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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12화 (12/234)

12화 그리웠습니다

끼리리리릭.

성주의 근엄한 명령에 성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굳세게 닫혀 있던 철문이 틈을 보이자 놀들을 그 틈을 어떻게든 파고들어 오기 위해 몰려들었다.

몇 마리는 기어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안으로 들어왔다.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철옹성 요새 안으로의 침입.

놀들은 컹컹대며 기뻐하다가 이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의 정체는 찾기 어렵지 않았다.

바로 보이는 선두에 선 인간.

그 인간이 뿜어내는 중후한 존재감에 놀들을 꼬리를 말고 몸을 움츠렸다.

두려운 듯 낑낑대며 대가리를 바닥에 처박는 모습이 마치 포식자 앞에 선 것만 같았다.

카엘은 그 모습에 감탄했다.

‘기세만으로 제압하다니!’

당연하게도 티겔 브리운은 침입자를 제압하는 것만으로 그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부웅.

공기가 떨리는 소리와 함께 빼 든 검날 위로 새하얀 기운이 맴돌았다.

저것이 오러 소드.

깨달음을 얻은 소드 마스터만 펼칠 수 있다는 검술의 극의.

티겔은 그 눈처럼 새하얀 검을 하늘 위로 치켜들며 외쳤다.

“돌격!”

그 신호에 맞춰 아버지를 수행했던 클라모스 기사단의 군마가 일제히 투레질하며 뛰쳐나간다.

두두두두두두.

소드 마스터를 선두에 내세운 기병 돌격은 그 자체로 적에게 재난이었다.

성문 앞에서 얼쩡거리던 놀들은 짓밟히거나 그 거대한 창에 무참히 튕겨 나갔다.

성벽 밖으로 뛰쳐나간 다음에는 벼락처럼 적들을 거침없이 분쇄해 나갔다.

“폐문한다! 폐문!”

브란이 다급하게 지시를 내렸다.

기사단의 돌격에 흩어진 놀들이 성문 쪽으로 도망쳐 왔기 때문이다.

끼리리리리리릭.

다행히 성문이 닫히는 건 빨랐다.

놀들은 다시 굳센 성문 앞에 가로막혔다.

통과한 십수 마리 정도는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만으로 충분히 해치우고도 남았다.

카엘은 다시 성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클라모스 기사단의 돌격은 일전에 봤던 성내 기병들의 돌격보다 몇 배나 맹렬하고 집요했다.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의 대부대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흩어져서 도망쳤을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놀들은 성벽을 넘어오려는 시도를 멈출 수밖에 없었고, 레인저들은 안심하고 화살을 쏘아 댔다.

한편 티겔은 기병대에서 벗어나 놀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오거들을 상대했다.

새하얀 오러가 허공에 그어질 때마다 오거의 피가 치솟았다.

오러가 오거가 허둥대며 휘두르는 팔에 닿으면 팔이 동강 나고, 목에 닿으면 머리통이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앞에서 적은 허수아비에 불과해 보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저러니 아버지가 무너졌을 때, 성벽도 쉽게 무너져 내렸지.’

몬스터의 대침공 때의 티겔은 정상이 아니었다.

카엘의 어머니가 병환으로 사망한 뒤,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으니까.

물론, 티겔이 멀쩡했어도 버티는 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성벽 너머 회색산맥에는 놀 부족과 오크 부족이 동서로 나뉘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서로 사이가 나빠 협력하기는커녕 다투기 일쑤였다.

그런데 몬스터 대침공 때는 놀랍게도 그 두 부족이 함께 쳐들어왔다.

‘정확히는 오크가 놀을 부리는 거였지만.’

그걸 막아 낸다고 해도 이내 오거와 트롤을 뛰어넘는 강력하고 괴이한 몬스터들이 나타났고.

죽음과 절망이 가득한 대륙에 사자(死者)들을 부리는 사악한 네크로맨서들의 주인, 아크 리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에는 레드 드래곤이 나타나 대륙을 불태웠다.

