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9화 (9/234)

9화 없으면 만들면 되지 (3)

카엘은 곧바로 성수 제작에 돌입했다.

먼저 정수한 물을 받아 둔 대야 가운데에 은촛대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그 위로 깨끗하게 씻은 비스쿰을 얹었다.

‘마지막으로…….’

카엘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옥스와 네먼이 있는 걸 보고 한마디 툭 던졌다.

“지켜보면 부정 탈 거 같은데?”

그 말에 네먼이 바로 옥스를 끄집고 나갔다.

평소라면 구시렁거렸을 옥스였지만, 소피아가 있는 탓인지 얌전히 굴었다.

둘이 나가자 구석에 얌전히 있던 소피아는 눈치가 보였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카엘 님, 저는 안 나가 봐도 되나요? 괜히 저 같은 것이 있다가 부정 타기라도 하면…….”

“아니. 되레 네 도움이 필요해.”

“네?”

놀란 소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엘은 바로 앞의 대야를 가리켰다.

“여기에 손을 넣어 줄래?”

“여기에요?”

소피아는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엘 님이 고생해서 준비하신 건데, 어찌 제 더러운 손을…….”

“괜찮으니까. 어서.”

카엘의 재촉에 소피아는 조심스레 대야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물 위에 닿자마자, 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잔잔한 소용돌이가 일면서 시커먼 기운이 뭉실뭉실 퍼져 나오는 게 아닌가?

바로 몬스터의 마기였다.

“어? 어?”

“괜찮으니까 그대로 있어.”

카엘은 당황한 소피아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소피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은촛대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시커먼 기운을 하나둘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대야 안의 물은 처음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됐다.”

“…됐나요?”

“어디 한번 손 봐 봐.”

소피아가 물에서 손을 빼 들었다.

검보라빛이던 손이 원래대로 말끔하게 돌아와 있었다.

“어?”

자신의 손을 보고 놀란 소피아는 고개를 돌려 거울을 봤다.

얼굴도 검보라빛이 빠지고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어, 어떻게 된 건가요?”

“성수 덕분에 체내의 마기가 제거된 거야.”

소피아는 대야의 물을 내려다봤다.

“성수라니……. 이 물이 말인가요?”

“응.”

교구의 지도자들에게만 비밀리에 전수되는, 신성력이 없는 사제를 위한 성수 제작 비법.

그건 바로 신성력이 깃든 성물을 사용하는 거였다.

소피아에게 말은 안 했지만, 가보인 은촛대도 성물이었다.

이런 성물은 대부분 교단에서 생산해 지역 교구로 내려보내기에 중앙 교회의 힘이 막강했다.

다만, 물에다가 성물을 넣는다고 해도 바로 성수가 되는 건 아니다. 성물이 신성력을 방출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때 필요한 게 마기.

이번에는 몬스터 역병에 걸린 소피아의 손을 넣음으로써 성물이 사악한 기운에 반응해 신성력을 발산하게 만든 거였다.

발산된 신성력은 일시적이었지만, 비스쿰이 그 과정에서 물에 신성력을 담는 촉매 역할을 했다.

다만 문제는, 성물을 이렇게 사용하면 성스러운 힘이 사라진다는 거였다.

다시 축성을 받으면 되지만, 이곳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관상용으로만 쓰시니 괜찮겠지.’

그때 소피아가 엉뚱한 질문을 해 왔다.

“…아까 들었는데, 카엘 님, 정말 신성력을 가지신 건가요?”

“응?”

“근래에 갑자기 건강해진 것도 사실 좀 이상하다 싶었거든요. 기쁜 일이긴 해도 약을 먹었다고 바로 건강해지시다니… 다 신의 뜻을 받드시게 된 덕분이었군요.”

처음 핑계를 댈 때는 이게 통할까 걱정됐는데, 걱정이 무색할 만큼 너무 잘 통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으니 어떻게 끼워 맞춰서 이해하는 모양이지만.

“맞아. 누워서 신님께 기도했거든.”

“기도하셨다고요?”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친김에 소피아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던 카엘은 아차 싶었다.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만했다.

