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신의 뜻이 떠났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브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반대로 그 의미를 짐작한 테오도르는 침통한 표정으로 대신 대답했다.
“…신성력이 사라졌다는 말을 하는 거 같군요.”
신성력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습니다.
…라는 게 성수를 더 못 만들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한 변명이었다.
어차피 성물이 없는 한 성수를 다시 만들 수도 없었고, 성직자의 삶을 거절할 이유로도 딱 좋았다.
브란이 놀란 얼굴로 확인했다.
“정말이더냐?”
“네. 아무리 성심껏 기도하며 다시 성수를 만들어 보려고 해도 안 됐습니다.”
“허허. 그런 일이…….”
테오도르가 안타까워했다.
“미련은 없습니다. 제 미약한 재주로 완화제를 만들어 사람들을 구하려 애쓰는 걸 보고, 신께서 잠시 과분한 축복을 내려 주신 것뿐이라 생각하니까요.”
“완화제?”
테오도르가 의문을 표하자 브란이 간단히 설명했다.
“막내가 성수를 만들기 직전에 몬스터 역병에 걸린 환자들의 병세를 완화하는 약을 만들었답니다.”
“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기특한 일을 했다고 신께서 보답하신 모양이군요. 계속 신께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응답해 주실 테지요.”
그러며 성호를 그은 테오도르는 인자한 얼굴로 덧붙였다.
“혹시나 성직에 몸담을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내 추천서를 써 드리리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카엘은 적당히 장단을 맞췄다.
‘휴, 이걸로 됐나?’
그때였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
저 멀리서 기다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정신이 번쩍 드는 요란한 종소리가 들렸다.
댕! 댕! 댕! 댕! 댕! 댕! 댕! 댕! 댕!
몬스터가 쳐들어왔다는 신호였다.
“아무래도 가 봐야겠군요. 사제님은 그만 쉬시지요.”
“무운을 빕니다. 신께서 지켜 주실 겁니다.”
성호를 긋는 테오도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브란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카엘과 막시마도 그 뒤를 따랐다.
밖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병영에서 병사들이 허겁지겁 튀어나오고 있었고, 지휘관들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엉거주춤하고 있는 병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다들 무기 들고 위치로 가!”
이 소란 속에도 성벽 너머로 몬스터들의 괴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컹! 커컹! 컹! 컹! 커컹!
‘이 소리는 놀인가?’
브란을 따라 성벽 위에 도착하니 저 멀리 새까맣게 몰려오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정말로 놀들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천 마리는 넘어 보였다.
‘생각보다 많군.’
몬스터 대침공 이전에도 이 정도로 많은 몬스터가 공격해 왔었는지 카엘은 전혀 몰랐다.
그저 성안 쪽에 누워서 희미하게 들리는 비상종 소리와 뿔피리 소리만 듣는 게 전부였으니까.
“젠장! 많이도 왔네. 이거 화살이 모자라겠는데?”
“왜, 겁나?”
“겁나기는, 나중에 사체 치우기 귀찮아서 그렇지. 킬킬.”
“우리 누가 많이 잡나 내기할까?”
성벽 위의 레인저와 병사들은 놀의 부대 앞에서도 여유 있어 보였다.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라는 건가?’
“…전 사수 배치 완료! 명령만 내려 주시면 즉각 사격 가능합니다.”
브란은 레인저 중대장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비대 중대장에게 물었다.
“빠르군. 성문 쪽은?”
“현재 집결 중입니다. 놀 부대가 성벽에 도달하기 전에는 충분히 집합할 수 있습니다.”
“좋아! 일단 적이 사격 범위 안에 들어올 때까지 대기한다.”
브란의 지시에 중대장들이 인사하고 흩어졌다.
보란 듯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놀 부대를 보던 브란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막내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아직 겨울도 아닌데, 이렇게 빨리 공격해 올 줄이야.”
카엘을 칭찬하는 게 못마땅한 막시마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이렇게 많은 몬스터를 보는 건 처음이군요.”
“아, 그렇겠군.”
“만날 누워 있으니 그렇지. 다들 몬스터로부터 이곳을 지켜 낸다고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막시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동안 아픈 게 막내 탓도 아닌데.”
막시마가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대자 브란이 제지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보니 다들 정말 대단한 거 같습니다.”
카엘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니, 오히려 놀라웠다.
회귀 전 다른 부대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에도 쩔쩔매며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곳은 완전히 달랐다.
장난기 어린 레인저와 병사들의 웃음 속에서도 군기가 어찌나 살벌한지 성벽에 숨 막힐 듯 무거운 전운이 감돌았다.
그것뿐이랴.
아직 전투 전인데도 코끝을 스치는 바람 속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은은히 배어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서 이 삭막한 성벽을 지켜 냈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막시마, 너도 전투에 참여한 적은 없을 텐데.”