소드 마스터가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었다.

“곧 전투가 끝날 모양이군.”

브란의 말대로였다.

오거까지 몇 마리 쓰러지자 전의를 상실한 적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성으로 귀환한 티겔은 투구를 벗었다.

격렬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모두 공작을 맞이하기 위해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아버지,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그래. 브란 너도 고생이 많았다. 막시마도 도우려고 나온 거냐. 장하다.”

“헤헷.”

아버지의 칭찬에 막시마가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사이 티겔은 두 아들의 바로 옆에 선 사내아이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너는…….”

카엘은 몸을 숙이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카엘 브리운이 브레프니 왕국의 방패, 클리페우스성의 온당한 주인에게 인사 올립니다.”

“카엘… 정말 네가 카엘이냐?”

“네. 아버지가 안 계신 사이에 카엘이 병마를 이겨 내고 쾌차했습니다. 서신을 보냈는데…….”

브란의 설명에도 아버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그래도 이렇게 건강해진 모습을 보면 네 어미가 매우 좋아하겠구나.”

‘아.’

카엘은 그제야 잊고 있던 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건, 당연히 어머니도 돌아왔다는 소리였다.

‘뭐라고 해야 하지.’

회귀했다는 걸 깨닫고 제일 기뻤던 건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는 거였다.

막상 곧 어머니를 볼 수 있다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카엘?”

뒤에서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카엘이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 브리운.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니였다.

‘뒷모습만 보고도 나인 줄 아시다니.’

그것만으로 울컥했다.

괜히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아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다가왔다.

“카, 카엘 맞지? 어떻게 된 것이냐.”

“맞습니다, 어머니. 카엘이 장하게도 이렇게 다 나았답니다.”

“뭐 해. 어머니께 인사드려야지.”

브란과 막시마의 재촉에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 됐든 건강해졌으니 됐다. 참으로 다행이야.”

먼저 다가온 마리안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작은 손으로 카엘을 얼싸안았다.

그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서야 카엘은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어머니.”

그리웠습니다.

* * *

카엘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차분히 이야기했다.

우연히 얻은 약학서를 읽고, 약을 만들어 먹었더니 병이 나았고.

몬스터 역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완화제를 만들고 나니, 잠깐 신성력이 생겨 성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어서 막시마가 카엘이 힘이 어찌나 세졌는지, 저번 전투에 창을 던져 오거를 해치웠다고 자기 일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자신과 대련해서 다쳤다는 소리는 뺐네.’

카엘도 굳이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어머니에게 걱정을 더해 주고 싶진 않아서였다.

어머니 마리안은 숨죽인 채로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워했다가도 흥분하며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휴.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마치 음유시인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은 거 같아.”

카엘이 생각해도 쉬이 믿기 어려운 일의 연속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허풍이라고 했을 테지.’

“어찌 됐든 간에 우리 아들이 병마를 이겨 내고 건강해진 게 제일 기적 같구나.”

마리안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다가 뒤늦게 손수건으로 훔쳤다.

그걸 본 카엘의 가슴이 아렸다.

부모님은 카엘이 불편해할까 봐 말은 안 꺼내셨지만.

듣기로는 이번에 복귀가 늦어진 것도 자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약재에 대한 소문을 들어 찾아다니느라 늦은 데다가 큰형 브란이 보낸 서신도 못 받은 듯했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잠자코 있던 티겔이 입을 열었다.

“테오로드 사제님께 들었다. 정말 신성력이 완전히 사라진 거냐?”

“…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최근 막내가 한 일만 해도 신의 기적이라 해도 손색없을 겁니다.”

“큰형 말이 맞아요.”

카엘이 고개를 숙이자 브란과 막시마가 옹호하고 나섰다.

형제간의 우애 어린 모습에 흐뭇하게 웃던 티겔이 말했다.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이번 기회에 중앙 교회로 가서 신앙 공부를 더 해 보는 건 어떠냐.”