카엘은 원래 신실하게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왜 내 운명이 이러냐고 저주하기 일쑤였으니까.

카엘의 고통을 아는 소피아는 듣고도 모르는 척해 줬지만,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았다.

‘이거 괜히 먼저 나서서 이야기하면 안 되겠네.’

카엘은 속으로 혀를 차며 적당히 둘러댔다.

“어느 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진심으로 반성해서 그런지 신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 거 같아.”

“아!”

‘이번 변명도 통했나?’

“흐윽, 정말 다행이에요.”

소피아는 통하는 걸 넘어서 감동했는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과한 반응에 오히려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 좀 불러 줄래? 성수 가져가서 환자들 치료해야지.”

“아, 네!”

소피아는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갔다.

‘이걸로 한 건 해결이군.’

* * *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옥스와 네먼이 부하들을 동원해 성수를 환자들에게 나눠 줬다.

성수를 마신 환자들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됐다.

고마워하는 환자들에게 옥스와 네먼은 이게 다 공작님의 막내 아드님인 카엘 님이 내려 주신 거라고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덕분에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십 년 넘게 누워만 있던 공작님의 막내아들이 신의 뜻에 따라 성수를 만들어 사람들을 구했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주민들은 고맙다고 선물까지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카엘이 지내는 탑 아래에는 꽃을 비롯해 과일과 빵 등 갖은 선물이 가득했다.

카엘은 난생처음 받아 보는 환대에 얼떨떨했다.

소피아는 기뻐하며 빠짐없이 선물을 챙겨왔지만, 그게 며칠간 계속되자 갖다 놓을 곳이 없다고 곤란해했다.

그걸 보고.

“꺾어 온 꽃만 놔두고 다른 건 다 돌려보내.”

이렇게 지시했더니.

이번에는 물욕이 없고 소탈한 게 참된 성직자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참된 성직자라니 무슨…….’

황당해하고 있는데 큰형 브란이 만찬에 불렀다.

그 정도는 예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이 만든 성수가 클리페우스성 안의 주민들을 괴롭히던 몬스터 역병을 잠재웠다.

위기에 빠진 성을 구한 거나 마찬가지.

성주 대리로서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큰형님, 부르셨습니까.”

“아, 카엘, 어서 오렴.”

브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직접 얼굴을 보는 건 회귀하고 처음인가?

진한 눈썹이 아버지를 빼다 닮았으나 미소 때문인지 인상이 훨씬 부드러웠다.

“미안하다. 부모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더라도 형제 간에 자주 얼굴을 봐야 할 텐데 내가 신경을 못 썼구나. 많이 섭섭했지?”

“아닙니다.”

딱히 섭섭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섭섭해하기에는 브란은 너무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격무에 시달리시는 걸 아는데, 괜한 근심거리를 더해 드릴 수는 없지요.”

“그래.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아니, 네 덕분에 오히려 내가 살았으니 그걸 고마워해야 맞겠지.”

브란이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몬스터 역병이 돈다는 건 몬스터가 인근에서 활동한다는 의미.

게다가 이번 몬스터 역병의 병증이 지독한 것만 봐도 활동하는 몬스터들의 마기도 강할 가능성이 컸다.

더욱 경계를 강화하고 습격에 대비해도 모자랄 판에 경비병과 레인저들이 역병에 시달려 난감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병자였던 막내가 성수를 만들어 환자를 치료했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막시마, 너는 왜 아무 말이 없느냐. 막내가 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어… 왔구나.”

브란의 재촉에 우두커니 서 있던 막시마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셋째 형님, 오랜만입니다.”

대련 이후로 막시마와 마주치는 건 처음.

확실히 이전과는 대하는 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노골적으로 얕봤다면 지금은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카엘을 보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대놓고 귀찮게 하는 일은 없겠지.’

그거면 충분했다.

‘이거 영 불편한데.’

오랜만에 형제와 함께한 식사에 대한 카엘의 평가였다.

브란은 초반에 한두 번 말을 건네다가 피곤한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막시마는 식사 중에 힐끔힐끔 쳐다봤다.

카엘은 그저 꾸역꾸역 음식을 먹어 가며 겨우 식사를 마쳤다.

