찮은데?”
“정말이요? 조장, 저도 먹어 볼래요.”
“저희도 좀 주세요.”
“아, 알았어. 많으니까 기다려 봐.”
옥스의 호평에 레인저들은 사탕을 원하는 아이들처럼 몰려들었다.
옥스는 붉은 약환을 딱 하나씩만 나눠 주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날 밤.
옥스가 지키던 구역은 오크와의 야간 공격을 무사히 막아 냈다.
그 와중에 사망자는 물론, 부상자도 하나 나오지 않았다.
“모두 수고했다! 우리 쪽 오크 피해가 제일 컸단다! 공작님도 칭찬하시고 포상도 내려 주신대. 밤새 군기에 흐트러짐 없이 전투에 임했다나?”
옥스가 부하들 앞에서 으스대며 말했다.
“우와! 정말인가요?”
“오늘 다 막내 도련님 약 덕분에 수월하다 싶었는데 그 정도일 줄이야.”
“근데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한데.”
“하암. 너무 힘내서 그래……. 나도 평소보다 화살을 두 배는 더 날렸거든.”
“하긴 있는 거 없는 거 다 갖다 써 버렸지.”
레인저들은 반색하면서도 피로를 호소했다.
“뒷일은 교대조에게 맡기고 우리는 푹 쉬러 가자고.”
옥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부하들을 달랬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틀 밤 새우고 겨우 한나절 쉬는데 어떻게 푹 쉬어요.”
“정리하고 돌아가면 바로 누워도 겨우 4시간이나 잘까.”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잠이 올지 모르겠네요.”
“그래? 차라리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
부하들을 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할 거 같았다.
‘이래서야 카엘 님이 주신 각성제 먹고 밤새 싸운 의미가 없는데……. 아! 카엘 님이 수면 유도제도 주셨지!’
옥스는 얼른 약 주머니를 꺼내 부하들에게 나눠 줬다.
“자, 이거 막내 도련님 약이니까, 가져갔다가 자기 전에 먹어!”
6시간 뒤.
다시 모인 부하들은 모두 표정이 밝았다.
“이야. 이 약 효과 너무 좋은데요? 이렇게 곯아떨어져 본 게 얼마 만인지.”
“그러게. 술통을 혼자 한 통 다 마시고 쓰러진 뒤로 처음이야.”
“한 통은 개뿔!”
“큰소리칠 때야? 너는 약을 미리 먹었다가 식당에서 잤잖아.”
“…개운하게 잤으면 됐지.”
“나도 개운한 게 오늘 밤새 싸울 수도 있겠는데.”
부하들이 너스레를 떠는 걸 본 옥스는 만족했다.
‘약효 확실하네. 역시 막내 도련님이야.’
* * *
보고서를 읽은 티겔 공작이 중얼거렸다.
“음. 올해는 유난히 피해가 적군.”
사망자는 한 자리, 중경상자도 이십여 명 정도밖에 안 됐다.
바로 작년과 비교해도 10분의 1 수준.
“다 막내가 만든 약 덕분입니다.”
브란의 말에 티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들었다. 약제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던데 이렇게 큰 도움이 되는 약까지 만들다니.”
“상비약으로 보급하는 게 어떨까요?”
“재정에 여유가 좀 생기면 나쁘지 않을 거 같구나.”
그 말에 브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매년 적자로 억지로 유지하는데, 재정에 여유가 있는 날이 올까? 싶어서였다.
그때 병사가 들어와 보고했다.
“돌격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알았다.”
티겔이 밖으로 나가자 진용을 갖추고 대기 중인 기사단이 보였다.
“클라모스 기사단의 위력을 오크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도록! 돌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
티겔의 독려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박력에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은 티겔은 손을 들었다.
“문을 열어라!”
성벽의 문이 올라가고 기사단이 뛰쳐나갔다.
미친 듯이 공격해 대던 오크들은 순식간에 기사단의 공격에 와해됐다.
일주일가량 이어진 공성전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 같았던 오크들의 체력이 바닥을 친 탓이었다.
“와아!”
“모두 죽여 버려!”
“잘한다!”
성벽 위에서는 연신 환호성이 들렸다.
몇 시간 뒤.
기사단이 귀환하고 난 두꺼운 성벽 너머에는 오크들의 시체만이 나뒹굴었다.
올해도 오크 부대로부터 성을 무사히 지켜 낸 거였다.
날은 여전히 춥고 거센 삭풍이 불어 대겠지만, 일주일가량은 공작이 포상으로 내린 술과 음식을 먹으며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다.
한편.
성벽 구석에서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비밀 통로를 통과해 나오고 있었다.
레인저 옥스와 경비대 백인대장 네먼.
그리고 카엘이었다.
‘좋아. 그럼, 전설 속의 약재를 찾으러 가 볼까?’
카엘은 기대에 찬 눈으로 회색산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