“아니, 여태 아파 누워 있던 애를 내보내려고요?”

“당장에 보내자는 게 아니오. 테오도르 사제님이 추천서까지 써 주신다지 않소?”

“…그래도.”

걱정하며 반대하던 마리안도 추천서 이야기까지 꺼내자 무턱대고 반대하기 어려운 듯했다.

카엘은 아버지의 기대가 이해됐다.

아파 누워만 있던 아들이 성직자가 되어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다할 부모가 어딨겠는가?

게다가 자식이 중앙 교회에서 자리라도 잡으면 적어도 지금처럼 사제 한 사람만 마지못해 보내는 일은 없을지 모른다.

“에이, 막내가 힘이 얼마나 좋은데 사제가 되긴 아깝죠.”

“그건 그렇구나.”

막시마의 반대에 의외로 아버지가 바로 수긍했다.

“나도 힘만으로는 오거를 이기지 못하니까.”

“아버지도요?!”

“그럼. 오러를 깨우치기 전에 오거와 싸운 적이 있었지. 젊을 때라 힘이 넘치는데도 난도질 끝에 겨우 쓰러트리는 게 고작이었다.”

“아.”

그 이야기를 들은 막시마가 카엘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래 봐야 바위를 종이 썰듯 하는 소드 마스터의 오러에 비할 바는 못 되는데.

그때 브란이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막내가 레인저한테도 이것저것 배운다고 하더군요.”

“그래? 하긴 레인저 중대장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티겔은 턱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저 중대장은 이미 될 사람이 있습니다만.’

“우리 아들이 그동안 아주 답답했는지 이것저것 많이 경험해 본 모양이네요. 이제 첫걸음을 뗀 거나 마찬가지니 천천히 결정하라고 하죠.”

“부인 말이 옳소. 역시 당신은 참으로 현명하구려.”

“당신도 참.”

티겔이 칭찬하자 마리안이 부끄러워했다.

티겔은 그런 마리안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겉으로 봐도 마리안을 사랑하는 게 느껴질 정도.

이러니 마리안이 급환으로 사망했을 때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무척 상심했던 거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문제없었다.

‘어머니가 아플 때 내가 치료해 드릴 테니까.’

물론,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티겔이 건재하다 해도 이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보면 혼자서는 무리였다.

‘소드 마스터가 최소 셋은 필요해.’

마침 왕국에도 소드 마스터 둘이 더 존재했다.

문제는 하나는 왕성을.

다른 하나는 이곳의 정반대인 남쪽 끝, 제국과의 접경지대를 지키고 있다는 거였다.

몬스터 대침공이 있다고 해도 이곳까지 불러오기는 힘들었다.

‘역시 그 수밖에 없겠지.’

카엘은 몬스터 대침공 이후로 두각을 보였던 인재들을 포섭할 계획이었다.

동시에 병력을 모으고, 숨겨진 보물과 신비로운 약재를 찾아 스스로 강해질 필요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험에 나서야 했다.

‘이곳을 떠난다고 하면 어머니가 기겁하시겠지.’

그래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몬스터 대침공까지는 남은 기간은 대략 5년.

길다면 길었지만, 온 대륙을 여행해야 했다.

무엇보다 회귀 전에 알게 된 비극적인 사건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년에는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전에 여기서 해야 할 일부터 해치워야겠지만.’

일단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가 돌아오셨으니 그것부터 확인해 볼 작정이었다.

* * *

카엘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마침 소피아가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피아, 기사가 되고 싶어?”

“네? 제가요? 에이, 농담도 심하시다.”

“농담 아닌데? 진지하게 말해 봐.”

“…되면 아무래도 좋겠죠.”

“좋아, 내일 아버지께 가 보자.”

소드 마스터인 티겔이라면 회귀 전 잠깐 반짝했던 그녀의 재능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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