“앗! 카엘 앞에서 그런 소리 하면 제 체면이…….”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럼. 오늘부터 저도 싸우겠습니다!”
“그래. 너도 이제 중급반이니 멀리서 구경하는 건 나쁘지 않겠지.”
그때 부관이 다가왔다.
“브란 님.”
“음, 알고 있다.”
그 말에 브란이 예리한 시선으로 성 밖을 쳐다봤다.
어느새 놀의 대부대는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가까워진 만큼 그 흉측한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하이에나의 머리를 한 주제에 인간처럼 두 발로 서 있는 데다가, 어설프게나마 갑옷과 무기를 든 기괴한 모습이 흉악함을 더했다.
“무섭지? 저건 놀이라는 건데, 오크랑 다르게 영악하고 집단전에 능하지. 이런 공성전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할 상대랄까.”
막시마가 잘난 체하며 설명했다.
‘교관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면서.’
실제로 겪어 본 몬스터는 카엘이 훨씬 많았다.
지금이야 놀과 오크 정도가 무리를 이뤘지만, 몬스터 대침공 때는 그야말로 온갖 몬스터가 뛰쳐나온 지옥이었으니까.
카엘은 막시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놀을 주의 깊게 쳐다봤다.
‘뭔가 이상한데?’
놀 부대의 이동이 느려도 너무 느렸다.
거의 주춤주춤 기어 오는 수준.
잠깐 살펴보던 카엘은 왜 그런지 깨달았다.
‘아, 저것 때문인가?’
중앙에 커다란 천으로 가려진 뭔가가 있었는데, 그걸 끌고 오느라 느린 모양이었다.
‘놀이 공성 병기를 쓴다는 말은 못 들어 봤는데, 대체 뭘까?’
자세히 살펴보려 할 때, 브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인저들 준비.”
척. 처억! 척!
“발사!”
레인저들이 활을 높이 들었다가 시위를 놓았다.
수백 개의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놀 부대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컹!”
놀들은 조악한 나무 방패를 들었지만, 제대로 화살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엉!”
“크아앙!”
수십 마리가 제대로 화살을 막지 못하고 쓰러졌다.
놀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성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금세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그래 봐야 성벽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레인저들은 계속 화살을 쏘아 대며 놀을 하나둘 쓰러트렸다.
문제는 적의 숫자가 끔찍하게 많다는 거였다.
그 와중에 눈 좋은 레인저 하나가 소리쳤다.
“온다! 주의해!”
“뭐가 온다는 거지?”
막시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카엘의 눈에는 뭔지 똑똑히 보였다.
약효로 신체가 강화된 게 시력에도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레인저가 주의하라는 건 투석구.
무리 사이에 있던 놀 중에 몇몇이 투석구를 던지기 위해 빙빙 돌리고 있었다.
“앗! 투석구다!”
막시마가 뒤늦게 정답을 맞혔다. 상품으로 놀들이 던진 돌멩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퍽! 퍽!
아직 거리가 먼 탓에 대부분이 허무하게 지면에 떨어졌지만, 몇 개는 성벽에 도달했다.
“곧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된다. 위험하니 내려가거라.”
“아닙니다! 적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등을 보입니까!”
브란의 권유에도 막시마가 투지를 보이며 거절했다.
“그래? 카엘은?”
“저도 괜찮습니다. 여기 있으면 안전할 거 같습니다.”
어느새 커다란 방패 뒤에 숨은 카엘이 대답했다.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다가온 놀들은 기다란 봉을 성벽에 댔다. 그리고 능숙하게 타고 올라왔다.
“적이 올라온다!”
“가만두고 보지 말고, 밖으로 밀어 버려!”
조장들의 지시에 병사들이 악을 쓰며 봉을 밀었다.
놀들의 공격은 단순해서 이대로라면 성벽은 충분히 방어해 낼 수 있어 보였다.
어차피 공략 안 될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대로 기세가 꺾이면 성문을 열고 반격할 거야!”
봉을 하나 밀어낸 막시마가 신나서 소리쳤다.
그때였다.
쿵!
쿵!
저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어디 공성추가 있어?”
“어, 저거. 저거…….”
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병사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오거였다.
“아니. 어떻게 놀들이 오거와 함께 나타났지.”
카엘은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다.
‘아까 커다란 천으로 가리고 있던 게 오거였군.’
천천히 오던 것도 오거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브란 님, 어떡합니까?”
“음.”
부관의 물음에 브란이 고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거는 레인저들의 화살로는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다.
가까이에서 힘 좀 쓴다는 전사들이 여럿 달라붙어야 겨우 상대할 수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브란이 지시를 내렸다.