일어나려 할 때, 마침 경비병이 달려왔다.

“브란 님! 테오도르 사제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오! 드디어! 오시는 데 별일은 없다고 하더냐. 내 신전으로 가서 인사드려야겠구나.”

“그게, 테오도르 사제님이 바로 이곳으로 오시겠답니다. 카엘 님과 카엘 님이 만드셨다는 성수를 빨리 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래? 마침 카엘도 여기 있겠다 잘됐군. 이리 모시고 남은 성수도 가져오너라.”

카엘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사제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재중에 만들어졌다는 성수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잠시 후.

둥근 모자를 쓰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테오도르 사제가 나타났다.

테오도르는 카엘을 보자마자 기뻐하며 성호를 긋더니 카엘의 손까지 잡았다.

“오, 카엘 님. 이렇게 건강해지시다니 실로 신께서 인도하심입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이곳까지 오는 데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더군요. 신의 뜻을 펼치는 성자가 나타났다고요.”

테오도르의 칭찬에 카엘은 최대한 겸손하게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바쁘신 사제님의 역할을 잠깐 대신하라는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저는 테오도르 사제님을 대신한 거니 사제님이 마땅히 성자라 불리셔야겠지요.”

“허허.”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테오도르가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이런 분위기면 성수에 대해서도 별로 문제 삼지 않을 거 같았다.

“참, 성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기 가져다 놨습니다.”

브란의 손짓에 하인이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상자 안에는 성수로 채운 작은 유리병 세 개가 들어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걸 하나 집어 들고는 요리조리 쳐다보다가 기어이 뚜껑까지 열어 한 모금 마셨다.

“크으.”

독한 술을 마시듯이 소리를 내더니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럴 수가!”

테오도르는 감탄하더니 카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왜 저러지? 취했나?’

“이게 정말 카엘 님이 축성한 성수란 말입니까. 항간에서 성자라고 부르는 게 허언이 아니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 정도입니까?”

테오도르의 격한 반응에 놀란 브란이 물었다.

“네! 내 이토록 신성력이 충만한 성수는 처음 봅니다!”

그 반응에는 카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은촛대가 그렇게 강력한 성물이었을 줄이야.

‘다음에도 쓸 일이 있겠는데?’

강력한 성물이 되기 위해서는 축성하는 성직자의 신성력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신성력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인가도 중요했다.

그릇이 클수록 더 많은 신성력을 보관할 수 있으니 그만큼 강력한 성물이 될 수 있었다.

테오도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늙은이의 성급한 생각입니다만, 카엘 님을 성직자로 교육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기사와 레인저에 이어 카엘을 사제로 만들려는 사람까지 나타난 거였다.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성직자라면 장래가 촉망되니까요.”

“오호.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심지어 브란은 그 말에 구미가 당기는 듯했다.

‘나한테 신성력 같은 건 없는데 말이지.’

신성력이 있다 해도 성직자가 되긴 싫었다.

신성력이 존재하니 신이 존재함은 믿더라도,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이미 수십 년을 고통받으면서 신에게 기도했을 때, 신은 아무런 응답을 해 주지 않았었으니까.

카엘을 고쳐 준 건 신이 아니라 스승.

몬스터 대침공 이후 펼쳐진 지옥도에도 신은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직자의 생활은 끔찍했다.

교육 중에는 철저한 통제 속에서 생활하며, 외부 활동을 하더라도 교단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했다.

테오도르만 봐도 교단의 영향이 미미한 이런 외딴곳에 있으면서도 교단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대침공 때도 그 때문에 헛되이 죽은 성직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결정만 나면 제가 바로 추천서를 써 드리지요.”

“아,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테오도르 사제님, 정말 감사합니다.”

테오도르의 제안에 브란이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할 생각이 없는데, 벌써 추천서라니.’

상관없었다.

이 말만 하면 성직자로 만들려는 생각을 바로 접을 테니까.

“저기, 사제님의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안 될 거 같습니다.”

“……?”

“막내야, 그게 무슨 말이냐?”

카엘은 주저하는 척하다 정말 안타깝다는 듯 간신히 입을 뗐다.

“제게서 신의 뜻이 떠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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