“오거는 무시하고 놀부터 노려라. 놀이 퇴각한 후에 오거를 쓰러트린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지만, 오거의 등장에 놀들의 사기가 올라 기세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어지간해서는 안 물러나겠는데.’
쾅! 쾅! 쾅!
오거가 돌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성벽이 흔들렸다.
‘그나마 성문을 직접 안 두드리는 게 다행인가.’
그래도 바로 아래라서 그런지 진동이 생생했다.
바로 밑에?
“…….”
잠깐 고민하던 카엘은 근처에서 창을 발견하고는 집어 들었다.
“그걸로 싸우게? 괜히 창끝이라도 잡히면 위험해.”
뜻밖에도 막시마가 걱정해 줬다.
그 말대로 이제 성벽 위까지 도달하는 놀들이 하나둘 생기고 있었다.
병사들이 성벽 위를 오가며 바로바로 해치우고 있어 위험해 보이진 않았지만.
“놀한테 쓸 건 아닙니다.”
“그럼?”
카엘은 대답 대신 빈손을 아래로 내밀었다.
그 끝에는 오거가 있었다.
“…설마 오거한테 던질 셈이야?”
“네.”
대답한 카엘은 몸을 낮추며 자세를 잡았다.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자 근육이 불끈하고 솟아올랐다.
‘약효가 떨어지려면 이틀은 남았으니 아직 문제없겠지.’
계산을 마친 카엘은 창을 있는 힘껏 아래로 내던졌다.
슝!
오거는 바로 아래 있는 데다가 덩치만큼 커다란 과녁.
빗나갈 염려는 없었다.
문제는…….
‘이 공격이 통할까?’
* * *
푸욱!
무언가 거칠게 꿰뚫는 소리가 들렸다.
그 섬뜩한 소리에 소란스러운 전장이 일순간 멈췄다.
한편 카엘만이 그 적막 속에서 주먹을 쥐며 기뻐했다.
‘통했다!’
내던진 창이 오거의 거체를 비스듬하게 관통한 거였다.
오거는 꼬치가 된 상태로 절명했다.
오거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벼락이 내려친 느낌이리라.
모두가 난데없는 상황에 입만 벌리고 있을 때,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건 가까이 있던 한 레인저였다.
“오거를 해치웠다! 공작님의 막내아들이 오거를 해치웠다!”
옥스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외친 거였다.
거기에 호응해 성벽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막내 도련님이 오거를 해치웠다!”
“와아아아아!”
“막내 도련님 만세!”
성벽에서 엄청난 기세가 들끓자 놀들이 움츠러들었다.
반대로 레인저들은 기세를 높여 쉴 새 없이 활을 쏘아 댔다.
병사들은 두려움 없이 성벽 위로 올라온 놀과 맞서 싸웠다.
놀들은 지지부진한 공격 끝에 피해만 늘어나자 하나둘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던 브란이 지시를 내렸다.
“기사단 출진하라!”
이내 성문이 열리고 기사단이 뛰쳐나갔다.
“돌격!”
두두두두두!
도망치는 놀들을 그대로 돌파하며 분쇄해 나갔다. 놀들은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성벽 앞에는 놀의 사체가 끝도 없이 나뒹굴었다.
그것만 어림잡아도 4, 5백 마리.
성벽 위에서 백여 마리가 죽은 것까지 헤아리면, 절반이 넘는 적의 전력을 해치운 거였다.
의심할 여지 없는 대승!
브란이 성의 깃발을 높이 들고 소리쳤다.
“이겼다! 우리가 왕국을 지켜 냈다!”
승리 선언에 병사들이 환호했다.
“와아아아!”
“이겼다고. 이겼어!”
“개 같은 놈들한테 내가 질 거 같아?”
“어디 또 쳐들어오라 그래. 오줌을 질질 싸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그러던 와중에 병사 중 하나가 소리쳤다.
“카엘 님 만세!”
“그래, 이번에는 막내 도련님 덕분에 이겼지.”
그러면서 하나둘 카엘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카엘 님 만세!”
“카엘! 카엘!”
“카엘! 카엘! 카엘!”
심지어 브란이 미소를 지으며 가문의 깃발을 카엘에게 넘겨주는 게 아닌가?
카엘은 멍한 얼굴로 그걸 받아 들었다.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쥐는 날이 오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기에 너무나도 낯설었다.
“다들 보고 있는데 뭐 하는 거야?”
막시마가 투덜대는 소리에 정신 차렸다.
브란이 말했다.
“막내야, 걱정할 거 없다. 네겐 충분히 자격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나도 인정한다.”
‘걱정한 건 아니었는데.’
그리고 막시마.
‘네 인정 따위 필요 없거든.’
속으로 쏘아붙인 카엘은 당당히 서서 깃발을 꽉 쥔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터져 나온 사람들의 함성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